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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見山房 無時放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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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심재룡 1989년 10월 92호
1. 세상이 시끄럽다. 특히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시끄럽다. 어느 개인은 불교를 이렇게 본다는 방언을 했다. 그런데 불교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시끄럽게 공명한다. 어느 불교 아카데미 집단의 상징적 총수는 웃는 모습으로 세속법망에 구금되었다. 그리하여 제2의 불교탄압 운운이라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개인과 집단을 막론하고 올들어 유난히도 시끄럽게 불교에 관한 세속의 불협화음이 아직도 너무나 귀에 쟁쟁하다.
유마거사의 침묵이 이렇게도 절실하게 그리울 수가 없다. 빈 독의 공명들보다는 유마의 천근같은 침묵이 그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인의 바다에 유마의 방을 설하고 마음대로 방언을 해보라는 주문이다.
주문에 응한 내가 잘못이다. 아무래도 유마의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을 테니까 나도 또 소음을 더할 테니까 본시 아무것도 보일 것 없이 산에 사는 사람임[無見山人]을 자처하고 책갈피마다 어떤 견해로부터 자유로우노라는 무견장서인(無見藏書印)을 찍는 터에 무슨 뾰족한 견해가 있을 리 없다. 어쩌다가 불교와 인연이 있어 불교철학을 강의하는 강단의 말석을 차지한 죄로 이 무거운 글 빚을 졌는가 생각할수록 망양지탄(亡羊之歎)이 앞선다.

2. 시도 때도 없이 학생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굳이 어느 때 어느 곳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들이다. 물론 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한 질문이다. 무견산인은 마치 제가 무슨 유마거사가 된 양허공에서 때와 곳을 가리지 않은 채 이렇게 無時放談한다.

(시공낼 초월한 무시방담을 독자시여 용서하시라. 때와 곳에 묶인 이야기도 시끄럽던 세상에 혹시 무시방담 덕에 시원한 청량감을 맛볼 수 있을지 누가 알랴. 잠시 시공을 넘어서자. 유마의 침묵에는 비킬 수 없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음미하는. 무시간과 무공간을 지어내자. 마침 가을달이 휘영청 밝다. 초가삼간 둘러내고 맑은 바람, 반가운 친구 모셔오자. 마음의 거울에 가만히 시선을 모으면 맘은 빛이 스스로 흘러나온다. 그윽한 목소리가 마음을 두드릴 때 막혔던 응어리가 녹아 내린다. ‘淵凝靈鏡 淸照自然 玄音鼓心 滯情農朋’ 연구실 한 모퉁이에 걸려 있는 정종원 노사님의 글귀를 가만히 음미하면서 나는 언제나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탄식한다. )

3. 학생 질문: “세상만사는 늘 변하는 것이다”라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설파하신 점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제행개고(諸行皆苦) 모두가 고통뿐이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셨는지요?
무견방담 : 다행입니다. 만사가 변화 속에 그러니까 시간 속에 있다는 도리를 이해하신다니 말입니다. 영원불멸의 영혼이 실재한다고 믿는 분들에게는 제행무상의 도리가 더욱 깨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학생은 이미 제행무상을 받아들이신다니 제행개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고가 한갓 육체적 아픔을 뜻하지 않는 줄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선 첫단계로 부처님께서 예시한 고의 가짓수를 열거해 보겠습니다.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고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자라고 늙어 병들어 죽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네 마디 生, 老, 病, 死를 모두 고라고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물건과 함께하기가 고통입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나 사물과 곧 헤어지는 것도 고통입니다. 흡족하게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지닌 것도 고통입니다.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고통, ꡐ이제야 내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덧없이 내꺼, 네꺼가 모두 사라짐을 보는 고통)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모두 고입니다. 소위 인생팔고는 이렇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결국 움직이고 변화하는 세상만사를 때 마음대로 하려는 아집과 애착에 연유하여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항상 고통으로 물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 곧 고행의 바다라는 말이 이렇게 해서 생겼나 봅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씀이 부처님의 설법이라고 해서 반드시 옳다고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아니, 단순히 위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시면 의심이 솟구칠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면 인생에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아들 없던 오대 독자 집에 아들이 태어남은 고통이 아니라 행복과 축복입니다. 늙어 죽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나 자람이 있습니다. 인생은 보는 각도에 따라 고통과 환희가 교차합니다. 물론 몇 가지 욕망이 충족되기도 합니다. 실망과 좌절이 있는가 하면 희망과 성취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행개고는 낙천론에 반대되는 염세관을 뜻한다고 간단히 치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은 진리의 반쪽만 설파하신 폭입니디. 단순한 고통의 나열을 듣고 부처님의 신의를 파악했노라. 불교란 염세주의다라고 치부하실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진의는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보시오.” 이것이 학생이 제게 던진 질문의 요지라고 생각합니다. 여지껏 제가 드린 설명쯤은 누구나 이해하실 내용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그 정도의 염세관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본의는 인생에 관련된, 보다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불완전성을 지적한 것이라 보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완벽하게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대장을 제외하곤 말입니다. 우리는 술어인 무상과 개고에만 정신을 팔고 그 주어에는 미처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포대기에 싸서 전청판단(全稱判斷)으로 세상만사가 모두 무상이며 고에 가득한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어는 분명히 모든 行이라고 했습니다. 불교에서 만물을 나타내는 말에 行또는 法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 세상만물의 세 가지 특징 즉 삼법인(三法印)을 기술한「법구경」을 한문역과 한글역으로 보겠습니다.

