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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시(夕汀詩)의 불교적 해명-〈영구차(靈柩車)의 역사(歷史)〉를 정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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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상 응모 - 우봉규 1990년 06월 100호
신석정(辛夕汀 : 錫正(1907-1974)은 흔히 우리나라 최초의 목가시인(牧歌詩人) 또는 전원시인(田園詩人)으로 불리우는 1930년대 시문학파 시인의 한 사람이다.
지금까지의 석정시에 대한 평가는, 그의 모든 작품의 본질이 논의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단편적인 몇 작품의 시어에 국한된 지엽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실정에 있었다.
근래에 와서 그의 작품들이 새롭게 우리에게 소개되어, 우리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고정된 선입견, 즉 순수 문학적인 자연파 시인에서 참여시인(參與詩人) 또는 항일시인(抗日詩人)으로도 보려는 관점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한 시인을 편협하게 한정지어 버린 그동안의 안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직한 노력의 일단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 전편에 흐르는 기본사상이, 그의 전 생애를 두고 일관되게 유지해 온 불교의 세계관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간과하고 있다.
본고(本考)는 〈영구차(靈柩車)의 역사(歷史)〉를 정점으로 한 그의 불교관이 극명하게 드러난 몇 작품을 통해 다양하게 전개되어온 그의 불교시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철저한 불교의 윤회관과 세계관에 입각한 〈석정의 불교시〉를 해명(解明)해 보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기본적인 요지가 되는 것이다.
〈한 시인에 대한 예리한 비평이나 평가는 그 시인에게 지향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 자체로 직향(直向)되어야 한다〉는 엘리어트의 말은 석정시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사물을 보는 사람의 관점이 관찰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한 시인이나 작가의 전 작품을 두고 얼음 가르듯 반듯하고 분명하게 정의한다는 것은 이러한 이유로 많은 위험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뛰어난 비평가라 할지라도 자신의 관점을 떠나 엄정한 객관성을 유지하기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러한 객관성은 오히려 평자(評者)의 독자적인 비명의식을 마비시키는 장애요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시인이나 작가를 도대체 어떻게 어떠한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
본고에서는 그동안 석정을 자연도가주의(自然道家主義)의 목가시인으로서 고정시킨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나 불교의 넓고 심오한 사상의 결정체로 그가 빚어낸 독특한 그의 불교시 면면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석정에 대한 평가는, 물론 다른 작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밖으로 드러난 피상적인 언어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작가의 대응인식을 논의의 대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석정의 전 생애를 정신적으로 지배해 온 불교가 그의 작품을 조명하는 자료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석정을 은둔시인이나 명상시인으로 규정해 놓았던 문학사가들의 관점이 어느 부분에서는 상당한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의 작품에 드러난 불교인식을 토대로 그를 진정한 불교시인으로 보려고 하는 본고의 의도도 어느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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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아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전개한 석정은 단숨에 전원적 목가시인으로서의 확고한 그의 위치를 우리 문학사에 아로새겨 놓았다.
그가 이렇게 단숨에 우리 문학사의 중심에 위치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태어나서 우리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조국을 상실한 현실적인 조건은 석정으로 하여금 암울한 현실 사회를 피하여 평화롭고 안온한 자연적 이상세계를 동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부딪친 한 젊은 시인의 눈은 오히려 암담한 현실과는 정반대되는 세계, 즉 자연 속의 동식물과 친화할 수 있는 그의 동양적 체질(불교적 세계관)과 연결되어 다분히 도가적(道家的)인 무위자연(無爲自然) 시세계에 침잠할 수 밖에 없는 외적요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예는 석정의 경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다른 우리 시인들의 편린과도 일치하는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 당시의 석정의 시셰계는 시종 자연친화로 일관되어 있다. 여기서 자연 친화라고는 하지만 단지 자연과의 융화일체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철학적 인식이 불교적 세계관에 연결되어 있다.

