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각화사 서암 고우스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호계삼소 - 김영옥 1995년 11월 165호
산내 암자인 서암의 앞마당에서 건너다 보이는 왕두산은 조선춤을 추는 여자의 저고리에 감춰진 팔 선 같았다. 슬며시 내려오다 말고 팔목께에서 그 힘을 누그러뜨린 채 잠시 사위를 멈춘 정중동靜中動의 순강을 붙잡힌 그런 품새다.
가을속의 산사는 유난히 맑고 고요하다. 눈 푸른 납자 한 사람 품고 있어서 그 곳은 더욱 유표하다.
고우스님은 이 곳에서 다섯번째 가을을 맞고 있는 중이었다.
춘양면 석현리의 각화사를 왼쪽으로 싸안는 왕두산에서는 가을이 내리고 있었다. 사분의 일만큼인가 오분의 일만큼인가 녹색의 산을 타 내려오는 단풍선이 보였다. 산 아래에서 그것 치어다보는 맛도 괜찮고, 각화사 초입의 마을에 가지가 휘도록 달려있는, 조금씩 내려오는 단풍과 동무하려는 사과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맛도 괜찮다.
“한 오 년 이 곳에서 혼자 머물면서 책을 좀 읽었습니다. 벽암록, 선문염송, 화엄경도 보고, 대학, 중용, 논어도 다시 읽었어요. 특히 원시 불교에 관한 책을 많이 봤는데, 민족사에서 펴 낸 서른 몇 권짜리의 원시 불교에 관한 시리즈물은 몽땅 사다 놓고 읽고 있어요.”
한 채 집 가운데에 법당을 모셔 두고 있고, 입구 쪽에 있는 스님 방은 환하고 정갈 하였다. 벽장인가 했더니 열린 문속으로 꽉 들어찬 책이 보인다.
“최근 들어 원시 불교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대승 불교가 중국화 된 불교라는 논의가 잦은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변질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연기 사상이 대승 불교와 선종으로 내려오면서 조금도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계승되어 왔음을 확인했습니다.”
고우스님은 학자들의 그런 ‘오해’ 는 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한문으로 적혀 있어 내용이 ‘가득한` 원시 경전과는 달리 ,선에 대한 이해가 지식으로는 `불가득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형상이 있거나 없는 모든 존재가 연기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 것이요, 진리를 보면 바로 연기를 본 것’ 이라고 했어요.
용수보살의 대승불교에서는 ‘유정무정이 개유정불’ 이라했죠. 말은 다르나 표현은 똑같은 것이예요.
선종은 간단히 얘기하면 본래 성불을 크게 강조하는 종입니다.
‘백천간두 진일보’ 라고 한자리 말이지요. 백척의 장대 위에서는 유다무다, 맙다곱다가 존재할수가
없습니다. 초월된 자리요 일체가 평등한 자립니다. 말로나 글로 표현할수 없는 자립니다. 대對가 끊어진
자리니까요.”
열반 즈음에 부처님도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하셨다. “본래 성불자리”를 설명하는 말과 글은 모두다 거짓말이고 군더더기이다. 성철스님이 인터뷰를 청하면 거짓말 들으려 왔냐!” 하고 대갈하여 축객을 한 것도 그런 의미이다.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 하늘에 가득차 수미산보다 더하다/산 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가닥이니/한덩이 붉은 해 푸른 산에 걸려 있다”고 한 성철스님의 열반송은 그런 자리를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표현이 완전하지 않으니, ‘’한던이 붉은 해…”의 결구로 다시 긍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내용을 아물린 것이다.
“그를 두고 ‘한평생 중놀이 하면서 지은죄를 참회하는 말 이라니요! 그런 왜곡은 성철스님에 대한 모독일 뿐만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모독이요!”
대가 끊어진 지리는 어떤 자리인가.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자리인 때문일까. 말로 들으니 들어도 알아듣지 못히겠다.
고우스님은 다시 두 가지 비유를 든다.
봉암사의 희양산은 삼각산과 같은 돌산이다. 이화령 고개를 넘다가 보면 그 면목이 한눈에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또 한눈에 다 보안다 할 것인가 이화령에서 본 것 다르고, 희양산 꼭대기에서 본 것 다르고, 산 아래쪽에서 본 것 또한 다른 것이다. 희양산이 겨울에 풍치가 뛰어나다 하나 사계 따라 맛이 다르고, 아침 저녁 모습이 또한 다를 것이다. 한말로 정리할 수 없다. 대가 끊어진 자리, 본래 성불 그 지리는 그와도 같다.
