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 전철역에서 내려 방향을 몰라 잠시 머뭇거리며 구룡사를 물었다. 한 노보살님이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휘청한 허리를 힘겹게 곧아 세우며 따라오라고 손짓하길래 따라서 역 밖으로 나섰다. 숨찬 겨울 바람에 내 몰리듯 잰걸음으로 바쁘게 지나치는 행인들 틈에서 어느새 노보살님은 구룡사 불자님들과 만나 합장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여기저기 온통 구룡사로 향하는 이들이었다. 구룡사 셔틀버스가 온다고 하지만 추위가 만만치 않아 불자님들끼리 짝을 지어 택시에 몸을 싣고 있었다. 거리는 가까운 편이었다. 무슨 특별한 날인가 싶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티벳의 “링린포체” 초청 법회가 있고 때마침 동짓날이었다. 서울이라도 팥죽인심은 역시 절은 절이로구나 싶게 넉넉했다. 10시부터 법회를 시작한다니 정우스님이 시간 여유가 없을 듯 싶어 서둘러 만났다. 정우스님의 모습은 괄괄한 성품을 지닌 장군의 상을 느끼게 한다. 흔히 말하는 기골이 장대하다는 표현이 적격이지 싶을 만큼 골격과 이목구비가 부리부리하다. 스님은 이른바 월장출가(?)의 경우는 아니었단다. 불교 집안이라서 큰 갈등없이 동진출가를 했고 그 본사가 바로 통도사였다고 한다. 스님은 출가한 것이나 구룡사를 맡고 있는 소임이나 이 모든 것을 보면 아마도 전생에 복을 많이 지은 듯하다며 걸걸하게 웃는다.
인생의 네 가지 고통 가운데에 죽음이 있고 이는 생과 사를 달리할 때의 그 무엇보다도 절박한 심정적 체험을 수반하기도 한다. 이러한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은 분명 예견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 계기가 되지 싶다. “인도 여행중 부처님이 유미죽을 마셨던 수자타 마을을 지나다 갑자기 개에게 물렸습니다. 병원으로 가서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는데 주사 쇼크가 일었습니다. 이국만리에서 맞이한 죽음의 예감에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그 동안의 삶이 지나치게 ‘나’ 중심이었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다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금생에 지은 복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만일 살아난다면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살아 보리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스님의 삶은 그 궤도를 달리하게 되었다. 경전에서는 불타는 집(화택)으로 인생을 비유하고 있다. 자신의 참 자아를 망각한 채 부질없는 것에 집착하고 괴로워하는 중생의 삶은 결국 불길에 전소되고 말 죽음에 이름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이러한 화택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로 한 생각을 달리하는 것.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서는 것이라 한다. 정우스님이 마주했던 죽음은 어쩌면 평생 자각하지 못할 화택의 불길을 인식하게 하는 소중한 체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스님은 사진 찍고 작품화하는 일을 좋아한다. 이곳 구룡사 달력의 열두 달을 담은 사진도 정우스님의 작품이다. “인도에서 살아온 뒤, 먼저 통도사에서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포교를 하고 싶더군요. 성지순례 때 찍었던 사진으로 전시회를 갖는 것으로 그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뒤에 월하스님의 권유로 서울에서 포교 소임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본디 가회동에 구룡사 있었는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85년 말 양재동에 새로이 자리를 잡았다. 비록 이십여 평 남짓한 천막이었지.
