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법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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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김태형
1995년 11월 165호
올해는 조선 왕조에 의해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조치가 해제된지 일백 년이 되는 해이다.
1895년 일본 일련종의 승려 사노(住野前뼈)가 일본 불교를 조선에 침투시키기 위한 사전 공작의 일환으로서 입성해금入城解禁을 건의하였다. 이것은 그 무렵의 불교로서는 시대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게 해 준 꿈 같은
사건이었다.
그 때에 수원 용주사의 싱순尙順스님은 일련종의 승려 사노를 각하蘭下라 칭하고 그에 대한 소감을 “오백 년 동안 의 억울 함(五百年來第屆)을 풀어준 각하(사노)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 불교의 그러한 호의가 결국은 물에 빠진 사람을 도와 주고 생명의 은인 운운하며 잡아먹으려 드는 형국 그 자체였음을 그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일본 불교의 조선 불교 병합을 위한 사전 공작은 결국 조선에 대한 주권 침탈로 이어졌으며, 일본의 조선 병합으로 조선의 불교 또한 주권의 몰락을 맞이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병합과 아울러 조선 불교의 빼어난 불교 문물에 대한 약탈을 감행하였다. 누군가 임진왜란을 ‘문화침략전쟁’ 이라고 표현했다. 19세기말 일본의 조선 침략은 어떤 면에서는 제2의 임진왜란 곧 제2의 문화 침략 전쟁이 된 셈이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에 앞서, 조선의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치부를 위해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명당이라 불리는 사찰터를 탈취해 갔다. 그들은 비단 땅에 대한 탈취 뿐만 아니라 사찰의, 불교의 모든 것을 수탈하거나 파괴해 나갔다.
이미 사라져 버리고 터만 남은 사찰 주변의 촌로들에게 그 사찰의 망칠 원인을 물어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빈대 방화 폐사 이야기이다. ‘철간에 빈대가 너무 많아 절에 거주하던 승려들이 모두 떠났다’거나 ‘빈대를 없애려다 잘못하여 화재가 일어나 절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또 다른 속담에 ‘빈대 잡으려다 초가 삼간 다 태운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다만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속담들을 하나, 둘 캐다 보면 이것은 양반이라 지칭되는 사대부들의 사찰에 대한 횡포를 얼버 무리려는 우스갯 소리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보기로, 보운스님의 일화가 깃든 경기도 남양주군에 있는 회암시터에 관한 것올 들 수 있다. 몇 해 전에 그 곳에 갔다가 앞에서 이야기한 이유들을 그 지역에 사는 노인과 관련 공무원에게서 들였다. 그러나 묘하게도 회암사가 가지고 있던 엄청난 규모의 토지-문정왕후가 기증함-가 18, 9세기 무렵에 모두 이씨 왕족의 소유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920년대에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과정에서는 임자 없이 방치되어 있던 회암사터와 그 소유의 땅이 이씨 왕족 일가의 소유로 넘어 갔다는 것이다. 그 뒤로 이 땅은 기독교 계열의 추계학원 소유로 넘어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같은 이씨 왕조의 기득권층에 의한 사찰 재산의 탈취 외에도 사찰문화재에 대한 탈취도 성행했다. 1965년 12월 경주 분황사 뒷담에서 삼십 미터쯤 떨어진 폐우물 속에서 발견된 스물여 점의 목 없는 불상 들이 그러한 사실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 때에 발견된 불상들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동편 뜰에 전시되어 일부 몰지각한 관람객들의 훌륭한 사진 파트너가 되기도 한다. 아직도 일부 지방에서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낳으려고 석불의 코를 갈아 먹는 풍속이 있는데, 이 또한 유교 지식층들이 악의적으로 지어낸 비방이라는 것이 통설로 전해 오고 있다. 한편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행해지던 법난으로 말미암아 폐사가 된 사찰에서 그 곳에 있던 각종 석조물을 마구 옮겨가 사당祠堂이나 정자 따위를 짓는데 이용하기도 했다.
청계사의 경우에는 유생들이 경첩을 훔쳐갔으며, 또 일부는 홍천사 산신각을 방화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홍천사 와 홍덕사의 대종과 경주의 등불은 무기로 만들어지는 비운을 당했다.
이러한 유교 기득권층에 의한 폐불이 곳곳에서 자행되자 일부지방에서는 불장을 인위적으로 땅속에 매몰시켜 그 일부를 노출시킨 뒤 불공을 드리는, 이른바 하체매몰불下體理沒佛 신앙이 미륵신앙 또는 무속신앙과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고속 철도의 통과 문제를 놓고 논란을 빚고 있는 경주에 가보면 너무나 많은 불교 성보가 가정집 주춧돌로, 정원의 장식물로 전락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지 않아도 몽고란과 임진왜란으로 초토화되다시피 한 신라 천년의 유적과 성보는 이렇듯 조선에 들어와 더욱 혹독한 참화를 겪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가지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10세기 무렵에 이슬람교도들이 인도에 침략하였을 때 그들이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 갖가지 불교 유적과 유물들을 파괴하자 붓다 가야를 중심으로 살고 있던 불교도들은 힘을 모아 부처님의 성도지에 세워진 금강대탑을 한삽 한삽의 흙을 모아 덮어 두었다는 것이다.
조선 말기에 유행한 하체매몰불 신앙을 보면서 법난에 대처하여 선조 불자들이 성보를 보호하려던 그 노력에 머리가 숙여진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