난(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난(蘭)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 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작은 짐승〉 중에서

〈작은 짐승〉은 그의 불교적 세계관을 단적으로 암시하는 작품이다. 그의 자연관은 동양적 인식의 수평적 자연관이다. 인간이 다른 무정불(無精物)보다 우월하다는 서구의 수직적 자연관과는 달리 인간이나 동물이나 심지어 나무, 돌, 꽃 등이 모두 평등하다는 수평적 자연관에 맥락이 닿아있다.
방대한 불경(佛經) 중에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 십선업도품(十善業道品) 등에 나오는 초목성불론(草木成佛論)과 일치하고 있다. 초목 곧 무정물도 생명을 가진 중생처럼 성불(成佛)할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
산 새는 저 숲에서 살지요?
해 저문 하늘에 날아가는 새는
저 숲을 어떻게 찾아 깐답니까?
……………
내가 어머니 무릎에 잠이 들 때
저 바람이 숲을 찾아가서
작은 산새의 한없이 깊은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중에서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중에서

어머니로 표상되는 〈절대존재〉는 여기서 수직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물론 이때의 수직적 자연관이란 인간과 동물의 수명적 자연 전체를 포함하는 불교적 인생관의 내포이다.
나라, 하늘, 숲, 새, 꿈, 햇볕, 구름, 바람, 비둘기, 흰물새, 들장미, 노루새끼 등 그의 시에 등장하는 모든 시어들은 이렇게 모두 수평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석정이 시를 쓸 때에 이러한 정연한 논리와 질서를 가지고 시작에 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소의 의도성은 있었겠지만은 석정이 본래 가지고 있던 불교적(동양적)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석정이 가지고 있던 자연관, 즉 그의 시 세계관이 연약한 존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연민이다. 불교적으로 해석해 보면 그의 중생관(衆生觀)임을 알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육도를 윤회하는 육신을 가진 동일한 중생으로, 인간 혹은 산과 들의 작은 짐승으로부터 심지어는 무정물인 돌, 꽃, 나무 등에까지 그는 따뜻한 연민의 정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전북 부안(扶安)에서 당시 한학자였던 부친과 역시 유교적인 집안의 딸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석정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건너간 부친과 20대 초반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불행을 통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의 눈은 그때부터 자기 자신의 고통을 우리 모두에게 확산시켜 나가는 첫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다. 시인으로서의 토양을 다지는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석정은 일제에 신음하는 삼천리 강토를 감옥, 즉 흔돈과 무명으로 둘러싸인 사바세계로 보았고 우리 겨레를 그 감옥에서 신음하는 복역수, 즉 중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여보
얼마나 훌륭한 새벽이오.
우리는 명 억만년을 두고 우리의 생활에서

너무나 오래 오래 잊어버리었다 하는
그 푸른 하늘을 찾아가지 않으렵니까?
〈훌륭한 새벽이여 오늘은 그 푸른 하늘을 찾으러갑시다〉 중에서

그러나 그는 이처럼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그 어려움을 회피하기보다는 그것을 자신의 내부로 수용하여 극복하려는 집념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몇 억만년을 두고 우리의 생활에서 너무나 오래 잊어버리었다고 하는 그 푸른 하늘을 찾으러 가지 않으렵니까?〉
그의 가정과 국가가 처한 질곡의 현장 속에서 그가 받는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는 우리 속에 있는 우리가 오래 전에 잊어버린 그 〈푸른 하늘〉, 즉 불성(佛性)을 찾고자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러한 관점에서 놓고 보면 그의 세계관이 얼마나 불교적 세계관과 일치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불교적 세계관으로 보면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아니 인간이 아닌 생명을 가진 어떤 중생에게나 불성은 있으나 다만 중생들은 그것을 망각하고 찾지 않는 까닭에 헛되이 윤회를 거듭할 수 밖에 없다.
그 몇 만년 전 우리가 가지고 있던 〈푸른 하늘〉, 우리의 잊어버린 불성을 찾지 않겠느냐고 묻고 있다. 그는 이 어두운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을 자기 아닌 외부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장미를 열심히 전지(剪枝)하는 동안에도
장미는 저 햇볕과 수분을
열심히 빨아 올리고 있는 것은

