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국교(國敎)제도의 부인과 정-교 분리 원칙의 본 뜻
근대 이전에, 시민계급이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으려 하였을 때에, 봉건적, 전제적 권력의 자의성(恣意性)과 차별성 및 무한계성을 어떻게 타파하여 정치권력의 법치성(法治性)과 공평성 및 한계성을 확보하는 것이 과제였다. 자의성의 타파로써 법치성을 확보한다고 하는 것은 권력의 발동이 반드시 국민의 의사의 표현인 법률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고, 차별성을 타파하고 공평성을 확보한다고 하는 것은 정치권력은 개인의 사사(私事)나 자유로운 생활영역에 함부로 개업할 수 없고 권력 자체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음을 확정하는 것이 있다. 종교에 있어서도, 봉건 전제통치에서 특정한 종교를 국교(國敎)로 정하여 특권을 부여하고 다른 종교를 차별 탄압하던 것을 폐지하고, 종교가 각자의 내심(양심)의 독자적인 자율영역일 뿐만 아니라 종교제도 자체가 국가가 규제할 사항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국교제도의 부인으로써 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마땅히 특정 종교집단이 권력과 야합하여 특혜 및 특권을 누리면서 다른 종보다 우위에서는 것을 금지하며, 한편으로는 종교단체 측으로서도 스스로가 특정 권력에 야합하여 어용화되고 하수인화 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종교 본래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포기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가 생겨나게 됨을 본다. 아무리 원리, 원칙이 분명한 듯하여도 실제로 문제로 나타나는 사회적 갈등과 분규를 해결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견이 백출하게 되어 대립이 있기 마련이다.
종교단체 곧 교단 및 종단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분규는 그것이 권리 및 의무에 관한 다툼으로서, 이른바 법률 문제가 될 때에는 나라의 재판에 따라야 한다. 예를 들면 종단의 임원이 공금을 횡령하였다거나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재산을 처분하였다면 당해 법률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종단 안의 분규가 권리와 의무의 다툼으로 소집절차를 무시한 흠이 있거나 회의가 적법하게 구성되지 못한 법적인 흠이 있다고 하면 그에 대한 법의 효력에 대한 다툼이 법원에서의 재판의 대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교리 해석에 관한 다툼에 대해서는 나라의 어느 기관도 심판할 자격이 없다. 이 문제는 종교단체 단체의 자율적이고도 독자적인 소관 사항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위와도 관련하여서 특정 종교가 사교(邪敎)냐 하는 것도 나라의 어떤 기관도 판정을 할 수 없다. 종단 사이에서 특정 종단의 교리나 특정 종과의 창종을 이단이라고 하거나 인정할 수 없는 사설(那說)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어도 나라의 공공기관이 그러한 해석을 통한 심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3. 종교나 종교인이 정치에 관여한다고 하여 문제된 사례
박정희가 이른바 ‘유신’으로 국민의 인권을 탄압할 때에 양심적인 지식인이나 종교인의 항거가 그에게는 가장 께름칙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예 국민의 손발을 묶고 눈 귀를 가리고 입을 틀어막기 위한 조치로 ‘긴급조치’라는 강권적 탄압방법을 행하였을 때에 가장 초점이 된 것은 정치활동을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긴급조치를 발동시켜 옥내-외의 모든 정치집회를 금지시킨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주권자의 고유한 불가양의 권리를 난폭하게 침해하고 유린하는 것으로서 반역인데도 버젓이 법률의 이름으로 통했다 당시에 어느 성직자가 종교집회에서 과거의 사례에서 어느 성인의 말을 들어서 정치의 포악성의 문제를 비유적으로 적시했는데, 이것도 긴급조치에 위반된다고 재판에 붙이고 우리나라 대법원은 그러한 행위의 처벌이 적법하다고 하는, 그야말로 웃음거리의 ‘유신재판’ 놀음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종교 성직자가 법당과 교당 안에서 고상한 신선놀이를 한다고 가정할지라도, 그는 이 정치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의 문제가 종교의 가르침으로 보아서는 따지고 고쳐 주어야 하고 주위를 환기시키고 싸워서라도 배척을 할 땐 할 말을 하는 것이 교리에도 합당할 것이다. 가장 심각한 현실의 문제이고 종교상의 문제이기도 한 사항에 벙어리가 되어 눈만 껌벅거리면서 적당히 패를 넘는다는 것은 엄청난 죄악에 공범자나 방조자로서 도움을 주는 것이 된다.
