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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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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을 위한 사색 - 현기 1989년 10월 92호
모든 사물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참 생명을 회복하자는
뜻이요, 나와 네가 하나되는 연기(緣起)의 숲으로 가자는
뜻일 것입니다. 숲으로 가는 길은 아직 멀고 험합니다.
납북의 분단이 있고 대립이 있고 독재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험난할지라도 그 길이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이라 믿습니다.
그곳이 사바의 고향인 까닭입니다.

숲으로 가는 길에는 어느새 가을 꽃들이 자리를 펴고 있습니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내 안식(眼識)의 그물에는 푸른 하늘이 퍼덕이고 있습니다. 그 푸른 하늘 불러 길옆의 코스모스 바라보면 코스모스앉은 자리가 가을이 머무는 자리가 됩니다.
스님!
가을과 푸른 하늘, 코스모스, 이 세 가지는 전혀 어울릴 것 없는 독자적 실체이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완벽하게 연관되어져 있는지요. 가을을 떠나 푸른 하늘이 있을 수 없고, 가을을 떠나 코스모스를 노래할 수 없습니다. 푸른 하늘이 있기에 가을은 가을답고, 코스모스도 제자리를 찾습니다. 더욱이 들판에 세워진 볏단 속으로 스며드는 저녁 노을은 이러한 서로의 관계의 깊이를 더욱 느끼게 합니다. 실로 자연만이 보여줄 수 있는 관계의 미(美)와 신비입니다.
들판에 서서 이러한 전경을 바라보노라면 어찌하여 인간은 저와 같은 아름다운 관계를 가질 수 없는가라는 서글픔이 일어섭니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 혹은 우주와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역할인가, 인간이 무엇이기에 저 자연의 조화를 깨뜨리고 주인이 되고자 하는가. 인간은 그들끼리조차도 서로 어울리지 못하면서 민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며 세계를 지배하려 하지 않는가 인간이 창출해낸 철학, 과학, 종교,그 무슨 이념들. 그것은 또 무엇을 위하여 나타났는가. 그것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나타내거나, 혹은 인간이 그 모든 것을 재배하기 위한 하나의 “꾀”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여야말로 뭇 생명들에 대해 독재자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은 자연의 생태를 보고 조화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조화라는 말 이전의 조화이며 관계의 미(美)입니다. 아니 조화라는 말이 필요치 않는 공(空)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야 할 숲이란 바로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상호 존재를 존재케 하는 연기적 숲의 삶이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스님! 자연은 존재하는 모습이 서로서로 특상(特相)을 나타내면서도 서로를 포용합니다. 서로에 대해서도 무애합니다. 존재하는 모습들이 서로 개방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개체이면서 세계를 함유합니다. (코스모스와 가을과 가을 하늘의 푸르름은 하나의 독립된 상태이지만 코스모스는 가을과 하늘을 여의지 않으면서 코스모스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코스모스 생명력은 가을과 가을 하늘에 의하여서 존재한다.) 이렇게 열려진 관계들이 우리가 가야 할 숲이라면 닫혀진 관계의 삶들을 열어 놓는 길이야말로 가장 선결되어야 할 일이라 생각됩니다.
