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 • 황호균
‘한국 선禪의 원류’ 주제의 학술발표회를 다녀와서
원고 마감일이 앞당겨졌다는 편집장 진각스님의 전화를 받고서, 마음이 바빠졌다. 거기에다가 송광사의 보조사상연구원에서 ‘한국선의 원류-나말여초의 구산선문- 이라는 주제의 학술발표회를 한다는 소식에 약속한 원고 마감일이 지났는데도 함께 참석하기로 그만 약속하고 말았다.
조계산 온 천지에 단풍어 번지는 이 가을, 승보사찰 조계총림 송광사 사자루에서 승속僧俗이 모여 앉아 한국 불교의 뿌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선종의 전래와 구산선문의 성립과정 그리고 그 사상적 배경에 대해 깊이 참구해 보는 그런 시간을 가졌다.
학술발표회는 낭혜무염의 무설토론(현각)과 신라 선의 사상적 특성(성본)을 시장분야로 묶어 토요일 저녁을 장식 하였다. 다음날 오전에는 구산선문의 성립과 그 성격에 관하여(김영태)와 조계종의 기원과 전개(허흥식)라는 역사 분야를 다루고 그 뒤 종합 토론을 끝으로 학술행사는 막을 내렸다.
현각스님의 발표에 대한 논평자로 나온 강건기 교수는 오늘날 한국 선이 외골수로 치닫게 되어 버린 것은 바로 무설토無舌土에서 비롯되었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하였다. 더구나 성본스님의 주제 발표에 대한 논평자로 선정된 심재룡 교수는 통일신라의 입당승入唐僧들이 출가한 뒤 한결같이 화엄의 교학敎學을 배운 점이나 귀국한 뒤에 선문輝門을 개창하면서 화엄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장을 주조하여 본존불로 봉안한 점이 불전佛嚴을 만들지 않고 법당法堂만 세운 당대의 조사선祖師禪의 선종과는 달리 통일신라, 고려 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방 호족들의 도
움을 받아 경제적인 토대를 마련해 사회적인 기반 구축에 힘쓴 점이 통일신라, 고려 선종의 독특한 면이지 않겠는가? 반문한다. 더욱이 도의道義의 무위無寫 임운任運도 불교가 언도적인 개념으로 중국에 들어와서 도교적인 전환을 맞은 것이지 도의스님만의 독창성으로 보는 데는 의문이 남는다는 정말 마려운 데를 집어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허홍식 교수는 조계종기원과 종조宗祖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폈다. 이는 그 동안에 발표한 몇 편의 논문에 지속적으로 제기한 내용이다. 그런데 그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자 오늘 학술대회를 무척 기대하는 눈치였다.
종정이던 성철스님까지도 태고법통설을 주장하지만 임난뒤인 1610년대 이전에는 오히려 나옹법통설이 우세했으며 이러한 태고법통설은 청허 휴정의 소장 문도들에 의해 부각된 결과라고 한다. 논평자로 나선 법산스님은 다소 뜻밖의 얘기를 하였다 한국의 절집에 스님이 없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법통이 끊긴 적은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순간, 70년대 그 황량하던 시절 무설토로 이어지던 한국불교의 법맥이 끊어졌는지 아니면 산 중 그 누구에게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는지 확신을 갖지 못하던 운수납자들의 근심을 우리는 기억한다. 절에 스님이 계신다고 법맥이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졌을 거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며 상좌는 끊기지 않았을지 몰라도 법맥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우리는 입당 유학승들이 산문을 연 뒤에 당의 조사선과는 달리 탄탄한 경제적인 기반과 아울러 사회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고, 이러한 통일신라, 고려선종의 독특한 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지방호족들을 유학승들이 이용한 것인지 호족들이 이들의 명성을 정치에 이용한 것인지 아니면 이 둘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것인지 공부가 짧아 자신이 서지 않는다.