<화엄경>의 “입법품계”에는 선재 동자가 덕운 비구를 찾아가는 대목이 있다. 덕운 비구 가사는
산 이름은 묘봉산이라 했는데, 이레를 헤매도 만날 수가 없다가 묘봉산이 아닌 다른 산에서야 그를 만난다. 그러나 덕운 비구는 한번도 하산한 적이 없다. 그 자리를 표현한 것이 묘봉산이다.
그 자리 설명하기가 난감하기는 부처님도 마찬가지였다. 도를 통한 뒤 삼칠 일 동안 사유를 하는데,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깨달은 것을 이해시킬 일이 지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석천왕의 근청을 받아 방법을 모색히니 , 그것이 사제법이고 십이연가이다.
부처님이 성도 이후 설법 대상으로 처음 떠올린 사람은 스승이었던 아라다와 우드라카라는 바라문 교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죽고 없어 다섯 수행자에게 초전법륜을 펼치게 된다.
사제법을 항목별로 자세히 이야기한 것이 팔정도인데 , 이는 불교의 기초 원려이자 실천의 기본 덕목이기 도하다.
“각화사 법당 앞에는 세 개의 점이 찍힌 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삼법인三法印입니다. 그걸 어떤 스님은 일심삼관-心三觀으로 보는가 하면, 계정혜械定慧, 불법승으로 보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이것이 다 같은 소리라. 변하지 않는 것도 없고 생겼다가 멸하기도 하니 실체가 없고, 그러나 현상에 상관없이 진리는 존재한다는 원리입니다. 그 원리에서 나온 게 팔정도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정견正見입니다. 부처님 말씀의 구십구 퍼센트가 다 그 말씀이라요. 보는 시각부터 바꿔 놓고 수행을 해라 허신 거거든. 있다 없다, 밉다 곱다. 좋다 나쁘다 하고 분리해 놓고 거기에 집착하는데 , 그게 잘못된 겁니다. 집착하니 대립이 되고 또 투쟁하고. 그래서 본래 성불 그 자리가
파괴가 되는 거죠. 하나로 보아야 해요.
그것이 정견입니다”
그것이 안 되면 바로 생각할 수도, 바른 말을 할 수도, 바른 행동과 생활도 할 수가 없다. 정견이 전제되어야 염불과 참선도 바로 선다. 부처님이 아라다와 우드라카를 맨 처음 떠올린 것은 그들이 정을 닦는 혁신적인 면모를 지녔음에도 정견이 부족한 수행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이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닦아야만 한다. 바보라고 도반들에게 놀림을 받던 추라판다카라는 제자에게 부처님은 “코 끝만 내려다보라”고 이른다.그 말씀을 받들며 정진하다 그는 마음속에 있던 분리된 마음. 증오 따위가 사라지고 본래 성불 그 자리로 들어갔다.
“그것은 ‘선정후혜’ 의 방법입니다. 제 이름자도 못 외는 제자를 가르친 편법이지요. 그러나 한국의 불교 전통인 간화선은 ‘선혜후정’ 의 방법입니다.”
고우스님도 시행착오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업력에 끄달린 면도 있었겠지만, 그의 잘못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새가 울면 그 소라를 듣게 되는 식이다.
그런데 듣는 성품을 돌이켜보면, 곧 회광반조해 보면, 거기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없음을 알고 있는 놈이 있으니 . 보조스님은 이를 각각 공척空寂과 영지靈知라 했다. 그 세계에서는 착오’ 가 있어도, 아무리 자신이 나쁜 짓을 해도 한 생각 딱 돌이켜 없는 세계 (空)에 가버리면 그게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 생각 돌이킨 자리를 도道로 봤던 것이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상주의 심원사에 있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새벽에 일어나 앉은자리에서 정진하고 있다가 ‘무시이래無始以來’ 란 글귀가 떠올랐는데, 그 비롯함이 없는 때가 아득한 옛날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이구나 싶어졌다. 시간을 초월하는 경계가 생긴 것이다. 공간도 그렇게 이해가 되었다. 그때부터 이해가 안되어 한두 장 넘기기가 힘들었던 <서장>이 화두 빼고는 모두가 `이해되었다’ . 무릎을 치면서 그는 외쳤다. “이제 견성은 시간 문제다!”
그러나 그는 그 경계를 <서장>으로만 확인했다.
