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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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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장원 1994년 01월 143호
작은 것이 아름다울까. 지구는 원천적으로 큰 것을 담아 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억겁 무한대의 우주 속에 지구는 한낱 작은 점이요,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은하계의 다른 뭇 별들처럼 지구가 거대한 시공을 갖고 있다면, 지구에는 큰 것이 어울리고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지구는 너무나 작고 약한, 그래서 넘치기 쉽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도 같다.
그래서 지구에는 작고 가볍고 부드러운 것이 어울린다. 작고 가벼움 그리고 부드러움은 생명과 기쁨의 상징이요, 크고 무거움 그리고 딱딱함은 죽음과 절망의 표식이다. 크고 무겁고 딱딱한 것은 종래에는 다 사멸되고야 만다. 작은 지구의 ‘작은’ 생존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세상 만물과 만사는 모두 이 법칙에 해당된다. 이 하늘 아래 땅 위 횡행하는 모든 진리와 도道도 따지고 보면 이 ‘작은’법칙, 그리고 생산, 소비, 분해의 생태학적 ‘순환’법칙의 또 다른 표현에 다름없다.

작고 큼을 판단하는 잣대는 무엇일까? 우리가 일상에 무심히 적용하는 작고 큼의 인식체계는 한쪽 방향으로 치우친 것이다. 세상 만물과 만사를 재는 잣대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땅으로부터 즉 바닥에서 자를 대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하늘로부터 즉 천장에서 자를 내리는 것이다. 키가 크다는 것, 빌딩이 높다는 것, 돈이 많다는 것, 따지고 보면 다 바닥의 잣대에 의한 것이지 천장에서 잰 것이 아니다. 땅과 바닥의 가치 또는 세속의 가치로 우리가 크고 많다고 하는 것들은 하늘의 가치로 재면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진정 크고 높고 귀한 것은 지상에서 한없이 작고 낮고 보잘것없는 것이다.
이 ‘작은’법칙은 세상 모든 성현군자들의 말씀과 그 맥이 닿아 있다. 중국 철학에서의 ‘지족知足’ ‘과유불급過猶不及’ \'중용中庸\' ‘무위자연無爲自然’ ‘청빈낙도淸貧樂道’ 가 모두 이 법칙을 벗어나지 않으며, 부처님의 말씀인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무無’의 화두話頭 역시 작지만 큰 법칙으로 접근할 수 있다. 예수님 역시 ‘가진 것을 다 팔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며 지상에서 한없이 낮아지고 가없이 겸허할 것을 요구한다. 간디는 ‘소유는 죄악이다’고 하였다. 우리 조상 님들이 물건을 함부로 쓰고 버리는 것을 ‘살물죄殺物罪’라 일컫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부활과 윤회는 ‘순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 ‘작은’ 법칙과 ‘순환’ 법칙을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음을 비우고 물질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돌고 돌아야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세상의 원리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한없이 작아져서 끝내는 없어져야 순환하고, 순환되면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니 종래는 같은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돌고 도니, 본디 큼과 소유와 집착이란 다 허망할 것일진대, 우리는 이런 ‘무소유의 철학’을 우리 삶에서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작고 깨지기 쉬운 지구의 자구적自求的 생존체계요 질서인 이 ‘작은 법칙을 우리 삶에서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가. 종교를 갖지 않은 세속인 들의 삶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고 이른바 신앙인 들의 삶도 이 질서를 거의 외면하고 있다. 심지어는 누구보다도 수도자적인 삶을 살아야 할 성직자들도 세속인 들의 이러한 삶의 법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오늘날의 한국 종교는, 그것이 불교의 사찰이든 기독교의 교회든지 대부분 ‘큰 것’ 신드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사찰과 교회는 거대하게 그리고 호화롭게 마치 화장한 공룡처럼 기묘하게 변해 가고 있다. 교회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높다고 그 곳에 성령과 은총이 늘 충만하며, 사찰의 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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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기둥과 계단을 고급 대리석으로 치장한다고 그 곳에 부처가 오래 머물러 있겠는가.