내가 장미를 다스리듯
장미도 저를 다스리는 까닭이다.
〈한 줄기 불빛을〉 중에서

장미를 열심히 전지하는 동안에도 장미가 햇볕과 수분을 열심히 빨아올리고 있는 것은 전지를 하는 자(者)와는 아무 상관없이 장미는 저 나름대로 제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이 시에서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것들이면 어쩔 수 없는 수명의 한계(운명)와 끝까지 삶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엄연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비로소 우주의 정연한 법칙을 깨달은 삼매(參昧)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내가 장미를 다스리듯 장미도 저를 다스리는 까닭이다.〉 이 귀절은 이미 여태까지 다스려온 그의 시 세계가 탈속의 경지로 들어섰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초목성불설에 나타난 초목들의 성불사상을 그는 이렇게 명료하게 확인하고 있다. 한 개의 식물인 장미와 시인 자신을 동등한 중생으로 놓고 정관(定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석정의 시가 자연과 밀착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중국의 당시(唐詩)나 우리나라 고산(高山)의 시에 나타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와는 그 내면적인 구조가 다른 것이다. 석정에게 있어서는 자연은 단순히 정물적이고 객관적인 자연이 아니다. 자연 속에 묻혀 살면서 유유자적하는 유가(유(儒)家)나 도가(道家)적인 자연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에게 부속된 장식물의 자연이 아니라 종교적 외경의 자연이다. 그는 자연을 통해서 자신을 보고 자신을 통해서 자연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기존에 그를 〈우리나라 시인 중에 도교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시인 중의 한사람이다〉라고 부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시가 외형적으로는 중국의 노장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이 보이나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너무나도 판이한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외형적 모양에서일 뿐이다.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소(蕭蕭)한 대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 소리
〈대바람 소리〉 중에서

홀로 고요히 대숲에 앉아
거문고 뜯다가는 휘파람도 불어보고
길은 수풀이라 아는 이 없어도
달빛이 소리없이 비쳐오더고.
왕유(王維)의 〈죽리관(竹里館)〉

이옥정(李玉貞)이 비교한 이 두 시를 일일이 비교할 필요도 없이 쉽이 두 작품의 유사성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세속에서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 어디쯤에서 바람 소리 하나, 댓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도 예사롭지 않는 탈속의 여유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석정이 왜 동양시의 모본이 될만한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의 시를 견본으로 삼지 않고 굳이 왕유(王維)의 시와 그 맥이 잇닿아 있는가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석정이 중국 노장사상의 한 전통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왕유의 시에 담겨 있는 불교적 세계관이 석정으로 하여금 왕유를 가까이 하게 한 주된 이유가 될 것이다.
이병한(李炳漢)의 말처럼 시불(詩佛)이라고 불리우는 왕유는 같은 시대의 시인으로 이백, 두보와 비견된다. 왕유는 평생을 통하여 이백처럼 능동적으로 광휘찬란한 낭만적 기질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두보처럼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뛰어들지도 못했다.
그는 그저 외부로부터의 모든 것을 조용히 받아들여 이를 내성적 방향으로 심화시켜 나갔고 철저한 자기응시를 통하여 얻어지는 인간적 고독을 형상화했던 것이다. 따라서 왕유의 시세계에는 인간에 대한 원망이 없고 현실사회에 대한 반발이나 항거가 없으며 모든 것을 우주 대자연의 법칙 속에 용해시켜 그것을 다시 하나의 미적 세계로 승화시키려는 숭고하리만치 의지적인 노력이 보인다.
석정 또한 왕유와 마찬가지로 당시 시문학파의 시인들처럼 자연에만 몰입할 수도 없었고, 이육사나 윤동주처럼 감연히 현실의 참고(慘苦)에 뛰어들지도 못했다. 그는 오히려 현실 속에 고요히 들어앉아 그 중압감을 안으로 절실히 느끼면서 보다 근본적인 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석정의 시는 막연히 동양시의 전통에 닿아있는 것이 아니라, 좀더 엄밀히 말하면 불교의 전통적 우주관에 그 맥락이 이어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석정의 시가 만해(萬海)의 시에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숙명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만해가 타고르의 영향을 받고 있음으로 해서 석정이 인도의 전통사상, 즉 불교에 그 근본바탕을 두고 있는 타고르의 시에서, 왕유의 시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공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석정이 같은 시문학파의 정지용, 김영량, 박용철 등의 시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바로 동양 전통 사상, 즉 불교사상을 그 근저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본체질로 하여 석정은 청년시절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선사의 문하로 공부를 하였고 그곳에서 만해와도 잦은 교류를 하였던 것이다.