닫혀진 관계를 일으킨 주역은 인간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종교와 철학 과학은 이러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로 인하여 자연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인간으로 인하여 세계의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됨으로 해서 자연의 문제, 세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문제는 어디서 발생하였는가. 여기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존재한다는 의식(意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존재를 “나”로 규정할 때, 나를 실체로 생각하여 나를 집착하고 고정화시켜서 나에 대한 편집된 사랑을 갖는 것, “나”를 인간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인간임을 집착하고 인간임을 자애하는 것) 그러므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인간이라는 상(相)을 벗어버릴 때 가능합니다. (핵의 문제, 환경의 문제)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라거나 인간만이 특별한 영적 존재라는 생각을 버릴 때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들과(존재하는 모든 것) 함께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불성(佛性)을 깨달으라, 견성(見性)하라는 이야기도 모든 생명들의 무아의 연기적 실상을 바로 보라는 뜻이며, 그것은 곧 모든 생명의 평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즈음 우리는 인간의 자주성을 말합니다. 곧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생명의 자유, 평등, 평화를 말하는 것이며, 인간이 스스로 주인임을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이라는 부분이 전제되는 자주성이라면 또다시 인간 중심의 사고에 떨어집니다. 우리가 인간의 자주성이라 말할 때(인간이 스스로 주인이라고 할 때에도) 그것은 인간만이 갖는 자주성이 아니라 뭇 인간들이 보완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자주를 말하는 것이며, 뭇 생명들, 산천초목까지도 공유(共有)로 관계된 자주성으로 파악되어져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에만 열린 세계(세계는 인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말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를 가장 으뜸되는 덕목으로 말합니다. 비록 기독교인이나 불교인이 아닐지라도 사랑과 자비는 인간들의 삶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나 자비심을 잘못 인식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음을 봅니다. 용수(龍樹)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의하면 “대자(太慧)라 함은 일체중생에게 덕을 주는 것이고 대비(大悲)는 고(苦)를 여의는 조건을 중생들에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 볼 때 자비는 단순히 감정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요, 동정심이나 연민심을 나타냄은 더욱 아닙니다. 자비는 중생들의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 주는 적극적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어떤 윤락여성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윤락여성이 스님께 괴로움을 하소연할 때,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 위로만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동정심일 뿐입니다. 자비의 마음은 그 여성의 괴로움의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밟혀 그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 주는 실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여성의 괴로움의 원인은 인간사회가 만들어 낸 괴로움일 것이고 그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윤락여성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데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타인의 괴로움을 나와 일체화시킴이 자비입니다.[同体大悲]. 타인의 괴로움과 나를 일체화시킨다는 것은 연기적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겠지요.
스님 ! 저는 앞서 “존재한다는 의식”이 인간의 문제를 일으켰고 인간의 문제가 세계의 연기적 질서를 흐트려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불교에서 자비를 제일 큰 덕목으로 삼음은 인간이 아에 대한 집착을 끊게 하여 연기적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수도 대비는 보살공덕의 근본이요 반야의 어머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연의 관계에는 사랑이나 자비가 필요 없습니다. 이미 열려진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자비와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 일어난 닫혀진 관계들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정신일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대립적 관계, 인간과 자연의 정복적 관계를 청산하고 모든 생명과 하나되는 길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요 세계에 대한 책임을 표현함입니다.
스님 !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운동들도 바로 인간이 흐트려 놓은 뭇 생명들의 관계를 연기의 숲으로 열고자 하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가진 자는 소유하였기 때문에 오는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못 가진 자는 못 가진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어 서로서로가 공유하는 세상을 가꾸어 보자는 것이 우리의 운동일 것입니다. 남북의 통일을 논함도 민주화를 부로짖음도 역시 마찬가지이겠지요. 이런 뜻에서 저는 민중을 단순히 정치,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으로 파악하고 싶지 않습니다. 민중은 함께 어울려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며 그 시대의 인간과 역사사회의 관계들을 바르게 유지시켜 주는 힘(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을 가진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이나 민중의 해방이 뜻하는 것은 민중이 지배한 다는 뜻이 아니라 민중적 삶이 올바른 가치이며 닫혀진 모든 존재들의 관계를 열어 준다는 뜻이 되겠지요.
스님! 우리는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은 모든 사물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참 생명을 회복하자는 뜻이요, 나와 네가 하나되는 연기(緣起)의 숲으로 가자는 뜻일 것입니다.
숲으로 가는 길은 아직 멀고 험합니다. 남북의 분단이 있고 대립이 있고 독재가 있습니다. 그러나 숲으로 가는 길이 아무리 험난할지라도 그 길이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이라 믿습니다. 그곳이 사바의 고향인 까닭입니다. 하여 발걸음을 늦추거나 멈추거나 할 수 없습니다. 가율이 보여 주는 것, 연기적 조화의 실상이 있기에 우리는 튼튼한 목소리로 나를 버틸 수 있습니다.
스님, 우리 모두 독재(獨在) 의식을 버리고 숲으로 가는 길에서 만납시다. 가을과 하늘과 코스모스와 인간의 삶이 하나가 되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