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5년 11월 165호
지금까지 석가모니의 출가 의의와 불교의 기본교리인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에 대해 설명하였다. 다음부터는 원시불교에서 부파불교, 대승불교로 변화해가게 된 과정과 불교 사장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발달, 전개되어 갔는지를 서술할 예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불교는 본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라는 점이다. 팔만사천의 법문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실천하여 그 사람의 생활 자체가 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불교 교리는 어디까지나 해탈의 목적을 실현시키려고 고통의 원인인 욕망과 집착을 끊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불교 교리 그 자체를 완벽하게 습득하여 설교가나 철학자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설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항상 실천수행이 전제로 따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다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 곧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며, 이 불성을 어떻게 계발시키느냐에 따라 부처가 될 수도 있고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것은 어리석음으로 헤매는 중생의 마음이나 깨달은 부처의 마음이 모두 다 동일한 마음의 작용에 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의 주인공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면서도 내 마음을 내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머리로는 무상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이해하면서도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면 고통을 받는다. 팔만사천의 법문을 달달 외우는 것보다 단 한 구절의 법문이라도 실천할때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고, 내가 곧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리석음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를 이쪽 언덕, 곧 차안이라 하고, 부처님이 사는 영원하고 안락한 세계를 저쪽 언덕, 곧 피안이라 한다.
이 차안의 세계에서 저 피안의 세계에 도달하려면 뭔가 도구가 필요한데, 이 도구가 이른바 소승경전과 대승경전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송乘’은탈 것, 곧 수레나 뗏목을 말한다. 그러므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갈때. 소승경전의 가르침에 의지한다고 함은 사람을 적게 싣는 작은 뗏목을 타고 간다는 뜻이며, 대승경전의 가르침에 의지함은 사람을 한꺼번에 많이 싣고 갈수 있는 큰 뗏목을 타고 감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승이나 대승 어느 뗏목을 타고 가든 일단 목적지에 도달하면 그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뗏목이란 어디까지나 강을 건너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므로 목적지인 강을 건넜으면 그 뗏목은 더 이상 필요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가르침에 의해 모든 집착과 욕망을 버리고 수행해 온 중생들은 그 수행이 극에 달하면 지금까지 의지해 온 불교의 가르침은 물론 깨달은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 마저도 버려야 진정한 부처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중생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므로 수행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부처, 곧 어떠한 것에도 구애됨이 없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면 지금까지 의지해 온 불교의 가르침은 물론 부처가 되고자 하는 욕망까지도 하나의 집착이 되므로 최종적으로는 이 욕망마저도 버려야 진정한 자유인, 곧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깨달음을 얻으려고 수행하는 것 자체가 욕망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아직 전혀 수행이 되지 않은 초보자에게 부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 막바지에 이르러 이제 곧 부처가 될 사람, 곧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넌 사람에 한해서 적용되는 말이다. 강도 건너지 않았는데 뗏목부터 버리면 어떻게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 옛날 중국에 남악이라는 유명한 선사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마조라는 제자가 있었다. 남악은 아침부터 밤까지 날마다 열심히 좌선하는 마조를 보고 언젠가는 깨닫게 될 인물임을 알았다.
어느 날 남악이 마조가 좌선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 “그대는 좌선을 해서 어떻게 할 작정인가?” 하고 물었더니 마조는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악은 기와를 주워 가지고 와서 암자 앞에 있는 돌위에 갈기 시작했다. 마조가 이상히 여겨 “노스님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남악은 “갈아서 거울로 쓰고자 한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마조가 “기와를 간다고 해서 어떻게 거울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남악은 “좌선만 한다고 해서 성불할 수 있겠느냐?” 하고 대답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좌선을 하는 것이 당연한데 왜 남악은 “좌선만 한다고 해서 성불할 수 있겠느냐”는 말을 했을까? 이것은 수행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수행자에게 던지는 문답으로서, 우리처럼 전혀 수행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상관없는 내용이다. 왜냐 하면 우리같이 초보단계의 수행자들은 앞뒤도 돌아 볼 겨를 없이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악이 마조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 이유도 수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 경지를 넘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남악은 일부러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될 수 없는 기와를 갈고 있음으로써 지금하고 있는 마조의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위의 내용은 부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에는 언제까지나 이 욕망 때문에 진정한 자유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기와가 거울이 될 수 없다는 비유로써 깨우쳐 준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확립하는 것이 참다운 자유이고 깨달음의 경지인 것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야 비로소 해탈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진정한 자유는 부처에게도 경문에도 스승에게도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 한 구절의 법문이라도 실천으로 행해질 때만이 기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