동심과 불심은 하나다. 우리가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법을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하듯이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부족한 자신을 느끼게 할 때가 많다. 그리 부드럽고 사분한 다정함도 보이지 않는 정우스님의 어느 모습이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불법의 씨앗을 심어 놓은 것일까. “부처님의 경전 가운데에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 많아요. 아이들의 마음이 바로 우리 어른들 마음의 고향 아닙니까” 하며 짓는 표정이 어딘지 아이들에게 젖무덤을 내맡긴 채 마음씨 좋은 웃음을 웃는 포대화상을 닮은 듯도 하다. 통도사에는 부처님 금란가사가 안장되어 있다. 이의 보존 상태는 과학으로 입증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나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이 세상의 옷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였단다. 바로 이 금란가사를 첨삼백 년만에 통도사에서 처음으로 자리를 옮겨 백 일 동안 구룡사에 안치하여 친견법회를 열었다. “금란가사 친견법회를 통해 불자님들게 다시금 부처님을 향한 예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만불전을 짓는 불사에 신도 님들의 동참 기회를 만들고 싶었고요. 결과적으로 당시의 가건물을 헐고 새로이 절을 지어 오늘의 구룡사로 자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절을 증축한다는 것은 궁극으로 중생제도를 하는 것입니다. 중생으로 하여금 보살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여 진정한 자연인으로 돌아가게 하는 인간 방생 불사를 의미하는 것이죠.” 이러한 스님의 원력은 주변의 어려운 이웃에게 보탬을 줌으로써 구체화되었고 요즈음은 여러 사회단체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곳 구룡사에는 백 명의 고승을 모셔 법문을 청해 듣는 ‘백고좌법회’가 삼 년째 열리고 있다. 백고좌는 신라시대에 처음 시작되었다가 고려 말 이후 거의 처음으로 구룡사에서 다시 그 의미를 찾게 된 셈이다. “대형법회에 대해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렇지만 상황이나 여건이 이러한 대형 사찰과 대형 법회가 불가피할 뿐이죠. 처음에는 일주일 법회, 고승법회 등을 했는데 많은 불자 님들이 동참해 주었어요. 그래서 이만큼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이제는 회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과 덕의 열매는 좋은 씨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백고좌를 개최한 것입니다. 불자 님들이 가정 생활하면서 법회에 번 번히 참여하기 어렵잖아요. 그러니 어쩌다 시간을 내어 백일 가운데에 한 날 소승의 법문을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평소에 찾아가 뵙고 법문 듣기 어려운 스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다는 고마움만으로도 보살 님들의 가슴은 벅찰 듯한데 법문까지 들을 수 있다니 그 인연이 얼마나 소중할 것인가.
정우스님은 하루에 한번만 공양을 한단다. 법회 때마다 하루 세 번 보살 님들과 함께 108대참 회를 한다는 데 어떻게 체력이 유지될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더구나 스님의 장대한 기골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제 때에 공양을 하면 사람들이 덜 번거롭고 잠자야 할 때 잠을 자면 요긴하지요. 하지만 도심 속에서 사는 저는 졸릴 때 잠을 자고 배고플 때만 먹으려고 합니다. 옛날에 해인 강원을 다닐 때, 밥 많이 먹는 것은 차지하고 새참으로 라면 다섯 개를 먹었어요. 노스님이 ‘네가 통도사로 가면 해인사에 다섯 명의 스님을 더 받을 수 있다.’는 농담을 하시곤 했지요. 그런데 이제는 최선을 다해 맡은 소임에 충실하고 몸의 욕구에 최소한만 부응하려 합니다. 모든 것이 습 이건든요.” 스님의 이러한 노력과 굳은 의지는 바로 모든 불자 님들과 늘 함께 하고자 하는 절대적 신념에 다름 아니리라. 스님의 뒤쪽 벽면에는 어린 링린포체의 사진이 걸려 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푸르고 맑은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진이다. 환생이라는 신비의 색채로 휘감겨 보는 이로 하여금 가없는 상상을 일으키게 한다. 링린포체는 현세의 생불이라고 한다. 