왜 오늘날 한국 종교는 빛과 소금의 역할은커녕 되려 어둠을 조장하고 있는가. 천막교회일수록 더욱 성령이 충만하고, 가난하고 소박한 절일수록 더욱 불법이 보석처럼 빛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불당과 교회당을 호화롭게 치장할 그 돈으로 왜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이웃과 만물의 고난에 동참하지 못하며, 줄기차게 양적 확대를 지향하는 그 힘으로 왜 왜곡되고 오염된 사회를 바로 잡지 못하는가. 지금 우리나라의 총체적 위기와 난국은 많은 부분 종교가 제 역할을 못해 왔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 가운데에서도 가장 심각한 , 최근 들어 우리의 삶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환경오염과 그로 말미암은 공해 문제는 도대체 왜 생기는가. 한마디로 우리 인간이 이러한 지구의 자구적 생존체계 또는 우주 생명의 질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마음대로 행동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지구의 모든 생물은 지구라는 작은 생태계 내에서 나름대로의 역할과 지위를 갖고 있다. 생태계의 기본 생존법칙은 모든 생물이 스스로의 생태학적 지위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함께 잘 살려면 모든 개체군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만 사용하는 것이다. 곧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법칙을 철저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지구는 작고 그래서 지구가 갖고 있는 에너지의 총량과 자정 능력은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일단 사용하고 버린 에너지는 다시 돌려 쓸 수 없고 전량을 공해물질로 바꾸기 때문이다.
생존에 필요한 양보다 많은 에너지를 절대 쓰지 않는 지구상의 수백만 종 생물 가운데 한 종일 따름인 인간만이 유독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을 낭비하면서 생태계로부터 일탈(逸脫)된 삶을 살고 있다. 우리 현대인들은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의 무려 백 배에서 이백 배까지 쓰고 있다고 한다. 무작정 증식만을 고집하는 암세포처럼 인간은 오직 개발과 번영을 추구하며 지구 생태계를 무자비하게 유린하고 있다. ‘큰 것’ 신드롬에 깊이 빠져 환경을 해치고 있다.
그러나 지구 생태계의 모든 생물이나 인간은 꼭 같이 그 자체로서 영적 자율성을 가진 존재이며, 스스로 자기의 존재 질서를 지켜 나가는 또 하나의 우주 아니던가. 그 존재 질서의 근본에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려는 숭엄한 의지를 가득 담고 있는 서로 응하고 공명하는 전일적(全一的), 유기체적 생명 공동체, 그 절묘한 개체군의 네트워킹(Networking), 이것이 바로 지구 생태계의 참모습이다. 누가 이 아름답고 경건한 그리고 생명력 있는 지구를 함부로 훼손한단 말인가.

오늘날의 종교는 지구 생태계의 회복, 곧 지구 생존 질서의 원상복구라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 종교의 궁극적인 의미 가운데에 하나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교감과 생명에 대한 상호 경외 그리고 일체감을 서로 느끼게 하는 조화와 공동 존재의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아직 대부분의 종교가 인간과 자연이 또는 만물이 함께 만들어지고, 함께 득도(得道)하고, 함께 지상극락의 성취에 참여하는 한 몸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만물의 구원 없는 인간만의 구원은 있을 수 없음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온갖 왜곡된 이념이나 사상 그리고 독선, 아집, 부패한 생활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지구 사랑의 양심 선언을 해야 한다. 지구 환경 사랑은 개개인에게 곧 생활이어야 하며 신앙 그 자체여야 한다. 이를 위해 종교 또한 수도사적 생명공동체로 거듭나야 하며, 다양한 의견과 새 사상을 받아들이고 환경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와 동반자적 관계가 유지되는 그리고 최소한의 에너지로도 남고 모자람 없이 제 기능을 제 때 발휘할 수 있는 생태적 조직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종교의 소명은 바로 인간과 만물이 함께 하는 새 생명 공동체의 건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세속적인 이 세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 만물 사랑을 바탕으로 오염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반역이 만들어 내 환경 훼손 문제를 실질적으로 치유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지구 생태계가 큰 것이 최고라는 인간들의 생각으로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뜯어 고쳐 나가야 한다. 생각은 전지구적으로 하되 생동은 바로 자신의 생활 주변에서부터 ‘작게’ 시작해야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새해에는 작은 것이 아름다움인 줄 알아 부디 작고 청빈한 삶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