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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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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등불을 이어온 이 땅의 스님들 - 편집실 1989년 10월 92호
원광대사는 신라 진평왕 때의 스님이다. 스님의 가계(家系)는 본래 진한(辰韓)의 귀족으로 속성은 박씨였다. 일찍부터 유학(儒學)과 노장(老莊)의 사장을 섭렵하였고 또한 학문을 사랑하여 글읽기를 즐겼다.
그밖에도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과 사기(史記)에도 정통하여 삼한에서 일찍이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그 무렵 선진 문명국이었던 중국의 폭넓은 학문에는 미치지 못하므로 드디어 친구들과 작별하고 중국으로 유학하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배를 타고 금릉(金陵)으로 가니 그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스님은 중국의 진(陳)나라에 도착하여 천하를 다니면서 두루 선각(先覺)에게 묻고 열심히 배웠다. 그러다 차츰 불교에 이끌리어 동진(東陳)시대에 건립된 사원으로서 양(梁)나라 때부터 성실론(成實論)의 본거지가 되어 온 장엄사(莊嚴寺)에서 그 무렵 성실론의 대가 승민(僧旻)대사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처음부터 학문적인 바탕이 있던 스님인지라 불교의 깊은 이치를 만나자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듯 하였다. 스님은 불교의 진리를 깨닫자 이전의 학문이란 불교에 비하면 한낱 지푸라기와 같아 여겨졌다. 그리하여 진나라 임금에게 승려 될 것을 청하매 곧 칙령으로 허락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스님은 본격적으로 불교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성실(成實), 열반을 공부하는 한편 삼장(三藏)과 석론(釋論)을 두루 연구하였으며,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선정 또한 열심히 닦았다. 그리하여 모든 밖의 인사(人事)를 단절하고 성인(聖人)의 자취를 두루 유람하면서 생각을 부처님께만 두고 영원히 속세를 사절했다.
원광대사의 높은 이름은 승속을 막론하고 널리 퍼져, 가시밭을 헤치며 바랑을 매고 찾아오는 사람이 마치 고기 비늘처럼 잇달았다. 뒤에 진나라는 수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스님의 명망(名望)은 여전하였다.
한편 스님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신라에서는 스님의 귀국을 여러 차례 수나라 황실에 간청하였고, 마침내 스님은 서기 600년 진평왕 22딴에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로 돌아온 스님은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화랑의 세속오계는 유명한데, 벽화이야기 등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생략하겠다.
스님은 황룡사에 계셨으며 서기 636년에 단정히 앉아 돌아가셨다. 그의 나이 99세 되는 해였다. 장례는 마치 왕의 장례와 같이 융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