시방 나는 안개 자욱한 거리를 헤매이며
다시 불잡고 목놓아 울어볼 사람을 찾노라.
모두 움직이는 석고상(石膏像)인 것을
모두 다 움직이는 석고상뿐인 것을

오오
멀리 흐르는 강물소리
역력히 들려오는 그 강물 소리
〈흰 석고상(石膏像)〉 중에서

그는 〈안개 자욱한 거리〉를 우리가 사는 중생계로, 〈멀리 흐르는 강물 소리〉를 다가올 미래의 저편 피안(彼岸)의 세계로 그리고 있다. 어두운 현실속에서 밝은 미래를 펼쳐보이는 방법으로 그는 불교의 세계관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모든 불합리(안개 자욱한 거리)와 현실적인 조건들을 그가 차용한 불교적 세계관으로 웅시하고 있다. 그것을 부정적인 시각이 아니라 따뜻하고 밝은 긍정적인 세계로 이끌어내고 있다. 불교는 그에게 있어서 그 모든 모순을 극복하는 강한 원동력과 예지력을 함께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내 가슴 속에는
대 숲에 드는 햇볕이 아른 거린다.
햇볕의 푸른 분수가 찰찰 빛나고 있다.
……………
내 가슴 속에는
바람에 사운대는 꽃잎파리가 었다.

꽃잎파리가 마련하는 머언 세월이 있다.
내 가슴에는
오층탑을 넘어 석종을 스쳐간 하늘이 있다.
별등을 간직한 하늘의 착한 마음이 있다.

내 가슴 속에는
바다같이 울던 〈金山寺〉의 매미소리와 귀촉도의 더운 피가 있다.
항상 이방이라서 설리우는 귀촉도의 더운 피가 있다.

내 가슴 속에는
파르르 날아가는 나비가 있다.
나비의 그 가녀린 나랫소리가 있다.

내 가슴 속에는
하늘로 발돋움한 질푸른 산이 있다.
산에 사는 나무와 나무에서 지줄대는 산새가 있다.

내 가슴 속에는
산 같이 ! 산 같이 ! 하던 〈내〉가 있다.
오늘도 산같이 산같이 늙어가는 내가 있다.
〈내 가슴 속에는〉 중에서

석정이 부르는 〈내 가슴 속에는〉에는 햇볕과 떠나간 발자취, 머언 우뢰소리, 바람에 펄럭이는 꽃잎파리와 그 꽃잎파리가 마련한 머언 세월이 있다. 오층탑을 넘어 석종을 스쳐간 하늘이 있고, 별들을 간직한 착한 마음이 있다. 파르르 하늘로 날아가는 나비가 있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지줄대는 산새가 있다.
〈산같이 산같이 하던 내가 있다. 오늘도 산같이 산같이 늙어가는 내가 있다〉 그는 결국 나비였고, 꽃이였고, 바람이였고, 산새였음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자신의 가슴속에 산같이 늙어가는 〈자신〉을 보고 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그는 화엄경(華嚴經)의 사상을 그대로 육화시키고 있다.

하나인 그 가운데 일체 가 있고 많은 가운데 하나 있어 (一中一切多中一)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음 그것이 곧 하나이며 (一卽一切多卽一)
한 티끌 그 가운데 우주를 머금었고(一徵塵中含十方)
우주의 티끌마다 낱낱이 또한 이와같네 (一切塵中易如是)
무량겁 긴 시간이 한 생각 찰라이고(無量遠劫卽一念)
찰라의 한 생각이 무량한 긴 겁이니(一念卽是無量劫)
구세 십세 영원한 시간 함께 서로 하나되어(九世十世互相卽)
얽힌듯 어제러운듯 따로따로 뚜렷한 만상일세(仍不雜亂隔別成)|

3
이와같은 사상은 그의 불교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구차(靈柩車)의 역사(歷史)〉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에게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각오를 가르쳐 주는 것이 종교로서의 불교이다. 불교에서의 죽음은 결코 무서운 것이 아니며 뻔한 것,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절실하게 규명해 보아야 하는 염원의 대상이다. 석정은 이 작품에서, 죽음이란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 전개되는 시작으로 보고 있다.

강물같은 밤을
잉태(孕胎)한 촛불 아래
분향(焚香)이 끝난
다음

영구차(靈柩車)는 다락같은 말에 이끌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때 나는
흰 장미(薔薇)꽃으로 뒤덮인
관을 붙들고

놋날같은 눈물을 흘리며
목메어 우는 소녀를 보았다.
촛불을 켜놓고
나는 시방 그 어둠 속에 사라지던
영구차(靈柩車)와 영구차(靈柩車)에 매달려 흐느끼던
소녀를 생각한다.