칠십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의 말기증상으로 노동 문제가 터져 나을 때, 박정희 정권은 사회운동 및 노동운동을 좌경이라고 매도하면서 실제로 각종 법률의 올가미를 씌웠다. 그런데, 정직하게 생각해 보자면, 지금 당장 눈앞에서 불의로 말미암아 눌리고 굶주리고 학대받는 형제가 있을 때 성현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까. “그저 모든 문제는 이미 정해진 것이니 기꺼이 순응하라”고 할 것인가. “모든 일이 마음의 문제이니 속된 일로 동요하여 경거망동말고 현실의 대세를 따르라”고 할 것인가. 문제가 어디에 있고 그 잘못을 고쳐나가는 일은 어디서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누구와 함께 해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법률이 보장하는 자기의 자유와 권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 잘못인가
4. 사회참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종교인의 사회참여의 타당성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참여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성직자도 시민(국민:주권자의 일원)으로서 정치에 참여하고 사회운동을 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시민 곧 국민이라고 하는 주체로서는 투표권이 있는 참정권의 주체이고 헌법이 정하는 인권을 누릴 수 있는 인격체임에는 다른 일반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다만 특정한 종단이나 교단을 대표하는 주체로서 특정한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종단이나 교단을 정치수단화 시키거나 특정한 정치권력의 비호와 지원을 받아 그 권력의 이익을 위해 종단이나 교단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경우에 따라 종단이나 교단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도 특정한 정치 문제에 대하여 찬-반간에 중대 결단을 내려 발언하고 나아가 행동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민족의 중대한 문제나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정치권력과의 한계에서 문제가 될 경우가 그렇다.
정치권력은, 부처님이 규정했듯이, 악(惡)이고 권력자는 가장 위험한 존재이다. 물론 ‘필요악’이며 ‘불가피한 존재’로서의 역할이 있으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제왕권 시대에서처럼 숭배의 대상일 수는 없다. 역사가 발전하여 민주시민의 시대에 이르는 지금에는 권력자는 다만 시민의 심부름꾼이어야 할 터이다 사회적 신분에 의한 차별의 장벽이 무너지기에 이르른 이 시대는 “중생을 부처로 섬기라” 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현실적으로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종교인의 사회참여를 문제시함은 애당초 참여 부정이라는 소극적 입론을 전제로 해서 제기된 발상이다. 그러한 발상에서 비롯되는 편견은 마땅히 때려부수어야 한다. 성직자가 속인의 공경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은 그 신분의 고귀함에 서 비롯한다. 곧, 속인이 할 수 없는 일로서 자기의 일부를 버리고 성스러운 가르침을 따르는 대오에 서 있음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정치 현실에 대한 그들의 안목은 더욱 날카롭고 정확하다. 그런 성직자가 금전과 명예와 지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른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라면 개인으로서 정치를 하든 사회운동을 하든 문제가 될 수 없다. 물론 시행착오는 있을 수 있으나, 속인과 마찬가지로 법의 규제를 받을 뿐더러 오히려 성직자이기에 더욱 따가운 책벌을 받을 수 있다. 결론은 이렇다. 성직자의 사회참여 문제를 무조건 제약하고 억제하는 측면에서 볼 것이 아니라 종교 본래의 취지를 발양하는 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바라보며 또 지원과 동참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