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사지 발자취
이 절의 연혁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별로 없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영암사적연국사자광탑비靈巖寺寂然國師慈光塔碑」라는 옛 탁본첩에서 역사의 한 부분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인 1014년에 적연국사가 여든세 살로 영암사에서 입적하였으며, 비는 고려 현종 24년(1023)에 세웠다. 이 정도의 기록이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의 전부이다.
다행스럽게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1984년에 절터를 발굴하여 미흡하지만 영암사의 연혁을 추스르는 데 얼마쯤의 도움을 주었다.
건물 터로는 불상을 모셨던 금당, 서금당, 회랑 등의 건물 터가 확인되어 당시의 가람 규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금당은 중, 개축 등 세 차례의 변화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절터에는 수난의 역사가 깃든 보물 제353호인 쌍사자석등이 있다. 이 밖에 보물 제480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489호로 통일신라 말기 형식의 비 아랫부분인 거북이 두 기가 절터에 남아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적연선사의 묘탑으로 보이는 부도가 사역 서쪽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건물의 초석과 축대가 잘 남아 있으며 발굴 결과 통일신라 말에서부터 고려시대에 걸친 각종 기와편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금동여래입상 한 점은 8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 절의 창건 연대를 짐작하게 한다.
인걸은 간 데 없고 뎅그라니 놓인 빈 절터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984년 9월 처음 조사를 할 무렵에 가람은 동향이며, 중앙에는 삼층석탑과 쌍사자석등이, 법당 정면에는 본디 석등이 놓였던 축대가 돌출 되었다. 그 위에는 면석과 초석이 노출된 건물지가 보이고 서남쪽으로 오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두 기부와 그 사이에서 금당지가 동향으로 자리한다. 금당지의 북동쪽으로 십 미터쯤의 거리에 당간지주처럼 좁게 가공된 장대석 일 주가 우뚝하다. 금당지의 동북쪽과 남동쪽 즉 삼층석탑의 북쪽과 남쪽에 해당하는 곳에는 현재 영암사로 사용하고 있는 목조건물 두 동이 배치되었고, 석탑 동쪽 축대 중앙에는 근래에 만든 산문이 들어섰다. 중심부에 남, 북으로 배치된 두 목조 건물 가운데 북쪽 건물은 현재 영암사 금당이며 남쪽 건물은 일반 요사로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었는데, 두 건물 모두 1960년대에 인근 주민들이 부락의 고가를 옮겨와서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영암사지는 근래에 지은 건물과 석탑이 서 있고 석등과 금당지가 자리한 지역과 그리고 귀부가 놓여 있는 서금당 지역으로 3단의 층단식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형적으로는 귀부가 있는 지역이 가장 높고, 중간이 금당지이며 석탑과 석등이 있는 지역은 가장 낮은 지역이다. 물론 이 석탑이 놓인 지역의 한 단 아래 지역도 현재는 논으로 개간되어 사용되고 있지만, 당시는 영암사 역내에 속하였던 곳이며 이 곳까지 건물지가 들어섰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가운데에 석탑 주변은 남북으로 건물이 들어서면서 화단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대부분의 지형을 변경시킨 상태로서 원상 파악이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더욱이 조사 뒤에 밝혀진 내용이지만 남쪽의 요사가 자리한 곳은 영암사의 중문지에 해당되는 곳이었고, 북쪽 금당이 있는 곳은 당시 구당지와 같은 큰 건물 지였으며, 현재 동쪽에 있는 산문 주변 화단은 회랑지였는데 모두 후대에 교란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석탑은 하대중석 위 부분이 도괴된 것을 주민들이 다시 복원한 것이며, 석등은 몇 번 이동되는 수난을 겪다가 다시 금당지 축대 위인 제 자리에 놓였던 것을 축대 붕괴 위험이 있으므로 낮은 쪽인 석탑 옆에 이전 복원하여 두었다. 금당지는 폐사 이후 뒤편에 산사태로 모래가 쌓였던 것을 1959년 가회 면민들이 영암사지를 정리 복원한다며 쌓였던 모래를 파서 회랑 주변 뜰을 넓히고 그 위에는 고옥을 이전해 와서 영암사라는 건물을 세웠으나 문화재 관계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뒤에 다시 아래로 옮겼다. 그 때 축대 보수와 정화사업을 실시한 관계로 조사 당시는 초석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주변은 면석이 정연하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금당지의 남쪽 계단에 맞붙어서 축대와 초석을 갖춘 또 다른 건물지가 일부 노출된 상태였으나, 대부분 지하에 매몰된 상태였다. 금당지 뒤편은 높은 축대가 있었는데 그 축대 아래에는 산에서 흘러내린 흙모래와 절에서 버린 기와 조각이 비스듬하게 쌓여 있었다. 서금당지의 두 개의 귀부가 있는 곳은 앞은 밭으로 경작되었다가 일부 지역은 동계 휴경 중이었고, 두 귀부 사이에는 작은 건물지가 있었는데 일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남은 초석과 불상 지대석 등의 욕구는 크게 교란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밖에도 잡목이 우거진 주변 숲과 밭으로 사용하고 있는 금당지 북쪽의 경작지에는 이 영암사와 관계 있는 각종 유구들이 배치되어 앞으로 발굴 조사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고 80년대의 모습을 자세히 적고 있다.
