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영남 불교의 성지 팔공산(1)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천찰만담 - 박용길 1989년 10월 92호
팔공산 소묘
명산이란, 잘 알다시피,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명해지게 된 내력이야 물론 제각각일테지만, 그 중에는 특히 옛부터 불교와 관계된 성산(聖山)으로 숭앙받아 오고 있는 것도 꽤 많다. 경주 남산, 통도사 영축산, 해인사 가야산, 칠불암 지리산 -그리고 은해사 및 동화사가 자리하고 있는 팔공산도 불교의 성산으로 꼽혀온 지 이미 오래이다. 태백 준령의 마침표를 찍는 보현산(1,124미터), 그리고 그 서남쪽의 화산(828미터)을 지나 계속 내리닫이로 치닫다가 우뚝 용트림으로 치솟은 팔공산. 최고봉인 비로봉(毘盧峰)은 해발 1,192미터의 웅자를 자랑하며 좌우에 염불봉(念佛峰)과 삼성봉(三聖峰)을 거느리고 다시 그 아래로 동봉(1,155미터)과 서봉(1,04I미터)을 깃들여, 마치 본존불이 좌우 협시불을 거느리고 시립한 듯한 삼존불(三尊佛)의 형상을 자아대고 있다.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남쪽으로는 염불봉 ․동봉 ․수봉 ․인봉 ․노적봉 ․노족봉 ․관봉 ․환성산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삼성봉 ․서봉 ․톱날바위 ․파계봉이 줄달음으로 솟아 있는 태산준령은 문자 그대로 팔공산의 주령(主嶺)으로써 그 길이만도 무려 이십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장관을 이룬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주봉 양편의 동봉과 서봉을 잇는 지역은 전형적인 장년기의 산형 그대로 험준한 능선을 형성하여, 천길 단애의 낭떠러지와 기암 괴석의 암봉이 어우러진 장엄무비의 절경을 과시하고 있다.
골이 깊은 만큼 팔공산에는 물도 많다. 첩첩한 봉우리 봉우리에서 발원하는 맑디맑은 물은 우선 깊고 수려한 계곡으로 실뱀처럼 숨어든다.
천수만암(千樹萬岩)의 발치를 감아돌며 자꾸만 자꾸만 아래로 내리다가 물은 더러 짙푸른 소(沼)와 비단 같은 폭포를 드리우기도 하는데, 그 중에서도 선주암 폭포 ․공산 폭포 ․장군 폭포, 그리고 병풍 폭포 등이 특히 유명하다. 다시 이들 팔공산 물은 위천의 원류인 남천과 금호강의 한줄기인 신령천 그리고 용암천과 하양천을 이루면서, 이윽고 낙동강 본류까지의 먼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팔공산의 옛이름은 부악(父岳)혹은 공산(公山)이었다. 아울러 오악(五岳) 중의 중악(中岳)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부악의 부(父)자는 공(公)자의 오자이고 따라서 부악이란 공악을 잘못 읽은 데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이는 「삼국유사」를 비롯한 몇 가지 옛 문헌 가운데에 잘 드러나 있다.
공산이란 명칭은 신라와 고려 양대에 이르도록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 초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공산은 혹
팔공산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씌어 있는 것이 팔공산이라는 산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전해온다.

팔공산이라 이름한 까닭
그렇다면 이전의 공산이란 명칭을 팔공산이라 고쳐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에 앞서 신라 이래, 이 산을 공산이라고 불러왔던 까닭은 또 무엇일까?
동화사 사적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제단을 설치하고부터 나라에서 이곳을 중요시하였으므로 (부악에서) 공산으로 이름을 고치노라.

하지만 신라의 제천단이 오직 공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라벌 및 오악에 모두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독 중악인 이 산에만 제단을 두었다 하여 ‘공경할 공(公)’자의 공산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안타까운 것은 이외에 따로 공산이란 산명의 유래를 밝혀 놓은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뒤에 다시 팔공산으로 고쳐 부르게 된 사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추측이 제기되어 왔다.

