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맑은 가을날에 거리나 또는 산언덕에서 온 몸을 드러내면 문득 마음이 차가와지며 투명해짐을 느낀다.
무어라 말할 순 없지만 가을 앞에 서면 온갖 세속의 영화와 명분과 가치가 새삼스럽게 발가벗겨지는 것 같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물었다.
“나무가 시들고 잎이 떨어진 때는 어떠합니까(樹凋葉落時 如何)?”
“봄이 가을 바람에 드러났느니라(體露金風).”
벽암록의 한 귀절이다. 동양철학에 의하면 가을은 오행(五行)으로는 금(金)에 해당하며, 형법을 관장하는 형관(刑官)이며, 생물을 살상하는 무기와 같다고 한다. 또 항상 죽임으로써 그 마음을 삼는 것이라고도 한다. 가을의 싸늘하고 엄정함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는 듯하다.
결실과 풍요를 노래하기도 하지만 계절의 변화와 쇠락에 감상적으로 되기 마련인 세속의 인정 앞에, 정작 가을은 한치의 감정 찌꺼기도 용납하지 않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엄습하여 온다.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러지는 하염없는 삶도 주위에 흔하며, 한편 수확을 갈무리하여 이듬해 봄을 기다리거나 순간순간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도 많다. 현실에 긍정적이든 회의적이든 인간의 판단과 선택 앞에 삶은 명료하게 놓여 있다. 그리고 가을은 이를 창 끝처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란 얼마나 얄팍한 것일까? 또 얼마나 부질없는 것일까? 지향하는 가치와 세계는 또 한편 덧없는 환상에 불과한 것을…
가을바람에 온 몸을 드러낼 때 우리는 존재의 참모습과 만나게 된다. 이까짓 이치가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 흰머리 되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지각 있는 자 조금만 살펴보면 열심히, 정신 없이 일하는 도중에도 문득 자각하게 되는 것인데. 모든 것을 외면적인 모습으로 또는 심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경계하고 대신 투명하고 질긴 이성의 눈빛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 가을의 본 뜻이라면 우리는 무상한 현실을 무상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감정의 덧칠은하지 말고.
(나중에 그것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무상하다는 말은 우리말로 덧없다고 하는데 존재가 항상 하지 않고 변화한다는 뜻이겠다. ‘만물은 유전(流輕)한다’는 서양철학자의 말을 상기해도 좋겠다. 현실의 모든 면을 살펴보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무상한 현실은 대개 삶에게 고통과 슬픔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현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바탕 위에 두 가지 대조적인 삶이 전개된다.
하나는 이러한 삶의 현실을, 즉 무상한 현실을 의미 없게 생각하고 여기에다 어떠한 행위나 의지를 가하는 것도 부질없게 여기는 태도다. 현실에 초연한 삶이 될 수도 있겠고 고통과 슬픔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는, 몸과 마음이 철저하게 가난한 생활을 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현실에서 어떠한 것도 이를 수 없고 이루려 하지도 않는다. 반면 즐거움이나 고통도 그를 원천적으로 불평하게 만들 수 없다. 그는 현실과 냉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현실로부터 자유롭다. 또 하나의 삶은 이러한 무상한 삶의 현실에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적극적으로 삶의 모습을 꾸려나간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변화하는 현실에 변혁의 의지를 담아낸다. 한편 어떠한 법칙성을 수용하거나 결과에 대한 전망을 하더라도 그 자체를 절대화하는 입장은 전혀 아니다. 또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하더라도 그 입장은 도덕군자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당위적 태도가 아니다. 그는 현실에 연민과 애정을 쏟음으로써 자유를 구가한다. 그 과정에서 성패와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그를 기본적으로 상처 입히지 못한다.
천자의 삶은 고봉정상의 메마른 삶이면서 차갑다. 후자의 삶은 풍요와 환상과 자유의 삶이면서 뜨겁다. 전자의 삶을 일러서 아라한이라 하고 후자를 보살이라 부른다. 가을바람에 온몸을 부대끼면서 선택해야만 하는 삶의 두 모습이다.
이제 가야산은 가을이 깊고 온 산은 붉게 불탄다. 계곡의 푸른 물빛에 삼라만상이 다 비칠 듯하다. 세속의 번민, 역사의 혼란이 이 만물상에 투영되면서 만다라를 이룬다.
언젠가 들었던 존경하는 해인사 방장스님의 법문 말씀이 떠오른다.
숲 사이에서 단풍잎 태워 술을 데우고 林間暖酒燒紅葉
바위의 푸른 이끼 걷고 시를 새긴다. 石上題詩掃緣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