기와나 청자 조각에 담긴 역사의 흔적
영암사지는 금당지 조사에서 적어도 세 차례의 걸친 증, 개축 사실의 발견과 서금당지 좌우에 자리한 거북이 가운데 하나는 고려 초기 적연국사와 관련되고 탁본의 기록대로 부도가 확인되었다는 것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금당지 앞면의 회랑지와 남쪽의 중문지 그리고 북쪽 건물지도 확인하였다. 주목할 만한 점은 금당지 기단 면석에 영수상을 돋을 새김하였는데 네 방향 모두 계단 좌우에 배치하였다. 더구나 계단 난간의 상체는 사람 모습이고 하체는 새인 가릉 빈가가 부조되어 있어 장엄에 힘쓴 당시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뜨거운 정열이 느껴지는 듯하다.
발굴 조사로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막새의 경우 연화문, 일휘문, 당초문등이 대부분이고 도자기는 순청자와 상감청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고려시대의 유물들이 많아 사찰의 번성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금당지 기단 부에서 출토된 비천상문 와당과 금당지 뒤뜰에서 수습된 금동여래입상은 연대가 더 올라가는 통일신라 말기의 것으로 창건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또 금당지 앞의 삼층석탑과 쌍사자석등은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폐사 시기는 절터 안에서 출토된 막새나 토기, 자기 조각의 생김새를 고려한다면 고려 후기까지 존속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영암사지는 늦어도 9세기 중엽에 시작되어 고려 후기까지는 법등을 밝혔던 큰 절 집으로 호젓한 산중에 자리 잡은 점으로 보아 창건 당시부터 참선 도량으로 터를 다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적연선사의 비와 부도 그리고 또 하나의 비
영암사지 안에는 거북이 두 기와 부도한 기가 전한다. 이 가운데에 부도와 거북이 하나는 적연선사와 관련된 유물일 것이며 다른 하나의 거북이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서금당지의 동서 옆에 놓인 두기의 거북이는 모두 비신과 이수가 없다. 비신만 남아 전해졌어도 이리 답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쪽 거북이가 서쪽 거북이보다 더 큰데, 꼿꼿이 뻗은 목과 용머리 같은 거북이의 머리,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등 서쪽의 거북이와 닮았다. 동쪽 거북이의 등에는 육각으로 된 거북이 등갑문을 새겼고, 등 중앙에 마련한 비좌의 주변에는 아주 뚜렷하게 인동문을 조각하였다. 서쪽 거북이는 동쪽보다 키가 낮다. 등 중앙에 마련한 비좌의 네 면에는 안상과 연꽃을 조각하였으며, 동쪽 거북이에 비하여 순박한 조형기법을 보이고 있다.
이 거북이는 누구의 행적을 기록한 비일까. 이런 수고는 벌써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영암사지 발굴보고서를 쓰신 심봉근 선생님이 하였다. 선생님은 성루대학교 도서관을 뒤져 「영암사지적연국사자광탑비靈巖寺寂然國師慈光塔碑」라는 옛 탁본첩을 발견하였다. 탁본첨에 따르면 “속성은 김씨이며 경산부인京山府人으로 고려시대 1014년에 83세로 영암사에서 입적하였으며 서봉에다 장사를 지냈고 비는 고려 현종 24년(태평太平 3년, 1023)에 세운다”는 기록이 보인다. 발굴 조사 당시에 밝혀진 또 하나의 사실은 “서봉에 장사를 지냈다는 내용을 주목하고 절 서쪽으로 1.5길로미터쯤의 산속에 부도부재가 나뒹굴고 있어 촌로들에게 연유를 물어보니 이 부도는 본디 가회면 중촌리 산 24번지에 있었으나 조선 말기에 산 주인이 선대의 묘를 쓰려고 계곡에 넘어뜨려 버렸다고 한다. 계곡의 홍수로 가벼운 것은 밀려 내려가고 무거운 것은 그 주변이 남아 있어 실측하여 도면상으로 붙여 보니 탑신과 상륜부만 없는 상태로 복원이 가능하였다.”고 적연국사의 부도를 찾아내어 도면상으로라도 복원한 점이다.
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팔각원당형으로 지대석에 안상내에는 영수상과 그 위의 중대석 받침에도 구름 속의 용문양을 돋을 새김하였다. 영수상은 금당지 기단 면석에서 본 영수상의 모습과 비슷하여 적연국사 당시에 금당지 기단을 개축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상대 석은 연잎이 위로 퍼지는 모습이다. 이 같은 부도의 모습은 통일신라시대 팔각원당의 부도 양식을 잘 이어 받은 것으로 고려 전기 양식을 보이며 적연선사의 입적 시기와도 잘 어울리므로 이를 적연선사의 부도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로써 이 부도의 발견은 옛 탁본의 기록과 도괴된 부도와 정황이 잘 어울리므로 1014년이라는 제작 연대가 고증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부도를 하나 더한 값진 성과를 거둔 셈이다.