첫째, 여덟 고을에 걸쳐 있는 산이라서 팔공산이라고 했다는 설이다.
이는 「신령읍지」와 「영종대왕원당사적」의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다. 하지만 이 산줄기를 배산(背山)으로 했던 고을이 더러는 일곱도 되고 더러는 아홉도 됐던 때가 있어 별로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둘째, 고려 태조 왕건 휘하의 여덟 장군이 장렬하게 전사한 곳이라 하여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다.
이는 일제 때의 「달성군지」에 처음 나온다. 하지만 「고려사」를 비롯한 어느 사서, 어느 지리지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史實)은 찾아볼 수 없다.

셋째, 팔간자(八間子)를 봉안한 곳이라 하여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다.
처음 신라의 진표율사는 미륵보살 진신으로부터 받은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속리산의 영심에게 전하였으며 이를 다시 심지가 전수받아 공산 동화사에 봉안하였다.
하지만 당시 심지가 전해받은 간자는 제8, 제 9의 불골간자뿐만 아니라 다른 백여든아홉의 간자와 함께였다. 나아가 이들 간자 가운데에서 유독 서기를 발하는 제8간자를 친견한 고려의 예종이 친히 공산이라는 산명에 팔(八)자를 더하여 비로소 팔공산이라 했다는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공산은 어디까지나 공산 그대로였다.

이외에도 중국의 전진왕(前秦王)부견이 진나라 대군과의 일전 중에 화살을 맞고 패주 했던 것이 마침 공산대전(公山大戰)에서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대패했던 사실을 방불케 한다 하여, 일찌기 모화사상에 젖어있던 우리나라 학자들이 당시 부견이 참패했던 곳이 바로 팔공산(八公山)이있다는 점에 착안, 중국의 산명을 따라 그때부터 공산을 팔공산으로 고쳐 불렸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불교와
관계있는 산 이름의 경우에는, 예를 들어, 적멸보궁이 있는 오대산처럼 중 실재하는 산명을 그대로 따랐던 것은 물론, 멀리 인도 땅의 산 이름까지 그대로 옮겨 놓은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약사 신앙의 총본산
팔공산은 한국 불교 최대의 성지로 손꼽을 수 있는 곳 가운데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서 깊은 도량과 유적을 많이 가지고 있다.
성간자를 봉안하던 동화사, 토함산 석굴암보다 먼저 조성되었다고 하는 제2석굴암, 초조(初彫) 대장경판을 봉안했던 부인사 대장경 낙성대법회를 열었던 운해사, 화엄 십찰 가운데의 하나였던 미리사,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동화사, 원당, 원효가 머무르며 수행하던 곳이라고 하는 오도암과 불굴사 보조의 그 유명한 근수정혜결사문(動修定慧結社文)을 탄생시킨 거조암, 그리고 속칭 갓바위로 불리는 관봉,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비롯한 곳곳의 노천 석조불상 등, 실로 팔공산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가람과 탑과, 부도 및 불상으로 가득한 지상의 불국토이다.
아울러 팔공산은 한국 약사여래신앙의 총본산이기도 하다. 원래 우리나라의 약사 신앙은 통일 신라기에 들어서면서 분황사를 중심으로 크게 성행했다. 그러던 것이 통일 신라 이후 팔공산으로 그 무대를 옮기고부터 그야말로 팔공산은 한국 불교 약사 신앙의 제 1 성지로 일반의 관심을 모아왔다. 실제로 팔공산만큼 약사여래불이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있는 곳은 한국의 산악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약사여래는 달리 약사유리광여래, 또는 대의왕여래라고도 칭한다.
「약사여래본원경」 등의 지난 정등의 약사 신앙에 관계된 경전에 의하면, 약사여래는 동방 십항아사 불토를 지난 정유리세계의 교주라고 하는데, 일찌기 이 부처는 보살행을 닦을 때, 고해 중의 중생을 염두에 두고 열두가지의 거룩한 원을 세워 결국 이를 모두 성취하고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약사 신앙의 골자는 소위 속명법 (續命法)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이는 중국의 송나라이래 일반 민중 가운데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즉 약사불을 숭앙함으로써 국가의 평안을 도모하고 아홉 가지 횡사를 면하며, 나아가 임종시에는 그 칭명공덕으로 문수․관음․대세지․무진의․보단화․약왕․약상․미륵 등의 여덟 보살에 의해 사자(死者)의 혼이 인도되어 청유리세계라는 파라다이스에 왕생하게 된다고 하는 것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약사 여래 십이대원 가운데 중요한 것을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몸이 유리와 같이 안팎으로 청정하고 해와 달보다 더 밝게 되어 어두움 가운데에서 헤매는 사람이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함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 절름발이, 문둥병, 지랄병, 미치광이 등 갖가지 질병으로 시달리는 자들이 나의 이름을 듣는 즉시 모든 병고가 깨끗이 나아지도록 함.
․국가 권력의 횡포에 의하여 갖은 고난을 당하는 이가 있으면 나의 복력으로 그로부터 놓여나도록 함.
. 굶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악업을 짓는 자가 있으면 맛있는 음식으로 그를 배부르게 함.
․가난하여 헐벗은 자가 있으면 옷과 장신구를 주어 그를 따스하게 감싸줌.

