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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 법용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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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5년 12월 166호
가는 가을을 재촉하는 한때의 바람인가 하였다. 경남 울주군 가지산 기슭에 자리잡은 석남사 입구에서 차를 내리자마자 절 안 깊숙이로 내달리는 숲길로 한길을 줄 틈도 없이 맵짜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우리를 안내한 원찬스님이 발그레한 두 볼을 더욱 곱게 물들이며 홍소를 터뜨렸다.
“여기가 바람꼴이거든요. 일년 내내 바람이 불어요. 방송국에서 음향효과를 위한 바람소리를 녹음해 가기도 하지요. 그만하면 짐작이 가지요?”
그러나 보이지도 않는 절로 이르는 숲길은 가을의 정취를 속 깊이 느끼게 해주는 기막힌 길이었다. 생명의 때가 시작됨을 열려는 봄이 가는 모습은 참담하지만, 조락이 사작됨을 알리는 가을은 잎을 모두 떨굴 때 그 의미가 완성된다. 단풍 산도 아름답지만 그 잎 다 훌흘 벗고 빈 가지만 남아 부얘진 가을 산은 포근하다. 본당 입구에서 잠시 멈추어 합장하고는 일별도 없이 총총 절 밖으로 나서는 바랑 차림의 스님 한 분말고는 사람 기척이 없었는데, 뒤꼍의 공양간에는 행자 복색을 한 여러 스님들의 움직임이 부산하였다.
“오늘 사십구재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배송까지 제가 첨예해야 하고요.”
“청화당” 이란 당호가 걸린 요사채에서 예를 갖춘 뒤에 마주한 법용스님이 그 사정을 밝힌다. 감사 기간이라 종회의원으로서 서울의 총무원에 들렸다 어제 내려온 고단한 형편임에도 오후에는 바로 해인사로 떠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다음날이 음력 구월 스무날, 해인사 성철스님 2주기 추모법회가 있는 날이었다. 주말인 만큼 오후에 서둘러 떠나야 가는 길이 조금 수월할 것이라고 했다. 성철스님은 자주 만나 뵌 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화두를 타는 등 법 공부를 한 분이니 만큼 그의 부음을 접하고는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불칼 같은 분이셨지요. 공부를 많이 해서 자신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흔들림이 없이 당당하셨던 거지요.”
어릴 때부터 혼인 따위의 일은 아예 자신의 삶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면서, 부지런히 힘써 닦으면 석 달 만에 견성할 것도 같던 초발심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여의하다면 어디 그것이 공부겠는가. 혐겹고 어려울 때면 법용스님은 다른 수좌들과 함께 파계사 성전암에서 십 년 안거중인 성철스님을 찾아가곤 했다. 새벽밥 지어 먹고 불도 없이 깜깜한 길을 더듬어 언양까지 세 시간쯤 걸려 걸어가서는 또 다시 완행 버스를 기다렸다 타고 대구까지 가서 다시 성전암까지 걸어가면 하루해가 꼬박 걸렸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그 무렵 암자 주위로 철조망을 둘러놓고도 모자라 시봉을 시켜 망을 보게 해 놓고는 두문불출이었다. 나뭇가지를 주워다 볼을 지펴 언 손 녹여 가며 밖에서 기다렸다. 한번은 숨어 들어가 공양주 방 다락에 올라가서 밤을 새우는데, 그들을 측은히 여긴 서자가 올려 보내 준 더운 죽 한 양푼에 감읍한 적도 있었다. 아침에 해우소 가시는 성철스님 옆 얼굴 홈쳐보면서 슬슬 옆걸음을 쳤다.
“저 도둑놈들 봐라. 밤중에 남의 집 들어왔다가 가네!”
“아이고 스님 , 우리가 공부가 안 되어서 한 말씀만 듣고 가려고요.”
“느그가 공부는 하고 그런 소리 하나? 빨리 가서 부지런히 해라!”
걸식해 가며 번 길 찾아가서 문전박대까지 당하면서도, 옳은 법문 한 마디는 커녕 뒷간 찾으시는 큰스님 얼굴 한번 뵈옵고 돌아올 길을 되풀이했던 마음을 어찌 허황되다 하겠는가 어쩌면 능률과 효용만을 앞세우기 십상인 요즘에는 그저 귀하게만 보이는 그 시대 그 나이의 순정한 마음이라 할 것이다.