이 지옥같은 어둠이 범랍하는 지구(地球)략 몹쓸 별이
내가 아직 숨을 타기도 전에
그러나 아주 오랜 옛날 그 어느 별을 지나갔을
나의 외로운 영구차(靈柩車)이었는지도 모른다.
촛불이 흔들리는 강물같은 밤에.
〈영구차(靈柩車)의 역사(歷史)〉 전문

강물같은 밤을
잉태(孕胎)한 촛불 아래

그는 여기 오탁악세에 물든 이승의 세계를 〈강물같은 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잔 파고가 끊임없이 일렁이는 〈강물같은 밤〉을 자신이 떨어진 사바세계로 또 혹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번뇌로 보고 있다.
그러한 것들을 잉태한 촛불 아래에 그는 앉아있다. 그의 시 전체를 이루는 특정이랄 수 있는 극단의 대조를, 그는 이 작품에서도 〈강물같은 밤〉과 〈촛불〉로 대비시키고 있다. 어두운 것이 결코 어두운 곳에서 비롯되지 않고 밝은 것이 밝은 곳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밝음과 어두움이 결국 한 가지라는 불교의 근본사상을 상정하고 있다.
처염상정(處染常淨), 즉 진흙(無明)에서 연꽃(明)이 피어나듯이 명과 무명이 두 가지이지만 무명이 곧 명이라는 사상과 동일하다. 화엄경의 주요사상인 〈벤뇌(煩腦) 즉 보리(菩提)〉라는 것과 같다.

분향(焚香) 이 끝난
다음

그는 촛불 아래 칡덩쿨처럼 얽힌 이 사바세계를 떠나 정좌{定座)하고 있다. 그가 들어가고자 하는 삼매(參昧)를 향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영구차(靈柩車)는 다락 같은 말에 이끌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깨끗한 마음으로 정좌한 그는 한 걸음 두 걸음 그가 온 원초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다락같은 말〉은 그를 본원(本源)의 세계로 인도하는 매개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때 나는
흰 장미(薔薇)꽃으로 뒤덮인
관을 붙들고
놋날갈은 눈물을 흘리며
목메어 우는 소녀를 보았다.

그는 비로소 여태껏 막막하고 추상적이던 이승과 저승의 긴 통로를 지나 그가 전세(前世)에 두고 온 그의 과거생을 역력히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윤회의 비극성을 상정하는 말로 흰 장미에 뒤덮인 관과 놋날같은 눈물로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나타내고 있다. 석정은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인간 최고 비극의 절정을 〈놋날 같은 눈물을 흘리는 소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을 켜놓고
나는 시방 그 어둠 속에 사라지던
영구차(靈柩車)와 영구차(靈柩車)에 매달려 흐느끼던
소녀를 생각한다.

그 구체적인 실상,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생멸(生滅)의 과정을 묵도한 시인은 이제 담담히 자신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이 지옥같은 어둠이 범람하는 지구라는 몹쓸 별에 이 시인이 숨을 타기도 전, 그러니까 아주 오랜 옛날 어느 때, 그 어느 별을 지나갔을 그 자신의 외로운 영구차를 본 것이다.

촛불이 흔들리는 강물같은 밤에

그가 그 자신을 확연히 볼 수 있는 명(明)의 〈춧불〉마저도 무명(無明)에 흔들리는 이 혼탁한 사바세계 〈강물같은 밤〉으로 그는 다시 돌아오고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이 숙명적으로 겪어야 하는 생사윤회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와 인간 의지의 왜소함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이 우주의 커다란 법칙 앞에 따를 수 밖에 없는 가여운 중생임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자신과 동등한 수명적 객체, 즉 수명의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가여운 중생으로 여기고 있다. 그가 바라본 자연은 자연 그대로가 아니라 그 자연 속에 내재된 자신을 보고 있다.
탁월한 언어의 조탁으로 한국시의 새로운 지명을 열었던 석정의 시는 이렇게 인간 삶의 법칙이 자연법칙에 있으며 그것이 직관을 통하여 인식되고, 이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독룡(毒龍 : 번뇌)를 잘 다스려 나가는 것, 그 불교적 신념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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