화랑의 수련 성지 팔공산
팔공산은 신라 화랑의 일급 수련지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팔공산 동록의 중암암(中巖庵) 석굴은 일찌기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 장군이 화랑의 신분으로 심신을 단련했던 장소로서 실로 신라 화랑유적 제1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중암암은 9세기경, 신라 헌덕왕의 아들 심지 (心地)에 의해 창건된 고찰로서 깍아지른 듯한 기암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는 조그마한 암자이다. 거대한 화강암괴로 이루어진 이 석굴은 바로 절 뒤에 위치해 있으며 그 입구에는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곳은 팔공산의 크고 작은 연봉으로 둘러싸인 한 산마루 위에 위치해 있어서 실로 심신을 수련하고 좌선을 닦는 데에 최적의 장소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절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몇 개인가의 석문을 지나야 하는데, 이로부터 이 절은 천태사라는 원래의 사명 (寺名)보다 ‘돌구멍절(中嚴魔)’ 이라는 다소 투박한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곳이 김유신의 수행처였다는 말은, 중암암은 물론 큰 절인 은해사를 비롯한 주위의 모든 암자에 똑같이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영천군 청도면 신령면 일대의 주민들 사이에서도 널리 희자되고 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 석굴은 장군굴로도 불리며 부근에는 또한 장군수라 일컫는 약수가 나는데, 이들이 바로 그 옛날 화랑 김유신이 몸소 거처하며 목을 축이던 그 석굴, 그 샘터라는 것이다.

명산에 드는 길
산이 크면 드는 길 또한 여러 갈래일 것은 뻔한 이치다. 더욱이 그 산이 명산임에랴… 옛날에는 여덟 고을에 걸쳤던 웅산(雄山 )이었으나 지금은 대구 직할시와 경북의 칠곡 ․군위 ․경산․선산 그리고 영 천의 여섯 고을에 접해있는 영남의 명산 팔공산은, 오늘날도 여전히 그 밑둥의 넓이만 무려 122.08평방 킬로미터에 이르는 위용으로 무겁게 엎드려 있다. 산은 그 깊은 골과 길게 벋은 능선으로 사람들에게 가까이 간다. 따라서 산에 드는 길은 우선 이들 골짜기와 얕으막한 능선을 만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발목을 간지르는 풀잎새 -산은 언제나 곰살스러운 몸짓으로 우리의 산행을 부추긴다.
어느 산이 되었든, 산에 드는 길은 간단히 말해서 그곳에 있는 사찰의 수만큼 많고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거의 모든 산의 등산로가 한결같이 절 부근에서 시작되거나 아니면 절을 경유하도록 개설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팔공산의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이다.
하지만 길에도 나름대로 품위와 정취가 있기 마련이다. 길이라고 다 선뜻 걸음이 내키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팔공산을 오르는 길, 가운데에서 가장 돈독한 정취와 품위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동화사길? 아니, 그곳은 너무 분잡스러워 그윽한 맛이 없다.
파계사길? 너무 가파르고 되바라졌다.
선본사길 ? 골이 얕아 지루한 느낌이 든다. 은해사길? 그래, 나는 은해사길이 제일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