1937년 생인 고우스님은 태어난 곳은 성주 이나 대구에서 오래 살았다. 결핵을 앓게 되었으나 자신의 의지로 병 고치려고 먹던 약을 끊고 절로 들어왔다. 청암사였다. 큰방 생활할 때는 딴 스님에게 병 옮길까봐 벽을 보고 누워 자곤 했다. 계를 받은 직지사 강원에서 관웅스님의 유식 불교에 접하면서 그는 크게 벌삼이 되었다.
그 뒤로 어느 결엔가 병은 저절로 그를 떠나고, 대신에 부처님이 그에게로 왔다. 봉암사, 각화사, 축서사, 금영사 용주사등 여러 절 가운데서도 승랍 삼십오 년인 그가 가장 오래 묵은 곳은 봉암사이다. 들락거리면서 열다섯 해가 넘게 그 곳에서 살았고, 그 곳 주지도 두어 해 했다. 몇 년 전만해도 봉암사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내달렸으나, 이제는 그도 ‘놓아버렸다’ .
그러나 각화사의 의미는 그에게 봉암사와는 또 다른 각별한 것이다. 그 `잘못된 견해’ 가 부서진 뜻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각화사위의 동암에 혼자 있을 때였다. 앉아서 정진하다가 잠시 몸을 누이고「육조단경」을 무심히 펼쳐 들었다. 자신은 이제 정定과 혜慧가 하나만 되게 하면 완전히 자유자재한 도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오로지 그 하나로 만드는 작업이 그때까지의 그의 정진이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정과 혜가 하나가 되어도 도가 아니라는 대목이 그의 눈에 잡힌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하나는 정체되어 비도非道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정이 혜가 되고 혜가 정이
되어 통류通流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그때까지 진리’ 로 본 것은 그저 일체 명상 끊어진 공空자일 따름이었다. 심원사에서 얻었다고 믿은 것이 열다섯 해쯤의 세월을 보내고서야 깨진 것이다. 그 뒤로 그는 다시 화두를 들고 간화선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쉰살쯤 된 때였다.
“듣고 보는 마음자리를 알았다고 견성 했다는 사람은 여럿 있어요. 그리고, 일체 명상 끊어지는 빈자리를 보고 견성했다는 사람도 있어요.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서장>에서도 그건 그저 경계일 따름이라고 못 박고 있어요. 그러나 성철스님이 주장하는 돈오돈수야팔로 백척간두 진일보된 바로 그 자리를 안 경지 입니다.”

딴 데 눈 돌리는 일 없이 그저 공부에만 관심을 두고 토굴에서 혼자 ‘즐겁게 산다지만, 애 쓴다고 쉽게 될 일이
아니다. 그 생각은 그가 중학교 다닐 때에 읽은 이태준의 <문장강화>의 한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순수 문학을
하는 사람은 직업적인 삶을 살면 안된다 는 것이었다- 직업적인 삶 이란 무엇인가 목적과 방법이 전도되는 것을
말함인가 아마도 그걸 것이다.그 뒤로 그 귀절은 무심하고도. 집요하게 그의 삶을 지배해 왔으니, 지금까지도 프로 기질을 발휘해서 열심히 해 본적이 없어 매사가 아마추어일 따름이라며 스님은 웃었다.
밭일이나 반찬 만드는 일. 도량 가꾸는 일도 서툴고, 상좌를 두는 일도 시들하고, 전에 이 곳에서 살던 스님이 두었던 신도도 모두 각화사로 보내 버렸다. 그러나 공부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지 싶어 조금 더’ 진력할 따름이다. 외따로 산다지만 혼자만 견성하려는 마음은 아니다. 그러는 가운데 열심히 선문도 보면서, 남캉 더붙어서 이야기를 노느코.
남도 내캉 같은 길을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교도이더라도 그는 오는 손님 물리치는 법 없이 살고 싶어한다.
부처님 말씀을 선시로 드러내 보이면 대중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금강경」 가운데 야부스님이 쓴
야부송 을 번역해 보고싶은 것도 그의 그러한 마음 자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법당 앞에는 고추가 마르면서 매운내를 독하게 풍겼다. 겨울뿐 아니라 한해 감장거리이다. 두해 전부터 체질법에 따른 식이요법을 시작했더니 , 몸이 크게 좋아졌다. 그 좋아하던 무도 요즘은 안 먹는다. 대신에 조그만 텃밭에는한 철 내 그외 손길을 받은 양배추, 아욱, 케일, 가지 ,배추등이 아직 남아 있다.
마당에서 법당으로 오르는 축대의 돌구멍 사이로 능구렁이 허물 한 겹이 걸려 가을 볕에 마르고 있었다.
허물을 벗으면 새 몸이 된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