그렇다면 서금당지 좌, 우 두 개의 거북이 가운데 어느 것이 적연국사와 관련되고 또 하나의 거북이는 누구의 탑비란 말인가. 겉모습으로는 그다지 시기의 폭이 크지 않을 것으로 보여 지금으로서는 무척 조심스럽다. 굳이 가려내라 한다면 금당 지의 왼편 거북이는 오른편 거북이에 비해 낮고 세련된 모습이어서 통일 신라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고, 오른편 거북이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탑비의 거북이 모습에서 흔히 보듯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시대의 당당한 힘을 담고 있는 듯하여 적연국사의 탑비와 연대가 가장 가깝다. 다른 거북이 쓰임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으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적연국사의 스승의 탑비이거나 영암사의 사적비의 거북이 가운데 어느 하나일 것이다.
금당 앞에 쌓은 삼층돌탑
금당 앞에 자리한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전형적인 신라 양식을 갖춘 것으로 네모난 옥개석으로 만든 삼층석탑이다. 하층 기단은 지대 석과 면석을 갖추고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 일 주일씩을 조각하고 위에 갑석을 얹었다. 갑석의 윗면에는 두 단의 굄을 조각하여 상층기단을 받치게 되었다. 상층 기단의 면석은 네 매의 판 석을 세우고 위에 두 매의 판 석을 갑석으로 덮었다.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일 주씩을 모각하였고 갑석의 처마 밑에는 두꺼운 부연이 있으며, 윗면에는 두 단의 높은 굄으로 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 부는 각층마다 옥신과 옥개를 별석으로 만들었는데, 1층 탑신이 약간 높은 편이며, 2․3층은 크게 감축되었다. 옥신석에는 우주를 조각하였고 옥개석은 비교적 엷어서 지부의 경사도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 내려 네 귀에서 살짝 올라갔다. 처마는 얇고 수평을 이루었으며 밑에 네 단의 받침을 새겼다. 상륜 부는 전부 없어졌으나 3층 옥개석의 윗면에 찰 주공이 패어 있다.
이 탑은 상층기단과 1층 탑신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으나 전체의 균형을 잃지 않았으며, 각 부재의 결구도 간결하다. 이 탑은 탑신부가 도괴 되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한 것이다.
석등을 받들고 즐거워하는 두 마리 사자
금당 축대 위의 한 가운데에는 천 년 동안 석등을 받들고도 무거워하거나 불평은커녕 오히려 즐거워하는 표정의 두 마리 사자가 길손을 반긴다. 팔각의 전형적인 신라석등 양식으로 간 주석을 두 마리 사자로 대치한 형식이다. 높은 8각 하대 석의 각 측면에도 사자로 보이는 웅크린 짐승이 한 마리씩 돋을 새김 되었다. 하대 석에는 여덟 개의 연꽃이 엎드려 있고 꽃잎 속에는 화형이 장식되었다. 상면에는 각지거나 둥근 모습의 굄만이 있고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대고 마주서서 뒷발은 복련석 위에 세우고 앞발은 들어서 화사석을 받들었으며 머리는 위를 향하였는데 갈기와 꼬리 그리고 몸의 근육 등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으나 하지 메 손상이 많다. 상대 석은 하대 석에서와 같이 꽃잎 속에 화형이 장식되고 위로 벌어진 8엽의 연꽃을 새겼다. 화사석은 팔각이며 한 돌이고 사면에 장방형 화창을 내었는데, 주변에 구멍이 있어 창호를 달았던 듯하며 남은 4면에는 사천왕상을 선 모습으로 조각하였다. 옥개석은 낮으며 처마 밑은 수평이고 추녀 위에는 귀꽃들이 붙어 있다. 상륜 부는 전부 없어졌다. 이 석등은 1933년경 일본인들이 반출하려던 것을 마을 사람들의 가지로 막아 가회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본디 자리에 복원한 것이다. 이 때문인지 사자의 하지와 사천왕상이 손상을 입었다.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9세기 중반 또는 하반 경에 제작된 것이며 이보다 앞선 초반기의 국보 제 5호인 법주사 쌍사자석등과 같은 시기이거나 조금 뒤인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과 같은 모습의 석등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이 세 개의 예만 알려졌을 뿐 흔히 볼 수 없는 석등 형식이다.
영암사를 뒤로 하니 적연국사가 나인 듯하고
산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영수사의 의미와 절이 황폐하게 된 경위를 밝히지 못한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아직까지도 우리들의 발길을 기다리는 참선 도량이 전국적으로 무수히 많다는 사실이다. 일일이 다 찾아다녀 볼 수도 없는 일이고 마음의 짐 하나 덜려고 찾아온 발길에 오히려 떼 짐을 얻게 된 꼴이 되고 말았다. 적연국사의 비명을 탁본한 옛 자료를 찾아 낸 점과 적연국사의 비를 받친 거북이와 스님의 무덤인 묘탑을 찾아 낸 것들이 그나마 다행이다. 더구나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탑비의 거북이(1023)와 부도(1014)의 발견은 한국 불교 미술사 연구에 보탬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태호.황호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