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 • 황호균
왕궁탑은 백제시대에 만든 왕궁 위호 사찰인 관궁사탑
우리는 미륵사 옛터를 들를 때 마다 그 주변 익산 지역에 백제 불교유적들이 그득한 데 무척 놀라게 된다. 한 개의 탑과 불전을 하나의 원으로 해서 삼원의 가람을 삼은 이른바 삼탑삼곰당식의 독특한 가람 구조의 미륵사지는 물론이고 왕궁탑이라 불리는 관궁사탑을 비롯해서 칠충목탑이 섰던 제석사지와 지명 법사가 주석한 사자사지, 또 광배가 좋은 석불죄장을 모신 연동리사지 등이 그것이다. 왜 백제의 서울도 아닌 이 곳 익산지역에 백제의 무왕은 미륵사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왕궁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지명탓에 탑 이름이 왕궁탑이 되어버린 관궁사탑의 조성 시기가 왜 고려 설이나 통일신라 설 또는 백제 설로 그의견이 분분한지. 백제 무왕때에 지명 법사가 주석한 사자사가 자리한 산은 용화산인가, 미륵산인가? 백제와 신라의 두 거대 사철인 미륵사와 황룡사, 황룡사구층목탑 조성을 권유한 자장스님은 적멸보궁론까지 보태져 유명하게 되었지만 미륵사를 지을 때 신통력으로 용화산을 헐어다 연못을 메운 사자사 지명 법사가 무명한 이유는 패망한 나라의 설움인가 화두를 한 보따리 들고다니는 답사 길은 비가 와도 좋고 눈이 와도 괜찮다. 폐허가 된 옛 절터를 횡횡 바람 일으키며 휘적휘적 걸어다녀도 그만이다.
왕궁탑은 초가을에 백 일 동안이나 꽃이 계속 핀다하여 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배롱나무 꽃 사이로 보이던 그 늠름한 자태도 인상적이지만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 주변 잡스런 물상들이 흰 눈에 다 덮여 버리고 탑하나만 댕그라니 옛 절터에 넓다란 처마를 드리울 때 그만 미쳐버릴 것 같다.
어느 누가 이 탑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백제계 탑으로 보았단 말인가. 사리장치는 후대에 보수하면서 얼마든지 바꿔 넣기도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 조차도 모르고 항문-학문을 닦는 줄 알었더니 닦으라는 학문은 안 닦고 항문만 닦고만 공부가 짧으신 학자님들을 비아냥거리는 말-을 닦는다니 깝깝할 노릇이다. 통일신라 탑으로 보는 사람들도 그렇다. 지금 왕궁탑의 통일신라 부재들은 모두가 하중을 많이 받는 부분인 기단이나 탑신 같은 것들어어서 가장 하중을 덜 받는 부분인 옥개석의 중요성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어찌되었든 백제의 왕궁탑을 보면 통일신라 초기(682년경)의 감은사-문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문왕2년에 창건될 절-탑이 떠오른다. 신라의 서울인 경주땅 감은사탑을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유홍준 선생은 `아!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라고 하며 죽고 못산다. 그 탑 앞에 서면 장중한 위세에 주눅이 들어 오금이 저려온다 라고 감상하는 그 탁월한 심미적 유희, 여기에 힘입은 신라지역 사람들이 내심으로는 이 하늘을 찌를 듯한 강건한 기상에서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힘이 느껴진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여기에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로도 보는 익산 왕궁탑의 넓적한 지붕돌에서 느껴는 오지랖 넓은 백제 여인의 옷지락과도 같은 그 평안함이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 오지랖 넓은 옷자락처럼 드리운 지붕돌에서 승무僧舞출 때 살짝 치마 밖으로 삐져나온 버선코나 어깨 춤사위때 젖혀지는 손끝의 경쾌한 들림이 읽어진다고 설명할 때 왜 그리들 환호하고 찬란해 마지 않던가?
우리는 이 탑을 처음 봤을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어떤 화두 같은 의심, 곧 부여 정림사지 탑이 뻥튀겨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사리장치를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고 탑도 이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고려 초기의 백제계 탑설과 기단, 탑신 등의 보수된 탑재만을 너무 의식하여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탑이라는 주장에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하였다. 최근에 지주들를 기회가 있어 유심히 살펴 본 결과 어떤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백제계 석탑 어느 것에서도 왕궁탑의 지붕돌만큼 당당하고 처마 끝이 절묘하게 들린탑은 없지 않던가?