빈대 절 방화 폐사 설화는 시도 때도 없이 절에 와서 행패 부리는 유생들의 작폐를 빗댄 가슴 아픈 이야기
다사 원점으로 돌아가자. 통일신라 선을 공부하면 할수록 일제 강점시대나 미군정시대에 미국으로 유학 갔다 온 우리의 선생님 세대들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는지 ... 그들이 귀국한 뒤에 우리들에게 보여준 행태들은 그 곳의 정신을 전달하려는 의지는 보여주지 않은 채 방법만 그것도 편의대로 취사 선택한 방편 법문에 지나지 않은 것들이었음 우리는 잘 안다. 중국 당나라의 조사선에서는 백장스님의 선원청규 이후에 법당-조사가 부처님의 법을 설하는 불상 없는 집-만 짓
고 하루 일 안하면 한끼도 먹지 않는다는 근검한 생활을 한 반면, 통일신라 선종 스님들은 불전-불상을 모신 집 –을 짓고 그것도 장육장文六像이라는 거대한 철불鐵佛들을 호족들의 지원까지 받아 거창하게 외형 불리기 불사를 즐겨하는 그들의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화엄종에 몸 담았던 통일신라의 입당 유학승들은 중국 남종선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당의 조사선은 지나치게 사변 思辨으로 치닫는 교학을 경계하려고 나온 당시의 극약 처방인 셈인데 이를 장기복용 하다니… 조사선의 본래 취지는 그만 어디로 가고 말았고 독한 약을 계속 쓴 탓에 고려 불교는 정도전의 ‘불씨잡변`으로 된 서리를 맞게 된다.그 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고달프고 맵고 서러운 시집살이가 계속 되었다.
좌우 보살을 협시로 삼고 그 중앙에 본존불이 자리한 삼존불의 전형을 보여주는 서산 마애 삼존불
심지어는 유생들이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중수할 때 일 없이 노는 중들을 동원하지는 결의를 하기에 이른다. 유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절간에 들어와 밥 해내라 하는것 까지는 좋다. 종이나 위패목을 만들어 내라하지 않나 심지어는 심치원의 진적인 탑비 탁본을 해내라는 통에 그 무렵 승려들은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불전까지 말을 타고 들어오지를 않나 기생들까지 끼고와서 술상 봐 와라 조롱하는 유생들의 등살에 계곡을 절 앞쪽으로 돌려 좁은 홍교를 거쳐서 절로 들어오게 출입구 조정도 해 보고 불교를 믿는 내당을 찔러 어찌어찌해서 하마비도세워 보고 패불이나 범종 불사를 하면서 왕실의 안녕을 비는 축원 문구도 적어 보는 지혜를 부려도보지만 이도 저도 아닌 절은 속수무책이다. 그래서인지 전국에는 빈대가 많아 절을 태우고 스님들이 절을 떠난 빈 절이 수두룩 한지경에 이르게 된다. 빈대 붙은 놈들이 하도 많아서 그놈의 빈대 때문에 절간을 불 지르고 스님들이 절을 떠났다는 빈대 방화 폐사 설화는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징한 빈대를 유생에 빗댄 것임을 우리는 잘안다.
서산 마애불의 미소는 이심전심으로 불법을 깨닫게 하는 염화시중의 미소를 표현한 증거
통일신라 선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하지만 불교 전래 초기에는 불법의 정신을 전해주려고 무척이나 노력했었다는 생각에 서산 마애불의 미소가 불현듯 떠오른다. 이른바 백제의 미소’ 로 알려진 서산 마애불은 방편이라는 형식만 중국에서 받아들인 통일신라 선불교에 견주어 석가모니 당시 모습의 불교를 전하려고 애쓰던 그런 모습으로 정리하고 싶다. 이러한 백제의 미소는 이심전심으로 불법이 전해지는(깨달아자는) 염화시중의 미소를 표현(백제화)한 분명한 증거인 셈이다. 불법은 누가 전해주는것이 아니라 이심전심으로 깨달아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알리려는 저 백제의 미소. 천삼백 년 이상을 밝혀 온 그 오묘한 미소를 우리는 단순히 웃음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 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웃음의 종류는 실로 많다. 수줍은 새악씨의 볼에 번지는 부끄러운 웃음을 비롯해서 오장육부가 배배 꼬인 쓴 조소, 얼음장처럼 차가운냉소, 웃을듯말 듯한 잔잔한미소, 눈꼬리 끝이 말아올라 가면서 흘리는 사네놈 여렷 죽일 교태 섞인 교소. 시장바닥이 떠들썩하도록 웃는 요란한 난소, 온 동네가 떠나갈듯이 희희낙낙하는 희소, 입꼬리가 귀까지 붙은 채로 손바닥까지 치는 박장대소, 그리고 파안破題 미소澈笑라는 저 염화시중의 미소...