또한 그가 입적할 때는 반드시 어디에 태어난다는 유언을 하여 다시 생불로 환생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전지전능을 믿는 이들에겐 이것은 지복이 아닐까. 스님은 어쩌면 전생에 티벳인이 아니었을까 한다면서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을 이어 간다. “티벳불교를 밀교라는 말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지요 하지만 티벳만큼 온전히 불교화 된 나라가 있을까요? 그들은 늘 염불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언제나 잠들기 전에 이불 위에서 기도를 하지요. 이는 보통 신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초발심시변성정각’ 이 그들의 전언입니다. 일심으로 기도 정진하는 것이지요. 이를 신비주의 따위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세계에 불교를 알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티벳불교가 했다는 점입니다.” 스님은 비록 그들 나라가 망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티벳불교 정신과 문화는 살아 있음을 힘 주어 강조한다. “원력심으로 내세를 선택하는 그들의 내세관을 수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업’에 치중한 내세관을 갖기 때문에 자신의 안에 내재해 있는 의지와 원력을 사장시키게 된 셈입니다. 크고 장한 원력의 불씨를 키워 나가듯 닦아 튼실히 해야 합니다.“
세인들은 새해를 맞이할 때 타인의 소망과 자신의 소망이 더불어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참으로 긍정적으로 소박한 생활 자세가 아닐까 싶다. 자신의 이기보다는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원력으로 생활하는 삶이라면 분명 원하는 바의 결실을 맺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의 원력이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언제나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세에도 나를 필요로 하고 나 자신이 필요한 곳에서 환생하기를 바랍니다.” 스님의 이러한 원력은 늘 기도하고 염불하는 가운데 한뼘씩 한뼘씩 자라나 더 이상 업력에 끄달리지 않을 만큼 깊고 원대해졌으리라. 기도 염불을 바로 선수행의 한 방법으로 행한다 하니 말이다.
스님은 기도하는 마음 그것은 곧 선이라 이야기한다. 조금함보다는 넉넉함을 미움보다는 무심을 욕망보다는 포용하고 베푸는 마음을 기도로서 형성한다는 사실에서 선수행의 멋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 스님의 하루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바쁘다. 신도시에 여섯 개의 포교원과 다섯 개 유치원을 얼마 전에 개원하였단다. 아파트만 뚝딱뚝딱 올려진 메마른 대지 위에 스님은 벌써 작은 불법 종자를 곱게 싹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막 세상을 언어와 문자로 바라볼 어린이들에게 진정한 불법을 가슴에 담아 주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가. 이를 생각하면 실로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한 해에 한 번 인도 여행을 갑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성지순례를 신도님들과 함께 합니다. 그게 유일한 휴식입니다.”
그러나 스님은 휴식이 그리 필요하지 않다고 얘기한다. “모든 것이 일이라 생각하면 고통입니다. 생활로 받아들여 생활화해야 즐겁고 보람되지 않겠어요.” 스님을 더 이상 붙들고 있는 것 자체가 차츰 죄송스러워진다. 스님을 필요로 하는 불자 님들의 방문을 스님은 걸죽하고 단박한 말투로 뒤로 미루어 놓는다. 서운치도 않고 미안치도 않은 하나의 관계인 듯 개의치 않는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것이리라. 법회 시간이 다가와 스님께 인사드리고 나오는데 이미 스님은 걸걸하게 웃음 섞은 목소리로 격의 없이 잠깐의 담소를 나눈다.
“일체중생무비통(一切衆生無非通)”
일체 중생은 모두 통한다는 이 글귀를 가장 좋아한다는 스님의 얘기가 떠오르는 모습이다. 밖으로 나서자 건물 안은 불자 님들로 벌써 정신없이 북적인다. 유리창에 달려들어 차가운 굉음을 내는 겨울의 숨소리에 몸이 서늘해진다. 이 추위에도 문은 회전문처럼 열림과 닫힘을 교차한다. “신심은 순수를, 원력은 정직, 정직은 진지함, 회향은 성취.” 이것이 구룡사의 사훈이다. 오롯한 신심으로 싸늘함이 손끝을 저려와도 미동하지 않는 우리 불자 님들의 모습이 불법에 귀의한 우리 모두의 아름다운 모습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