지붕돌들이 탑신이나 기단석보다도 더 옛스럽다거나 더 부식되었다는 육안관찰은 덮어두고 말이다. 오히려 부여 정림사탑보다도 앞설 것 같은, 그래서 미륵사탑과 정림사탑사이에 이 왕궁탑이 놓여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렇다면 백제시대의 목탑이 섰던 바로 그 자리에 백제시대의 왕궁탑을 세우고 또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에 하중을 가장 많이 받는 부분인 기단과 탑신 및 층급받침 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고려 초에도 일부 보수한 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왕궁탑이라 불리는 관궁사 탑의 본 모습일까? 모를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된 제석사지 사리장치와 왕궁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치의 내용물들이 똑같다는 사실이다.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에 따르면 칠층목탑이 639년 낙뢰로 불에 타자 섬초석에 봉안된 수정병과 동으로 만든 금강야경이 든 목철함은 다행히 무사하여 다시 절을 짓고 초석에 봉안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당시 백제인들의 보편적인 사리장엄 의식으로만 볼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아니면 그렇게 사리장엄구의 내용이 같을 수 있단 말인가? 639년에 혹 다시 절을 짓고 봉안한 곳이 지금의 제석사지가 아니고 2킬로미터쯤 떨어진 왕궁탑이라 불리는 관궁사지가 아닐까? 발굴해 보니 왕궁탑의 기단 아래에 흙을 켜켜히 쌓아 다진 판축으로 된 목탑의 토단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그다지 이상스럽지도 않다. 비어 있는 또 하나의 사리구멍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의문 투성이이다.
용화산 정상에서 바라다 본 미륵사 옛터와 서해바다 그리고 금강 하류의 곰 포구
왕궁탑의 사리 구멍은 좀 복잡하다. 1965년 해체수리시에 1충 옥개석 윗면 적심부의 방형 사리 구멍 두 개와 목탑 심초석에 해당하는 찰주 히부의 네모난 심초석에 마련된 품자 모양사리 구멍에서 많은 사리 장엄구들이 발견 되었다고 한다. 1층 옥개석에서는 금을 얇게 종이처럼 만든 금강경판 19매를 담은 금동합과 붉은 칠의 외함 및 녹유사리병을 담은 금동합과 붉은 칠의 외함이, 심초석에서는 금동불, 금요령, 향, 철편이 그것이다. 위치가 다른 두 곳에 모두 5개의 구멍을 뚫었다는 것은 인도에서 한 기의 탑을 시대에 따라 여러 곳에 사리장엄을 했다는 발굴조사 보고로 보아 그다지 이상하지도 않다. 또 품자 모양 사리 구멍 가운데 서쪽 구멍이 텅 비어있는 이유와 함께 왜 녹유사리병에 진신사리를 넣고도 모자라 금동합에 법신사리라는 경전을 넣었는가? 법신사리라는 경전을 탑에 봉안한 예는 불국사석가탑(751년경)의 무후정광다라니경과 화엄사 사사자삼층탑(755년)의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에서 그 유래를 볼 수 있다. 왕궁 탑에서 나온 사리장치를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지 않고 통일신라 빠르면 8세기 늦어도 9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주장도 등장했다. 국립전주박물관의 상설 전시장을 들르면 언제든지 왕궁탑 사리장엄구들의 참배가 가능하다.
제석사지는 왕궁리 347-1로 왕궁탑에서 동고도리 석상 반대편쪽인 동쪽으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민가와 논밭의 나즈막한 토단위에 네모난 사리구멍이 뚫어진 목탑 심초석만 전한다. 제석사지가 위치한 일대는 궁평리, 왕궁탑이 우뚝 선 곳은 왕궁리라 불리는 것으로 보아 이 두 곳은 왕궁과 관련된 절터가 분명하다. 관궁사의 왕궁탑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은 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이 일대를 1989년부터 장기적인 계획으로 발굴 하고 있으니 좀더 기다려 볼 일이다.
백제는 미륵사를 지은뒤 망하나, 신라는 황룡사를 세우고 삼국을 통일하게 된 까닭
미륵사의 옛터에 대한 발굴은 이제 끝났다고 한다. 문화재연구소에서 1980년부터 1994년까지 장장 15년 동안의 발굴을 마치고 이제는 유물전시관을 지어 거기에다 유물들을 전시할 계획 이란다.