나이 쉰 살 무렵에 “돌아가며”맡은 석남사 주지 노릇을 네 해 동안 했고, 한해에 두번씩 삼 주 동안에 걸쳐 열리는 행자 교육 때에만 맡는 사감 노릇을 다섯 해째 해 오고 있으며 , 지금 중앙종회의원인 법용스님은 세월의 변화를 지주 느끼곤 한다. 먼저 요즘 비구니들의 출가 연령이 이십대 중반 이후내지는 삼십대 초까지여서 법용스님이 출가할 당시에 비해 십 년 가까이 늦어졌다. 법용스님이 스무 살 무렵에 출가했던 때라면 “늦깎이”로 치부될 나이로 된 것이다. 물론 피교육 수준도 크게 높아져서 , 지금은 대졸이 절반까지는 못 되어도 사십 퍼센트쯤에 이른다. 이런 형편은 비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좋게 보자면 매사에 제 주장도 확실하고 분명하다. 그런 만큼 제약된 생활에서 부자유임을 느끼는 강도도 상대적으로 높다는 뜻이겠다. 나이만큼 겪은 사회 경험 탓도 있으리라.
석남사의 경우에 입산을 해 오면 첫 여섯 달 동안은 속명을 그대로 불러 일정 기간 입산을 유보시킨다. 그 동안에 자신의 결정을 다시금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자 기간을 두 해 동안 거치게 한다. 여섯 달 내지는 한 해쯤 행자 기간을 거치는 어느 절에 비하면 두배 가까운 “견습 기간”을 보내야 하는 셈이다. 해제 때의 대중의 수효도 육철십 명이나 되고, 결제 때는 백명이 넘는 규모의 살림 바탕이 엿보이는 면이다. 승랍이 십 년이 넘는 비구니들에게만 입방자격이 주어지는 삼년 결사에 참여하고 있는 대중도 열다섯 명이나 된다. 이 곳 석남사가 인근의 운문사와 함께 한국 제일의 비구니 도량으로 자리나게 된 것은 501년대 중반의 “정화”이후 1957년에 주지로 임명된, 법용스님의 은사 스님인 인홍스님의 법력에 의해서였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한암스님을 은사로 수계한 인홍스님은 육이오전쟁 때에 거의 폐사되다시피한 석남사를 오늘의 도량으로 일구어 놓은, 한국의 비구니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72년까지 주지 일을 맡았다가그 뒤로 수상좌인 법회스님을 비롯하여, 법용스님 ,그리고 지금은 법용스님의 사제인 도문스님이 연임하여 팔 년째 주지직을 맡아 권솔을 외호하고 있다. 올해 여든여덟인 이 “별당노스님”은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지난해까지도 대중의 발우 공양과 아침 저녁 예불에 꼭 참여하는 등 꼿꼿한 수행 상을 보이셨다. 지금도 당신 방에 부처님을 모셔 놓고 새벽 세시면 시자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가사 장삼까지 수하고 예불을 올란다고 한다. 그런 스님이 아직 이렇게 건재하시고, 그 아래로도 많은 어른들이 절을 지키고 썼으나 말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층층 시하라서 수행하기 머트러운 곳”이라는 말도 일쑤 듣는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조건 때문에 유독 이 석남사를 고집하는 사람도 많으니 , 삼년 결사 대중 가운데, 세 번이나 거퍼 수행하는 스님도 있다.

따지고 들고 자기 주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처지의 경우, 곧 전염성이 있는 질병이 있는 사람이나 총무원에 가서 행자 교육 참가 명단까지 확인하고 찾아오는 속가 식구들을 피해 잠시 본사로 몸을 피하는 경우 등말고는 삼주 간의 행자 교육을 받다 말고 탈락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행자 기간이 끝나면 강원 이수는 거의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재 석남사에서 선방의 입승 소임을 맡고 있는 법용스님으로서는 그것이 교양과정의 의미일 뿐이지 , 본분사는 참선임을 거듭 강조했다.
“제가 수십 년 선방 지키고 있어도 견성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수행없이 어떻게 견성 , 성불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어디 한 생 닦아서 부처님 되셨겠습니까. 금생에 못 이루면 다음생, 아니면 세세생생토록 그저 닦고 또 닦아 나갈 따름입니다.”
그리고 법용스님은 그 수행의 방법으로 강원을 졸업한 뒤에 혼자 토굴 생활을 하려는 최근의 경향을 크게 우려하였다.
“나도 처음 출가한 새중 때에는 어디 가셔 삼 년만 문걸어 잠가놓고 주야로 정진하면 견성할 자신이 있었어요. 어린 마음이었지요마는. 그런데 누가 새중을 공부만 하라고 앉혀 놓습니까.
이런 일 저런 소임 맡기니까 꾸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어요.”
스님도 그랬던 만큼 그런 생각이 들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선방에서 몇 철 살지 않은 채로, 조그만 토굴에서 혼자 또는 마음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열심히 해 보려고 너도나도 떠나는 일이 늘어나고 있고, 또 공부를 하다 말고 절의 주지로 나서는 바람에 큰절의 대중의 수효가 예만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니 법용스님은 대중속에서만 제 허물을 옳게 찾을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행동거지가 옳으면 옳은 대로 그를 보고 따르게 되니 그러하고, 그르면 그른 대로 자신은 그와는 달라야 함을 되새기게 되니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혼자 살게 되면 제 맘 내키는 대로 살게 되니 그른 성품이 고쳐질 수가 없다.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견제해 나가는 과정이니 토굴행은 대중 속에서 수십 년을 산 뒤라야 비로소 자격이 있는 일이라고 법용스님은 생각한다.
