순천 조계산 선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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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풍광과 진경 - 이호신
1995년 12월 166호
지역 답사로 길을 떠난 뒤 만난 절의 인상은 저마다의 빛깔로 채색된다. 또 시간이 흐르고 걸음에 잦아 질수록 나무처럼 가람의 이미지도 새로운 나이테를 그려 간다.
오 년 전, 섬진강 답사길에서 처음 조계산 선암사를 찾은 뒤로 해를 거르지 않았고, 올해에만 세 차례나 선암사를 찾은 것은 오로지 빛바랜 세월의 먼지와 녹을 묻힌 채 조계산 품안에서 피어나는 고찰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가람의 전각들과 돌담, 그리고 기왓장 하나에도 옛 사찰의 전형이 물신 풍기고 기상이 넘치는 고매古梅와 차가 이름난 선암사는 사계절 어느 때나 다양한 빛깔과 향기가 한껏 드러난다.
매화의 꽃망울이 터지고서야 봄날의 화초들이 다투어 피는데 영산홍, 지산홍, 백철쭉, 동팩꽃 등이 화신化伸의 세계를 토해낸다. 한여름에 다발로 피어나는 수국과 아름드리 옥향나무, 회향목이 싱그럽고 옆으로 들어 누운듯 처진 노송 또한 이 절의 독특한 조경이다. 또 늦가을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뒤 찬서리가 내리고서야 소담하게 피는 후원 차밭의 차꽃 축제는 빼놓을 수 없는 선암사의 향기이다. 따라서 목전의 설경을 두고 올 가을, 한 달에 두 번이나 절을 찾은 나는 아예 청파전에서 화구를 부려 놓고 지냈다. 이는 무엇보다 붓을 든 이를 각별한 인연으로 맞아준 주지 지허스님의 자상한 배려에 크게 은혜하고 감회(感喜)할 일이다. 불과 보름 전 자료집을 참고로 전경을 살피려고 운수암 일대를 헤매다가 아쉬웠던 나는 또 다시 낙엽이 날리는 늦가을 순천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언제 만나도 아름다운 아치형의 승선교는 선암사의 첫 인상이자 상정이 될 만한데 산에서 내려오는 두 줄기 물어 하나로 합수된다는 강선루에서 바라보니 물빛은 투명하고 수목들은 온통 가을빛의 향연으로 불어 붙였다. 길섶에는 소나무와 댓잎이 포개진 틈째로 차잎이 또렷한데 일주문을 오르는 태극형의 길목 계곡에는 촉촉한 물봉선이 앙증스럽다. 삼전에서 지허스님을 다시 뵙고 지난 시간의 화첩을 펴보이자 스님은 크게 반기며 <선암사> 단행본(1992 ; 남도불교문화연구회 발행)과 스님의 임기중 시행 할 `사찰복원계획서’를 함께 주셨다. 무엇보다 스님이 가람의 역사와 분위기를 고양시켜 주어 지난 시간의 이쉬움을 아우르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선암사는 조계산을 중심으로 송광사와 함께 나뉘어 아랫자락에 둥지를 틀었는데 동쪽 장군해서 흘러내린 두 가닥의 분지에 자리를 잡았다. 양울타리인 우백호 바깥쪽과 좌청룡 안쪽으로 물이 흘러 내리다가 절입구 강선루 아래로 합수되어 간다. 조계산정에서 바라보면 맞은편에 대, 소옥녀봉이 펼쳐지고 바로 앞에 잔대봉이 있으며 산중턱의 배바위는 마치 병사들이 사열하고 있는 듯한 형상이며, 그 아래 터 기슭에 가람이 있다. 옛 대웅전은 지금의 삼성각 자리이고 옛 절의 각 기둥수는 대웅전 3, 누각 5, 정문 7, 일주문1 이었으나 지금은 3, 5, 3, 1에 이르고, 가람의 형태는 축대 중심의 횡렬이 아닌 종렬로서 중심 삼렬로 이루어졌고 전체가 만다라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하니 새삼스럽기만 하다. 감사한 마음으로 물러나와 일부러라도 볼일을 볼만하다는 명소인 뒷간을 들러서 창파전 뜨락의 약수도 떠보고 저녁 공양 먼저 끝내니 이내 한지에 먹물이 스미듯 산사는 어둠에 휩싸였다. 법고 소리와 함께 붉은 가사를 걸친 저녁 예불의 장염이 번져나는 대웅전 뜨락은 마치 천 년 세월이 찰라였던 양 삼층석탑에 그 날의 초생달이 걸렸다.
이튿날 새벽 도량석 목탁 소리에 선잠을 떨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조계산 배바위를 향해 길을 떠났다. 길목의
대각암 가는 길은 밤이슬에 짖은 조릿대와 이끼낀 바위며 낙엽 밟히는 산길이 고즈넉한데 돌아보니 황금덩어리의
해가 숲에 잠겨 있다. 퇴락한 암자엔 고시생들이 머물러 있고 즐비한 감나무 까치밥을 향해 날아드는 어치들의 울음 소리에 길손은 걸음을 멈추었다.
산을 내려온 뒤 사흘을 더 절에 머물며 불상과 불화를 눈여겨 보고 진영각의 옛 스님들의 영정을 살펴보았다. 붓을 들고서 처진 소나무와 무량수전, 원통전 입구의 매화와 담장, 그리고 뒤꼍의 차밭에서 바라본 가람과 활짝 피어난 차꽃도 화폭에 담았다. 또한 무우전 툇마루에 앉아 각황전 일대의 뛰어난 조경과 마당에 흩어진 세월의 빛깔을 담은 기왓조각을 바라보며 먹을 갈았다. 선암사는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629)한 뒤 도선국사道說國師, 대각국사大覺國師에 이어 현재 여섯번째 가람 불사중인데 주지 스님 임기인 1998년까지 옛 가람의 웅지를 복원한다는 것이다. 전해오는 선암사 중창도(1147년)를 살펴보면 어렴풋이 나마 그 규모와 전반적인 분위기를 헤아려볼 수 있다. 현재 뒷간 과 해천당을 보수 수리중인데 가능한 선까지 이전의 재료를 그대로 살려쓰는 방법을 기조로하고 있음이라, 부디 사찰복원의 모범적인 사례로 길이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선암사의 전경은 뒷날로 미루기로 하였다. 가람의 불사가 매듭지어지는 그 날까지 철새의 도래지처럼 또 다시 찾아들어 조계산의 물과 바람소리를 즐기고 세월이 빚어준 기왓장 녕쿨과 아름다운 담장의 나이테를 가슴속에 그려 가면 될 터이다. 진정 이와 같은 설레임이 새날을 향한 그리움인 듯 싶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