신라는 황룡사를 세우고 섬국을 통일하지만 백제는 미륵사를 지은 뒤 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당시의 삼국 상황을 살펴보면 매우 숨막히게 돌아간다. 7세기 초는 고구려가 수 양제의 대규모 침략군을 살수전투(영양왕 23년, 612년)에서 몰사시켰고 당태종의 침략군을 안시성 전투(보장왕 3년, 645년)에서 격파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신라에게 커다란 위협을 가한다. 그것은 앞서 백제가 신라와 공동작전으로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의 옛 백제 땅을 신라가 일방적으로 무력에 의해 강점해 버리자 이에 격분해서 쳐들어간 백제 성왕이 도리어 신라군에 잡혀 죽은 죽에 대한 보복 행위였다. 이러한 군사적인 보복 작전은 위덕왕(554~598), 무왕(600~641년) 때에 계속 진행되었고, 특히 의자왕(641~660년)이 즉위하면서 더욱 격렬해진다. 선덕왕 11년(642)에는 백제 의자왕이 신라의 서쪽지방 40여 성을 취하였고, 연이어 백제와 고구려가 합세하여 당항성을 쳐 당과 이어지는 해로를 차단하는 한편, 또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이 함락되자 성주 김품석과 김춘추의 딸인 그의 아내가 죽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
의자왕의 대규모 군사 작전에 위축된 신라는 낙동강 동쪽으로 후퇴하게 되자 선덕여왕이 위기의식을 느껴 당태종에게 자장 율사의 귀국을 간곡히 부탁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들고 온 자장 율사는 온 신라전역에 적멸보궁론을 퍼뜨리고 종교의 힘으로 재무장한 신라는 자장스님이 귀국한지 일년 뒤에 김유신이 백제의 7개의 성을 탈취하는 반격의 힘을 발휘한다.
사실 우리는 백제 패망 이유를 의자왕의 독재와 호사스런 생활에서 찾지만 이는 김부식이 신라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하기 위하여 주장한 것 뿐이다. 백제 의자왕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해동증자라는 칭송을 받은 그런 분이다.
김춘추의 외교로 당 소정방이 1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부여를 공격하고 신라는 김유신이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로 향하는 이른바 협공 작전에 백제가 제대로 대향하지 못한 실제의 이유는 다른 데에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이유로는 신라가 당시 최고의 철 생산국가인 가야를 합병한 뒤 철갑으로 무장한 기마병을 양성하여 보병전에 능한 백제를 기마전으로 제압한 어떤 전술상의 변화, 곧 보병전에서 기마전으로 재빨리 적응하지 못한 전술상의 문제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당시 중무장한 기마병의 보유 비율이 신라와 고구려가 높은 반면 백제와 가야는 상대적으로 낮아 이들 두 나라가 일찍 패망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이인철씨의 논문-6~7세기 무기 무장과 군사조직의 편제-신라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논총 7, 한국고대사연구회 편, 재단법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5)이 이미 세상에 나왔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향락과 충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은 왕이 뭐 그리 이쁘다고 패망한 나라의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겠는가?
미륵사는 조선시대가 아니라, 통일신라때에 탑에 벼락을 맞아 이미 망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미륵사지의 폐사 시기에 대해서 살펴보자. 미륵사지 발굴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선 정유재란 때에 미륵사가 폐사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719년 성덕왕 18년에 금마군의 미륵사가 벼락을 맞았다고 기술한 <삼국사기>의 기록에 비추어 보더라도, 719년에 서탑과 서금당의 서원을 제외한 동원과 중원이 이 무렵에 파괴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원과 동원의 발굴 결과 청자는 물론 통일신라 중기 이후의 토기들도 출토되지 않는다는 발굴자의 이야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동원과 중원은 벼락 맞은 8세기 초반에 사용이 중단되었고 백제 때 완성된 삼탑삼금당식의 미륵사지 가람은 이때에 이미 폐사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백제 절터 미륵사지는 이때 이미 절단 난 것이다. 서탑을 제외한 서금당지는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그 위층에 건물이 들어서고 그 주변으로 조선시대 건물지까지 외곽에 들어섰기 때문에 더욱 분명해진다. 이처럼 8세기 초반에 이미 벼락 맞아 폐사가 된 미륵사지를 정유재란 때까지 법등이 이어졌다고 하는 생각은 불교 미술사를 전공하지 않은 이가 단순히 절터에 건물이 들어선 흔적만 보고 법등이 이어졌다고 해석한, 다분히 현상적으로만 파악한 오류이다.