서산, 태안, 당진은 백제가 중국 남조 양나라와 무역하던 전초기지
서산 마애불이라 불리는 이 돌부처님을 뵙노라면 그냥 돌 밖으로 뛰어 나오실 것 같은 생생함이 느껴진다. 옆에서 비춰 주는 조명등의 빛에 따라 번지는 미소, 아! 우리는 왜 이런 백제의 미소를 잊어버렸단 밀인가? 우리는 신라의 감은사탑과 백제의 왕궁탑 비교하기를 즐겨한다. 저 신라 경주땅 감은시탑의 하늘을 찌를 듯한 강건한 기상이 삼국을 통일한 원동력이라 말하지만,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로도 보는 익산의 왕궁탑의 지붕돌에서 느껴지는 오지랍 넓은 백제 여인의 옷자락과도 같은 그 명안함을 우리는 좋아한다. 비록 전쟁에는 졌지만 말이다. 그 오지랍 넓은 옷자락에서 승무혐舞 출 때 살짝 치마 밖으로 빠져나온 버선코나 어깨 춤사위 때 젖혀지는 손끝의 경쾌한 들림이 읽어진다고 설명할 때 왜 그리들 환호하고 찬탄해 마지 않던가?
자연 암벽을 다듬어 부처를 새겼다는 의미로 마애불이라 부르는 이 돌부처는 옷주름이나 일부 신체 표현을 제외한 대부분의 형태를 돋을새김한 부조가 높은 그런 분이다. 이 곳은 서산군 운산면 일대로 인근 태안 마애불이나 예산 불당곡 사면불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백제의 서울인 부여로 가던 길목에 자리하여 백제가 중국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 들이기에 좋은 항구로서의 입지 조건도 잘 갖춘 지역이다. 이러한 서산, 태안은 백제가 중국과 무역하는 전초기지로 당나라 나루라는 이름의 당진이 바로 지척이다.
백제는 한강이나 육로를 통해 중국과 교역을 해왔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밀리고 신라에게 마저 한강 유역을 빼앗겨 버렸다. 그래서 육로나 한강은 적군에게 막혀 갈수 없고 오직 부여에서 중국 가는 길은 바닷길뿐이며 그 곳이 바로 태안반도의 당진인 것이다. 6세기 후반기의 백제는 위덕왕(554~598)의 치세이다. 관관성의 패전으로 아버지인 성왕이 전사하자 그 아버지를 위하여 출가하여 불도를 닦고자 했을 만큼 불심이 깊은 그런 왕이었다고 알려졌다. 백제는 577년에 진과 북주에 사신을 보내는 둥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이 때 중국은 북주 무제가 유교지상주의를 국시로 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려고 당시 절대적인 부를 소유하던 불교를 대상으로 폐불(574)이라는 법난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비록 오년 동안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북위 무제의 폐불(446)로 초토화된 중국 불교의 탄압과 이 시기 중국과 백제가 빈번히 교역하던 그 태안반도 부근에 예산 불당곡 사면불, 태안 마애불, 서산 마애불 같은 백제 불상들이 다투어 조성됨은 무슨 의미인가? 단순히 교역로 주변 길목에 바닷길의 안녕을 비는 의미로 조성한것만은 아닐진대…
신도 놀랄 백제 석공의 조각 솜씨
서산 마애불을 만든 조각가는 부처님의 이상적인 얼굴 모습을 조각하면서 교리의 내용을 충분히 소화한 듯하다.
예를 들면 석굴암 본존불처럼 근엄하여 주눅들게 하는 그런 귀족적인 불상을 바위에 새긴 것이 아니라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의 부처를 바위에 새긴 것이다. 이는 누구나 불교를 한눈에 알기 쉽도록 친근감 나는 우리의 모습을 새긴 것이다. 이 조각은 당시 백제의 성인 남자의 모습을 모델로 하였을 것이며 자세히 들어다 보면 세살백이 꼬마의 천진무구한 모습도 담아내는 치밀함도 갖추었다.
