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원시불교의 국왕의 교화와 윤리성
석존 당시의 인도에서는 여러 나라가 서로 대립하여 싸우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민중의 생활은 평화를 잃고 개인의 생명에 위해를 받았다. 이를 본 석존은 당연히 마음이 아팠을 것이며, 또한 불교도들도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켜 인명을 살상하고 백성의 재산을 빼앗는 국왕을 도적에 비유하였다. 이러한 것을 경전에서는 왕난이라고 했다. 물론 석존이나 불제자에게는, 통치자로서의 왕이란 백성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완벽한 외호자의 역할을 하는 존재라야 했다. 석존이 바라는 이상적인 정치는 ‘죽이지 않고, 해치지 않고, 이가지 않고, 이기게 하지 않고, 슬픈 일이 없고, 슬프게 하는 일이 없게 법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이는 곧 연간의 참된 삶을 위한 진리의 구현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였으므로, 원시불교시대에는 국왕을 뱀이나 도적과 같이 가까이할 것이 못 된다고 하여, 교단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사회로서의 ‘상가(Samgha)’를 형성하였다. 그렇지만 국왕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니, 여기에서 국왕론이 설해진다. 곧, 이상적인 국왕 또는 정치의 한 예로서 핫지(Vajji)족의 공화국을 들어 찬양하였다. 이것이 선정칠법(善政七法)이라 하는 것이다(中阿含 제35). 그밖에도 적극적으로 국왕을 교화하는 가르침(中阿含 제4)도 있다. 요컨대 정치는 곧 정법의 실현임을 부처님은 가르치고 있다.
이렇듯 원시불교시대에는 정치의 이상이 정법의 구현임을 제시하였으나, 이를 어디까지나 통치자에게 요구할 뿐이고 직접 행동으로 나서는 적극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승불교시대로 넘어가면 이와 달라진다.
3. 대승불교의 보살의 행원
대승불교에서는 정법 실현의 구체적인 방법이 설해진다. 보행정왕론(寶行正王論)에서는 산업의 진흥과, 조세의 경감과, 빈민과 외로운 사람에 대한 구체까지도 강조한다. 이러한 교설은 현실에의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참여를 제시하며, 또 대승불교의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사상과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세속을 떠나서 달리 어떤 참된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에 대한 정신적, 경제적인 시여인 자비는 정치의 요체인 동시에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삶인 것이다. 그리하여 세속에 대한 강한 관심과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요구하게 되냐, 이것이 정토(浮土)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정토란 청정한 국토를 뜻함과 동시에 국토를 청정하게 함을 뜻한다. 청정한 국토는 부처의 세계요, 국토를 청정하게 함은 보살의 세계다. 부처와 보살은 다르지 않다. 궁극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부처라면, 무한히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보살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보살이라고 하는 개념은 원시불교적인 개념이다. 대승의 보살은 궁극의 깨달음 속에 하화중생하는 실천적인 것이다. 궁극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중생 제도에 앞장서는 이다. 이런 이가 부처요, 보살이다. 보살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부처가 보살이 되는 것이다. 속이 진으로 가는 왕상(往相)이 아니고, 진이 속으로 오는 환상(還相)이다. 진을 떠나지 않으며 속으로 오는 환상이다. 정토사상은 보살의 행원으로 이룩하려는 부처의 세계다. 그러므로 보살의 행원은 바로 부처의 행원이다.
「반야경」 몽중입산매풍과 정불국토품에 보면, 보살은 국토의 평탄함과 국토의 넓음과 일월세수와 이름이 분명하기를 바라니, 이는 넓고 살기 좋은 땅으로서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고 기후환경이 좋음을 의미한다. 또 「대지도론」의 불국토품을 보면, “정토에는 항상 하늘의 음악이 틀리고 하늘의 향기가 있고 백가지 음식이 있으며 하늘의 향기가 뜻에 따라서 얻어진다.“ 했으니, 이는 정신의 만족함과 행복함이다. 또한 몽중품에서는 보살의 원에 ‘사성(四姓)이 없고 우열이 없고 모두 청결한 묘한 빛을 가질 것과 주인의 이름 없는 것’을 그리니, 이는 인간의 평등함이다.
