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 동학농민전쟁의 종교적인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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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유종교 산책 - 황선명
1995년 11월 165호
1884년 4월 전라도 고부 땅 황토현에 모여든 구름 떼같은 동학 농민군은 이 나라의 오천 역사를 획기하는 장거를 내딛게 된다.
오늘날에 와서도 갑오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갈래의 분분한 논란이 있지만 그것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는 부인할 도리가 없다. 갑오 동학농민전쟁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제기된 민초들에 의한 광범위하고도 조
직적인 개혁의 요구이자 썩어빠진 양반관세도정치 집권층과 이 나라를 삼키려고 호시탐탐하는 외세 열강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민중항쟁의 위대한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나말여초羅末麗初 이래 숱한 민중항쟁의 기록을 볼 수 있다. 또 조선 후기에 와서는 이른바 평한平漢(평안도 놈들이라는 멸칭)’ 이라 했다 해서 봉기한 홍경래의 난을 비롯해서 삼남 각처에서 민중의 항쟁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하지만 규모나 조직과 목표에서 볼 때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부르짖은 갑오 동학농민전쟁에 비길 바는 못 된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대해 녹두 장군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의 봉기로 시작된 갑오 동학혁명의 경과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졌으므로 새삼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론이 분분한 최제우, 최시형의 동학과 갑오
동학농민전쟁과의 상관관계의 문제를 한번 짚으면 색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나 싶다.
대체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진보적인 성향의 중견 학자들은 갑오 동학의농민전쟁이 그저 동학이라고 하는 주술종교(所福 신앙이라는 뜻)의 외투를 입은 것일 뿐, 그것의 참 모습은 19세기말 한국 사회가 처한 사회적 모순과 제국주의의 외국의 압력에 항거하는 민중의 혁명적 봉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구 사회에서 시민 계급의 성장과 함께 경험할 수가 있었던 부르주아 혁명의 한 형태라고 보고 있다. 실제로 북한의 역사 학자들은 동학 농민전쟁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 단계인 부르주아 혁명으로 자리매김해서 ‘필요이상’으로 크게 선전하는 모양이다.
진보적인 성향의 역사 학자들의 논거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바로 경상도의 동쪽끝에서 태어난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이 어떻게 산하와 문물이 다른 서쪽 끝 전라도에 와서 민중의 대결집으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갑오 동학농민전쟁은 여러모로 보아 사회적인 모순이 극대화한 나머지 불거져 나온 민중혁명이며, 미신적 형태의 종교 집회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특히 역사학자들은 「동경대전」에 나오는 `나의 도는 하고자 하는 것이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다(吾道無而以化) 고 하는 구절을 가지고 문제 삼는다. 모시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課事在人. 成事在天)이라는 말대로 만사가 하늘의 뜻에 따라서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운명론적인 발상을 가지고는 사회 변혁을 이룩해 낼 수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역사 학자들은 먼저 오늘날에 와서 흔히 지역감정이라고 해서 매도당하는 영호남 사이의 차이를 든다(조선시대를 통해서 줄곧 그러했다는 듯). 실례로 조선시대 서원書院의 수를 갖고 영호남의 차이를 말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조선 말기까지 호남 지역의 서원의 수는 영남에 비길 바가 못 된다. 또 호남지역에 있어서의 서원의 영향력은
감히 영남에 비길 바가 못 된다. 예를 들어 이퇴계를 배향拜享하는 안동의 도산서원을 놓고 생각해 보자. 도산서원은 지금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관광 명소에 불과하지만 과거에는 그곳의 유림들이 권세를 상징하는 권부나 다름이 없었다. 서원은 굉장한 토지를 보유하며 지방의 유림이나 실력자들을 뭉치게 해서 중앙정부에서도 호락호락 넘볼 수 없는 곳이었다. 실제로 최제우의 동혁이 경주에서 시작해서 영남 일원으로 번지자 영남의 유생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조정에 이른바 ‘만인소萬人訴’를 올려서 결국 수원 참수형을 당하게 민들었다. 당시 영남 지역에는 힘을 가진 서원들이 많았다. 오늘날 또 다른 관광 명소의 하나로 알려진 안동 하회의 병산서원도 그 가운데의 하나였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 때 활약한 서애 유성룡을 모시는 병산서원 같은 경우 요즈음식으로 말하자면 국세나 지방세 같은 것은 한 푼도 내지 않고 거기에 서애의 후손이나 문연과 그들에게 딸린 노비들까지도 행세하는 판이었다. 이것을 가리켜서 역사학자들은 영남에서는 토착지주 세력의 권력 기반이 확고한 반면에 호남 지역에서는 그렇지 못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조선 말기 우리니라에는 서방에서 들여온 증기선을 서해안 연안에 먼저 배치했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전라도 지역에서 쉽사리 쌀을 수탈해 오기 위함이었다. 일본 학자 가지무라 히데기는 지역에서는 부재 지주-현지에 살지 않고 서울이나 그 밖의 지역에 산다는 뜻-들이 쌀대신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상품 직물을 재배하게 해서 현지 농민들의 궁핍화 현상이 한층 더 심각했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서울에서 돈을 주고 벼슬을 산 고을의 수령 방백들이 매직賣職하느라고 들인 본전의 몇 곱절을 우려 내려고 마구잡이로 박박긁어 갔으니 백성들이 어찌 견디어 내겠는가?