주지가 맘에 맞지 않다고, 또는 은밀히 따로 노후 대책 삼아 독살림 차리려는 처사들을 영 못마땅해 한다. 누가 뭐라든지 세속을 떠날 때의 초발심 마음을 그대로 지키어 , 어떤 고통이라도 받아 들인다는 각오로 선방을 지키고 앉아서 , 십 년이고 이십년 이고 대중 속에서 몸을 썩힌다는 마음을 내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그런 마음에야 바깥 나들이도 가능한 것이다.
“입산하여 중이라고 불리기에도 부족한 법랍의 사람들이 수행보다는 포교에 큰 관점을 두는 것도 문젭니다. 다른 종교와의 어줍잖은 비교로 성급한 마음을 내는 일에는 깊은 생각이 뒤따라야 할 줄 압니다. 양로원이나 탁아소 지어서 사람끌어 모으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지요. 그런 일은 종교가 기능하는 일 가운데 부분일 뿐이지 전체가 되거나 본분사가 되지는 못합니다. 바탕을 닦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노후 문제만 해도 그래요. 일생을 대중속에서 잘 살다보면 걱정할 게 없습니다. 제 생활만 철저히 하다보면 시봉도 생기기 마련이고요. 잘 살아온 사람을 노인이 되었다고 홀대할 대중이 어디 있겠습니까.”

속향이 성주 함창인 법용 스님은 나이 스무 살 무렵에 근처의 문경 김룡사로 출가했다. 육이오 전쟁이 끝난 뒤였으니 너나 없이 어려울 때였지만 절집은 더욱 팍팍하였고 행자 노릇은 참담하였다. 사구(자배기)에다 살갗이 벗어지도록 보리쌀을 치댄 다음 어른 키만한 높이의 부뚜막 위를 오르내리며 밥을 안치고 펐다. 터져서 피가 흐르는 손으로 청솔개비를 꺾으며 불을 때곤 했는데, 그러자니 온몸이 그을음이 내려앉아 두 눈만 반짝거리는 쥐새끼 꼴이 되어도 비누를 아끼느라고 빨래도 자주 못해 입었다. 그러나 꽁보리밥도 먹을 만했고, 군둥내 나는 김치 우거지로 만든 찌개도 입에 달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하루, 어떤 스님이 입다 버린 다 떨어진 누비옷을 거두어 깨끗이 빨아 기웠다. 방풍 삼아 그 옷을 입고 나선 그를 노보살 한 사람이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옷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 알고나 입느냐고 물었다. 누가 입다 버린 하찮은 것이라고 대답했더니 그 보살은 한 사람의 수행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니 귀하고 비싼 것이라고 깨우쳐 주었다. 지금껏 간직하고 있는 귀한 말씀이었다.
인흥 은사 스님은 그가 강당을 졸업한 뒤에도 공부를 계속해서 강사가 되어 주었으면 했으나, 그 길이 탐탁찮아 동학사로 가서 사미과의 치문만 배우고 돌아와 버렸다. 그러고는 선방반 지켰다. 내원사, 범어사 해인사 대승사의 윤필암 같은 곳도 잠깐식 들렀지만 나이 쉰 살이 될 무렵부터는 행각을 그만두고 이 곳 석남사에서만 머물렀다. 그의 후학 제접 병식은 꼬장꼬장해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러나 그 일아 인심을 잃는 일이 되더라도, 자신이 가르침을 베풀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이상 올바르게 인도해야 함은 어김없는 그의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깊은 속마음은 따스하다. 본사에서 소임을 보지 않고 제방 선원을 다니느라고, 또는 포교 일을 하느라고 바쁜 상좌들이 그를 찾아오든지 말든지 , 법용스님은 늘 열여섯 벌의 옷을 준비해 둔다.
눈썰미가 좋고 손끝이 야물어 눈이 좋을 때는 시장에 나가 옷감을 끊어 와 손수 짓기도 했다.
오지도 않는 제자들 옷가지까지 챙겨 둘 건 뭐냐고 옆에서 짓궂게 놀려도, 그건 그 아이 사정이고 자신은 할 일을 할 뿐이라고 잘라 말해 준다. 그리고 아침마다 산내 상좌 모두 불러 모아 차를 함께 마신다. 그 속에는 갓 출가한 ”쌔중”도 있다. 스님은 특히 그 새중의 곱은 손을 눈여겨보며 한 말씀 들려 준다.

티끌 세상 벗어남은 보통 일이 아니니 고뻐 끝을 붙잡고 한바탕 일을 치르라
매서운 추위가 뼛속 깊이 사무치지 않으면 어떻게 매화 향기 코를 찌르랴.
황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