미륵사 옛터를 들르는 분들이 한결같이 복원된 동탑 앞에서 실망하여 고개 돌리고, 무너진 서탑에서 가슴을 쓸어 내리다가 삼금당의 초석이나 회랑, 강당지, 중문지 등은 뻘로 보고 그냥 지나치고 통일신라 중기에 만든 당간지주 앞에서 물끄러미 서 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미륵사 옛터에 잘 알려지지 않은 보물 하나, 그것은 연못 속에서 막 피어나려는 듯한 연꽃을 신의 솜씨로 조각한 석등 하대석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시대의 석등은 부여 가탑리석등 하대석과 이 미륵사지 석등부재들이 전부이다. 이 희귀한 미록사지 백제 석등은 옛 부재를 잘 살려 국립전주박물관• 앞뜰에 복원해 놓았다. 한참을 바라보면 아래로 넓게 퍼지는 연잎의 끝이 위로 살짝 들릴 듯한 착각마저 드는 건 지나친 사삭일까? 발굴 결과 미륵산자락을 허물어서 큰 연못을 메우고 거기에 미륵사를 지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모래층이 뻘층 위를 두텁게 덮었다고 한다. 연못을 메워 만든 미륵사, 벼락맞아 부서진 미륵사, 그 폐허 속에 벙그러진 연꽃.
미륵산(용화산) 꼭대기에서 미륵사 탑과 서해바다 그리고 금강하구둑에 뱃길이 막힌 금강 하류 곰 포구(웅포)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절경
백제시대 절인 사자사 옛터에 최근에 작은 규모의 암자를 지었다 해서 사자암이라 부른다지만 여전히 우리의 고개는 갸우뚱하다. 부여 문화재 연구소 발굴 결과 사자사라 새겨진 고려시대의 명문기와와 많은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정작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라갈 만한 유적과 유물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무왕조를 보면 왕비가 된 선화공주와 무왕이 된 서동이 사자사지명 법사를 만나러 가다가 용화산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물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길을 멈추고 예를 올렸다고 한다. 이 곳에 절을 세우자는 선화공주의 간청에 따라 무왕은 사자사 지명 법사의 신통력을 빌려 하룻만에 산을 헐어 못을 메우고 그 위에 절을 지었다. 미륵삼존을 본받아 탑과 회랑을 세 곳에 각각 세워 미륵사라 불렀으며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신라 진평왕이 신라인의 기술자를 보내 그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이 때가 7세기 초이며 그 뒤 7세기 중엽에는 신라가 황룡사 구층탑을 민들면서 백제의 유명한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자 이를 백제가 수락하는 등 겉으로는 전쟁을 하면서도 안으로는 승려의 교류와 함께 불사를 이루는 협력 관계를 보인다.
이런저런 생각도 하면서 사자암을 지나 한오 분쯤 걸어 올라가면 용화산-미륵사지 뒤편 산을 우리는 용화산이라 부르나 마을 사람들은 이를 미륵산이라 하고 그 오른편 산을 용화산이라 달리 부른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 하다
-정상에 다다른다. 미륵사 옛터와 서해바다와 금강 하구둑에 뱃길이 막힌 곰 포구(웅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더 장관인 것은 해발 430미터의 나즈막한 이 산정상에서 주변을 빙 둘러보니 늦 가을 들녘이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주변이 이렇게 훤히 조망될 수 있는 산이 이 용화산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주변에 미륵산성의 흔적도 여기저기에 보여 아마도 유사시 단기간의 농성을 위해 쌓은 배후산성인 듯 싶다.
한 없이 넉넉한 산인 익산 지역에는 그냥 예사로 넘길 수 없는 백제 유적과 유물들이 많다. 미륵사지, 왕궁리의 궁궐터, 관궁사지의 왕궁탑, 제석사지의 칠층목탑 심초석, 연동리사지의 백제불, 마룡지, 익산 쌍릉 등이 그득하다. 과연 익산은 백제의 별도가 아니라 마지막 도읍지로서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준비하는 막바지 단계에서 그만 멸망해 버린, 그래서 후백제 견훤도 왕궁탑을 개탑하면서 ‘백제의 한` 어쩌고 저쩌고 하며 봉기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지 않았겠느냐 그말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