곧, 대승불교의 보살은 인간의 행복과 평등을 구현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또한 도덕과 윤리의 실현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이상이다.
불교의 정치는 정토의 구현에 있다. 행복과 평등과 진리의 실천, 물질과 정신의 완전한 가치 창조, 이것이 불교의 목표다. 불교의 실천은 정토의 건설을 위해 보살행원을 다하는 것인즉, 정치를 멀리하는 것 또 반대로 정치에 몰입하는 것은 모두 중도에 어긋남과 정토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세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으니, 피토의 정토는 차토의 정토 그것이다. 국토는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세계가 모두 정토의 대상이다. 마음의 평화에서 세계의 평화가 비롯되고, 마음의 통일에서 조국의 통일이 있게 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기 때문이다. 연기의 도리는 언제, 어디서나 진리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중도의 실천은 연기의 실천이요, 불교의 정토구현이다.
4. 통일운동과 불교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는 물질과 정신의 만족한 세계가 필수적이다. 그것이 정토이다. 그런데 우리는 특히 불교인은 이 국토만이 아니라 온 세계를 정토로 구현할 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불교인은 대승보살로서 인류의 행복이나 평화나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남북의 통일이 선결문제다. 국토의 광대함이 정토의 조건이듯이, 우리로서는 먼저 조국만이라도 통일하여 국토가 분단된 아픔을 없애야 한다. 통일이란 땅덩이의 통일만이 아니다. 땅덩이는 물질의 충족에 지나지 않는다. 독재의 강압만이 있고 자유는 없는 땅에서는 물질의 충족이 참된 행복으로 나타날 수 없다. 또한 이데올로기의 굴레 속에서 정신적인 창달과 창의가 없는 사회에서는 절대 진리의 정법이 구현될 수 없다. 어떤 이념의 굴레를 벗어나고 또한 사상의 위장된 사슬에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정법의 구현이 있다. 어떤 사상이나 어떤 이데올로기든 그것은 일시적인 제한된 가치에 그칠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주의나 사상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불교인은 정법을 보고 정법을 실현해야 한다. 그릇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현혹되어 진리를 보는 눈아 어두워지면 안 된다. 김일성 주체사상이란 서구의 맑스-레딘 사상을 변장한 개인숭배사상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레닌 사상은 유물론을 바탕으로 한, 물질에 편집된 사상이다. 마찬가지로, 서구의 유심론적인 종교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도 한쪽에 편집된 사상이다. 이들 양대 사상에 바탕을 둔 어떤 체제도 절대시하면 안 된다.
불교에서는 유심, 유물의 어느 것도 희론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이를 척파한다. 연기의 중도에}서는 어느 한쪽에 국집하여 절대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불교는 그러므로 파사현정으로 진리를 드러낸다.
불교인은 통일을 염원하되 세계를 나의 조국으로 삼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되 불교의 정법에 의한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아의 확립에 의한 대자유와. 자비에 의한 평등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토의 통일에는 사상의 정화가 앞서야 한다. 남북으로 나뉜 민족의 이질화와 갈등이 사라지고, 순정한 민족의 동질성이 회복되어 정법의 광명이 이 땅을 덮을 때에, 조국의 진정한 통일이 올 것이다. 조작된 인위적인 통일, 그릇된 이념에 의한 일시적인 통일은 진정한 통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원론적인 자본주의도, 교조주의적인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도 아니다. 인간의 지혜는 끊임없이 현재를 미래에로 조명하면서 더 참되고 더 행복한 길을 모색한다.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영원한 인류의 앞길을 일월과 같이 비추고 있다. 그러나 눈이 없는 자는 저 빛을 보지 못하고 거짓된 것에 집착한다. 어리석은 자는 아집으로 자기의 세계를 고집한다.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러고 정토구현을 위하여 쉬지 않고 정진하여, 오천만이 모두 당래 세계의 미륵보살이 되어야 한다. 정법을 보고, 정법을 구현하는 보살임을 자각하여 파사현정의 방편을 구사하는 금강보살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