이와 같이 수탈이 더욱 심해지는 가운데 농민층의 분해 현상은 가속화하는 데 반비례해서 농민의 의식은 차츰 선진화해 갔으며, 따라서 그것이 동학 농민전쟁으로 연결되었다고 하는 합리적인 설명을 부연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학도인 필자로서는 동학 민중운동에서 종교성을 탈피시킨 채 지나치게 사회 경제적인 원인만 강조하는 데에는 불만이 많다. 일설에는 동학의 1세 교조 최제우가 전라도 명에 잠행했었다고도 한다.
작고한 역사학자 김상기 선생의 주장기도하다. 그렇다면 굳이 사회적인 모순론에 따라서 동학 농민전쟁을 우회적으로 해석하지 않고도 동학과 갑오 농민전쟁과의 관계를 쉽사리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수운의 전라도 잠행설에는 이렇다 할 확증이 없다. 그저 ‘전설적’인 것이라고 믿고 싶다.
거두절미해서 갑오 농민전쟁의 지도자인 녹두장군 전봉준이나 또 다른 간부인 김개남은 동학의 접주이다. 이들이 고부에서 봉기를 일으키기 앞 해인 계해년(1893)의 보은 장내 집회 때 최시형을 설득해서 삼례집회를 연 결과 농민전쟁으로 이끌어 간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오지영이 동학사에서 밝혔듯이 이들이 이른바 해월 최시형의 후계자경쟁으로 각축했던 측근인 손병희 등 삼암三魔과 맞서 남접으로 또 하나의 계보를 형성한 것은 앞서 (10월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동학 농민전쟁은 여러모로 보나 동학 종교운동의 일환인 것이다. 한편 갑오 동학농민전쟁의 보편성을 따진다고 하면 세계 역사상 모든지역에서 일어났던 천년왕국의 종교운동의 하나라는 점이다. 국내의 어느 중견 정치 학자는 서양 중세말의 천년왕국운동인 독일의 토마스 뭔쩌의 농민전쟁과 결부지어 설명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신의 계시에 의해서 종말론적인 지상천국을 이룩하겠다는 민중 종교운동이라는 뜻이다.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이 서세동점의 양상이 그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19세기 중반부터는 이 천년왕국의 운동에 동양사회에도 널리 번져 왔다. 이를테면 중국에서의 아편전쟁 직후 광동성의 객가출신의 홍수전이 일으킨 태명천국의 반란도 일종의 천년왕국운동이다. 태평천국의 반란을 진압한 영국의 고든 장군은 공교롭게도 아프리카의 수단 하르툼에서 또 다른 하나의 회교도 천년왕국운동이자 반란군인 마흐디 교도의 창에 찔려 죽었다.
갑오년에 동학군 두령들이 제시한 증청성도(성스러운도를 밝혀 떨쳐 나가겠다는 뜻)라고 한 백산맹약대로 종교운동을 표방한 대로 동학농민전쟁이 종교운동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태평천국이나 마흐디 패거리 들처럼 황당한 미신과 문란한 성도덕, 게다가 맹목적인 살인을 일삼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민중이 나아갈
진정한 후천개벽의 이상세계를 지향한점에서 동학 종교운동은 종교신앙과는 상관없이 우리 민족에게 구원의 선경을 아로새겨 주었다고 본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