一切行無常 如慧所觀察 若能覺此苦 行道淨其跡
一切覆行苦 如慧之所見 若能覺此苦 行道淨其跡
一切行無我 如慧之所見 若能覺此苦 行道浮其跡
‘모든 것은 덧없다’고 지혜의 눈으로 이 이치를 볼 때, 괴로움을 싫어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고 지혜의 눈으로 이 이치를 볼 때, 괴로움을 싫어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고 지혜의 눈으로 이 이치를 볼 때, 괴로움을 싫어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어느 분은 위의 귀절들을 또 이렇게 옮겼습니다.

‘모든 지어진 것은 덧없는 것이다.’ 이렇게 지혜로써 깨달은 사람은, 괴로움을 진실로 느끼지 않아 일마다 그 자취를 깨끗이한다.
‘모든 지어진 것은 괴로움이다’……
‘모든 지어진 것은 실체가 없다’……

그러나 팔리어로 된 이 원전을 보면 얼추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겠습니다.

‘사람의 作僞가 모두 無常하다’ 이렇게 지혜로써 보면 만사가 苦뿐임을 느낄지니, 이것이 곧 깨끗함에 이르는 길이다.
‘사람의 작위란 완전한 게 없다’……
‘일체의 현상에는 실체라 할 게 없다’……

중국의 번역사들이 一切를 行 곧 인간의 작위, 다시 말해, ‘지어진 것’으로 새겼습니다만 실체가 없는 것은 온갖 현상[法]에 적용되는 반면, 無常과 苦는오직 一切의 行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심지어 다른 판본의「법구경」에는 ‘一切行空’ 그리고 ‘一切行苦’로 줄어져 ‘一切法’과 ‘一切行’의 미묘하고 중대한 차이를 전혀 무시해 버린 사례도 있습니다. 行과 法을 마치 똑같은 것으로 잘못 본 것도 중국인의 크나큰 잘못이지만(아니, 중국인뿐만 아니라 이미 인도인 Yasomitra도 그렇게 잘못 보았습니다), 한글역에는 行을 심지어 보통 인간의 ‘행실’ 정도로 새겼는가 하면, 바로 위의 번역처럼 그저 ‘것’ 또는 ‘지어진 것’쯤으로 새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은 분명히 무상과 고는 일체의 행이요, 일체의 법은 무아라는 팔리어 원전을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엄연히 무상과 고가 수식하는 주어 행과, 무아가 수식하는 법이 다릅니다. 문제는 무엇이 行인가를 곰곰 생각해 보아야 불교가 무조건 염세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행이라는 전문적 불교 용어에는 다섯 가지 용법이 있습니다. 1) 색수상행식 오온의 하나로 행동의 경향성(버릇) 내지 기질 비슷한 것, 2)十二支緣 가운데 하나로 이 生死의 세상에 거듭거듭 태어나는 원동력으로써 무명으로부터 生起하는 것, 3)身口意 三業외 결과 축적된 습관 또는 버릇,4) 따라서 모든 인위적 행동의 동기 또는 미래를 계획하고 의욕하는 모든 의지력, 5)결국 인간의 기질, 욕망, 의욕에 의해 규정되고 빚어진 모든 현상 즉 궁성, 연못, 정원 나아가 인류문명의 발자취 전부. 결국 자연현상을 때어놓고 무상한 인위적 조작 전체가 행 속에 포섭되어 있습니다. 그런 행이야말로 영원불변하지 못하고 무상하다는 것이요, 그렇게 무상한 인위에 정신이 팔려 영원 불멸하다고 잘못 생각하다가 그것이 무상인 줄을 알고서도 안타까이 집착하는 데에서 필연적으로 고가 따르는 것입니다. 고는 제행 즉 인간의 탐진치가 부착된 현상에 따라 다니는 특징입니다. 일체법은 낳고 죽는[生滅] 것이 객관적 도리인데, 그 중에서 인간이 감정과 의지의 물감을 들여 행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영원하다고 믿었으니 고통이 따를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사물을 보면 지혜의 눈으로써 본다면 고동을 덜고 깨끗함에 이른다 했으니 그것은 어떤 이치입니까?
아,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유마의 방도 문을 닫아야 할 시간인가 봅니다. 보는 지혜를 말하는 지혜로 바꾸다보니 말만 걸어지고 지혜는 덮이는군요. 예전에 깨친 분들의 노래 가운데서 한 수를 뽑아 읊어드립니다.

향기와 꽃에 감싸여/매혹적 옷에 휘감겨
소리에 장단 맞추어/춤추듯 걷는 여인아!
도회로 걸어 들어간/탁발승 앞에 나타나
눈부신 유혹의 입술/춤추듯 다가왔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모두가 고풍이란 것
불현듯 진실을 보니/세상에 재미가 없네.
내 마음 자유롭도다./보라! 진리의 법을!
세 가지 지혜를 얻어/부처님 말씀 이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