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사명당 송운(松雲) 대사(中)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가람의 향기 - 시명 1989년 10월 92호
사명대사의 임진란에 관한 일기(日記)인「분충서난록(奮忠舒難錄)」의 기록에 따르면 스님은 1594년 4월에서 12월 사이에 세 차례의 회담이 서생포(西生浦)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스님은 그 때마다 항상 적진 깊숙히(加藤淸正)과 담판을 하는 등 소서행장(小西行長)이 내세운 다섯 가지 강화 조건이 전혀 부당한 것임을 역설하여 가등청정으로 하여금 일본측의 요구를 철회하도록 하였다.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온 스님은 곧 선조께 그 전말을 보고하는「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다. 이 소는 첫째 모든 국민을 총동원하여 빈틈없는 작전으로 적을 격퇴하여야 한다는 것과 둘째는 화친하여 적을 돌려보낸 후 백성을 안위케 하고 농업을 장려함과 동시에 민력을 무장하여야 하며 군수기계를 준비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대사는 1595년인 52세 때 장편의 「을미상소(乙未上疏)」를 올렸는데 전쟁에 대비하여 역사적 안목과 현실을 적절히 파악한 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 내용인즉 첫째 백성의 힘을 기르기 위하여 목민관(救民官)을 가려 뽑아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소탕할 것, 둘째 일시적인 국가 백년대계를 망각하지 말고 일념으로 나라의 힘을 길러 만반의 방어책을 세울 것, 셋째 인물본위로 등용하여 비록 천민이라도 나라를 튼튼하게 만들 수 있는 역량있는 사람을 적소에 적임할 것, 넷째 국가의 기강을 쇄신하고 문란한 기풍을 불식하여 민력을 북돋워 군정 확립의 본(本)을 보일 것, 다섯째 농가를 애호하여 중농정책을 확립할 것, 여섯째 산성을 수축하여 산성마다 군량, 마초, 방어무기를 축적할 것, 일곱째 승려도 일반 백성과 동일한 처우를 하여 국가 수비의 일익을 담당케 할 것 등이다.
이러한 스님의 상소는 시의에 적절했으며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장래와 조국을 수호하려는 애국충정으로 불타 있었다. 그러므로 스님은 국방에 있어서 산성 수축에 착안하여 팔공산성, 금오산성, 용기산성을 비롯하여 남한산성을 개축하였다.
또한 스님은 가야산 해인사 부근에서 야로(治爐)로 병기를 만들었으며 무기 정비에도 힘을 기울이는 한편 투항해 온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 조총의 사용법을 조련 숙달토록 하여 아군의 화약 총포술을 배양시켜 방어와 공격의 기술을 철저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스님의 혜안은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전쟁 비축으로서 군량 4천여석과 군기 1만여기를 비장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스님의 나이 58세언 선조 34년에는 부산성을 쌓았으며 61세 때에는 서산대사의 돌아가심을 금강산에서 알았다. 그러나 스님은 서산대사의 영전에 나아갈 수 없는 더 큰 일이 닥쳐 있었다 그것은 일본과의 강화 때문에 강화사로 책봉한 때문이었다.1604년 8월 20일에 스님은 일본을 향하는 뱃길에 올랐다. 8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강화 및 설득을 통하여 성공적인 외교 활동으로 우리 동포 3천명과 함께 1605년 4월경에 돌아왔다.
그해 6월에 선조께 복명하였으며 10월에는 묘향산으로 들어가 서산대사의 영전에서 그의 명복을 빌었다.
이처럼 나라가 풍전등화 같았던 시기에 태어나 서산대사와 함께 나라를 구하고 넓은 교화를 펴셨던 사명대사는 바로 이 나라의 수호신이었으며 평생을 나라사랑에 바친 분이셨다.
스님은 67세를 일기로 하여 해인사 홍제암에서 시적(示寂)하셨는데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사대(四大)로 화합된 이몸
이제 참된 나에게로 돌아가려느니
환영(幻影)과도 같은 몸은
수고로울 뿐일세
우리는 언제나 도를 따라
열반에 들어가리.

그리고 가부좌하고 향을 손수 사르더니 그 향이 채 반도 타기 전에 스님의 육신이 이미 등신(等身)이 되었다. 해인사 서쪽 기슭에서 다비를 하여 탑을 세우고 사리를 모셨다.
스님의 유저(遺著)로는「사명집」전7권과 임진일기인 「분충서난록」이 있다.
스님께서 이 민족과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므로 스님을 기리는 표충사(表忠祠)와 표충사(表忠寺)
가 여러 군데 있고 또한 표충비(碑)가 여러 군데 있다.
그 많은 비 가운데에서 밀양군의 무안의 사명대사 비와 해인사 홍제암의 비는 퍽 유명하다.
무안의 것은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빗돌에서 구슬같은 땀을 흘리는 것으로 해인사의 것은 일제 때 합천 경찰서장이 망치로 빗돌을 깨트렸다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 등 신비한 이적(異蹟) 때문에 유명하다.
삼국지에 보면 죽은 제갈량이 중달을 이기는 것처럼 사명대사는 죽어서까지 이 나라 이 강토를 지켜주는 수호신일 뿐만 아니라 호국불교의 정신적 행동적 표본을 남기신 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인사 홍제암의 비석에 쓰여 있는 허균의 비문(碑文)이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백월거사(白月居士) 허균의 문장은 참으로 찬란하다.
그래서 아래에 허균이 지은 해인사 홍제암의 사명대사 비문을 소개할까 한다.