이것은 당시 백제 사회가 불교를 받아 들이는 기본적인 자세와 불교문화를 이해한 수준의 정도가 매우 높았음을 웅변해 주는 자료인 셈이다. 얼굴의 이런 특징은 모든 부분에 적용되었다. 가령 중후한 체구이지만 온몸의 굴곡을 부드럽게 하였다든지 돌이라는 재료의 질감 탓에 무거울 듯한 옷 주름을 유려하게 강조각하는 모습에서 당시 석공의 탁월한 조각 솜씨도 엿보인다. 이러한 조각 기량은 좌우 두 협시 보살들에서 좀더 잘 나타나는데, 환조에 가까운 둥글고 입체감 나는 수법, 미륵보살상이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몸을 약간 옆으로 비튼 대담한 반가자세의 표현력, 오른쪽 협시 보살상의 우아하고 세련된 형태미, 자신감에 넘치는 대담한 구도에서 거침없는 달인의 경지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말하자면 이 조각기는 돌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충분히 파악하여 마치 먹(흙) 주무르듯이 능숙하게 돌을 조각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더구나 태안 마애불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구도, 곧 중앙에 본존불이 좌우에 협시 보살이 지리하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삼존불의 전형-광배 하단에 궁색하게 자리한 금동불은 빼고-이 여기에서 완성된 것이 않을까? 이처럼 중후한 체구, 무던한 얼굴에 번지는 오묘한 웃음, 협시 보살들에게서도 보인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된 조형 솜씨 등에서 백제 불상의 기본 틀은 완성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삼존 형태의 불상을 법화경에서 유래한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 곧 석가불, 미륵보살, 데화갈라보살로서 법화경 사상이 백제 사회에 유행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지금은 목조 건축물의 기와집에 갇혀서 답답하기 그지 없지만 동쪽을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보원사 절터에 대한 회상
서산 마애불 주변에는 이 돌부처와 관련된 절터가 그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다. 이처럼 위대한 예술품이 조각된 마애불 주변에 사원이 경영되지 않았을리 만무하다. 물론 주변 지형의 옹색함 탓이려니 생각하면 그만이겠으나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보원사지普願좋址가 지금까지는 가장 타당할 것 같다.
마애불은 빠르면 6세기말이고 늦어도 7세기초에는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고 아직까지 여기에 부합된 보원사지의 유구와 유물은 발견되지 않아 보원사가 서산 마애불의 부속 사찰로 단정하기에는 이직 이르다. 물론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 6세기 중엽경의 북위 양식이 금동불입상을 들 수도 있겠으나, 손바닥만한 작은 금동불은 이동이 자유로운 소지불이므로 출토 층위에 의한 정확한 규명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자료로 활용하기 어려운 유물이니 제껴 놓고 말이다. 보원사지에는 백제 시대의 부동산 문화재는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발굴하기 이전에 단언하기 어려운 일이나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백제 시대 에는 마애불 바로 옆에 소규모의 사원 정도로 경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지금의 탑이 자리한 보원사지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적은 듯하다. 물론 백제 때의 절 이름도 우리는 모르는 형편이다.
백제 금동불 말고 통일신라 때 조성된 8세기 중엽의 금동불과 항마촉지인의 철불좌상이 절터에서 출토되었다.이들 두 유물이 보원사지에서 가장 빠른 시기의 유물이다. 최치원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따르면 보원사는 통일신라 화엄 십찰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이로서 8세기 중엽경의 보원사는 화엄종 사찰로서 기반이 다졌음을 알수 있겠다. 그 뒤 고려 초기인 10세기 중후반기에 들어와서는 탄문스님의 활약으로 화엄종 사찰로서 그 위치가 확고해졌을 것이다. 이 무렵에 조성된 철불좌상(949), 법인국사보승탑(975),법인국사보승탑버(978), 오층석탑(10세기 후반), 당간지주(10세기 후반), 석조(10세기 후반)가 현재 절터에 댕그라니 남아 전해진다. 이밖에도 사찰 진입부를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에 쌓은 석축, 석교를 걸쳤던 자리 및 석등 부재, 계단, 소맷돌, 주춧돌 등이 여기저기에 발견된다.
또 이 터에서 출토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고려 항마촉지인 철불좌상과 박물관 진열품 도감에 실린 통일신라 항마촉지인 철불좌상 그리고 6세기 중반의 백제 금동불이 사적 제316호로 지정되었으나 건물터들 주변에 민가가 들어섰고 보리밭으로 경작되기도 하는 등 폐허나 다름이 없다. 탑 주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는 염소들이 그나마 반가울 따름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