유명조선국자통흥제존자 사명송운대사석장비명병서
(有明朝解國 慈通弘濟尊者 四溟松雲大師石藏碑銘幷序)
불교가 동쪽으로 삼한에 유통된 뒤로부터 교(敎)와 율(律)이 아울러 창도(倡導)되고 원교(圓敎)와 점교(漸敎)가문을 나누어 수천년래 승려의 옷을 입은 자가 사람마다 각기 마니보주(摩尼寶珠)를 얻었다고 자랑하였으나 오직 목우(救牛)와 강월(江月)이 홀로 황매(黃梅)의 종지를 얻어 우뚝하게 선문(禪門)의
뜸이 되었으니 겸추(鉗鎚)가 한번 떨치매 일만 사람이다 비켜서게 되어 열반묘심(涅盤妙心) 정법안장으로 하여금 청구(靑丘)의 지역에 비밀히 전해지게 하였으니 어찌 기특하지 아니한가 보제(普濟)가 다섯 번째 전하여 부용영관(芙容靈觀)”이 되었는데 청허노사(淸虛老師)가 그의 입실제자라 칭하여 그 미묘한 깨달음이 전배(前輩)보다 뛰어남이 있으니 실로 근세의 임제와 조동이다. 그 뒤에 법을 이은자가 없지 아니하나 스님네들이 사명대사를 크게 추존하여 서산의 전함을 계승할만하다 하니 혹 그럴만하다. 사(師)의 이름은 유정(惟政)이요 자(字)는 이환(離幻)이며 사명은 그가 스스로 호(號)한 것이다. 그 선비(先妣)가 해산하던 날 꿈에 흰구름을 타고 누른 수건을 쓴 금인(金人)이 이끌고 만길 되는 높은 대(臺)에 을라간즉 늙은 신선이 그 위에 걸터앉았으므로 곧 예배하고 깨어서 사(師)를 낳았다. 스님은 나면서부터 총명 영리하고 우뚝하여 보통 사람과 같지 않았고 조금 자라자 희롱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여러 아이와 함께 시냇가에서 놀 때에는 혹 모래를 뭉쳐서 탑을 만들고 돌을 세워서 부처를 만들고 혹은 꽃을 따고 밤을 주워서 불공을 하였다. 하루는 그 물질하는 자가 큰 자라를 잡은 것을 보고는 밤(票)을 모아서 갚아 주고 자라를 못 가운데 넣어 주었다. 여러 아이들이 감동하여 모두 거둔 밤을 스님 앞에 갖다 놓으매 스님이 나누어주기를 매우 공평히 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니 동리의 모든 늙은이들이 보고 기특히 여기었다. 일곱살 때에 그 조부가 사서(史書)를 가르쳤더니 스님이 묻기를 「학자(學者)의 공부하는 것이 귀합니까 천합니까 만약 귀한 것이라면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여야 합니까」 하였다. 조부가 말하기를 「세간의 일에 학문보다 귀한 것이 없다 고금의 성현들도 다 학문으로 이루었으니 감히 소홀히 할 것인가」 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만약 성현의 마음으로써 학문을 한다면 귀하지마는 이와 반대되면 천한 것입니다. 세간의 학문하는 바는 사람을 해롭게 하는 말은 많고 사람을 성취시키는 교훈은 적으니 어찌 모두 귀하다 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조부가 「사람을 성취시키고 사람을 해롭게 함이 오직 마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한 데에 달린 것이니 너의 말이 지극하도다」 하였다. 스님이 힘써 공부하여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열세살에 유촌(柳村) 황여헌(黃까廠)에게서 (맹자)를 배우다가 어느 날 저녁에 책을 치우고 탄식하기를「속학(俗學)은 천하며 누(陋)하고 세상 인연은 얽매어 시끄러운 것이니 어찌 무루(無遍)의 학을 배우는 것만 하리요」 하였다.

주(註)
1) 목우(牧牛): 고려 시대의 보조국사
2) 강월(江月) : 고려 시대의 나옹스님의 법호
3) 황매(黃梅) : 중국 홍인대사가 살던 산 이름
4) 보제(普濟) : 고려 시대 나옹스님의 호
5) 부용영관(芙容靈觀) : 조선 시대의 선사(禮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