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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항쟁, 그 뒤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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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1990년 06월 100호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뿔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해마다 오월은 다시 오고
겨우내 얼어불었던 이 땅에 봄이 오면
소리없이 스러졌던 영혼들이
흰 빛 꽃잎이 되어
우리네 가슴 속에 또 하나의
목련을 피우는 것을

그것은
기쁨처럼 환한 아침을 열던
설레임의 꽃이 아니요
오월의 슬픈 함성으로
한닢 한닢 떨어져
우리들의 가슴을 아픔으로 피어나는
순결한 꽃인 것을

눈부신 흰 빛으로 다시 피어
살아 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는
우리들 오월의 꽃이
아직도 애처러운 눈빛을 하는데
한낱 목련이 진들
무에 그리 슬프랴

박용주의 ‘목련이 진들’이라는 시다. 73년 광주에서 태어난 박용주는 88년 4월에 이 시를 지었다. 열여섯살로 중학교 2학년생일 때이다.
“힘든 생활에서 오는 고단함,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나라에서 꼴찌로 사는 소외감, 까닭없이 슬픈 가을바람, 그리고 여러 이웃중에 더러는 가슴아픈 이웃의 이야기를 듣고 우울해질 때 나는 글을 써보았습니다. 그저 눈물로 맺혀오는 이야기를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무엇엔가 하소연하고 싶었습니다.”
열일곱살 용주가 하는 말이다. 무엇이 이 아이를 ‘아이’일 수 없게 만들었을까.

맺힌 힌, 응어리진 가슴
“80년 5월 광주, 당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에서 갖가지 참극을 겪은 사람들을 비롯해 자신이 직접 보고 느꼈던 사실들이 엄청나게 왜곡되고 ‘폭도’로 몰려야 했던 광주시민과 피해자들은 그 충격으로 적지 않은 사람이 정신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광주와 전남의 시민, 도민들은 5월만 되면 집단적 충격의 후유증으로 ‘5월 증후군’을 나타낸다. 그들은 우울해지고 답답해하며 ‘살아 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 또 정치 및 사회의 외적 상황이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시키거나 시민들은 슬픔, 분노의 감정을 어루만져 주기보다는 물질적인 보상으로만 덮어버리려 하고 있기에, 군부독재를 극복하려 한 시민들의 민주화노력은 심한 좌절감과 무력감에 빠져들고 만다. 시민들은 우리들만이 왜 이런 피해를 입어야 하느냐는 원망과 허무감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동시적 경험에 의해 그들은 개인적 정신장애 외에 강한 집단동조의식으로 발전하게 되고 바로 그것은 권력에 대한부정, 자기집단에 대한 긍정으로 나타나고 있다.”(전남대 오수성 교수의 ‘광주민중항쟁과 심리적 충격’연구에서)
5.18당시 대불련 전남지부장으로서 항쟁에 참여, 5월 27일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한 고 김동수 법우의 아버님 김병석 씨와 그의 자녀들도 비슷한 형편이다.
‘폭도들의 난동’이니 ‘사태’ 따위로 불리던 광주민중항쟁이 ‘의거’라거나 ‘민주화운동’으로 성격전환( ? )을 한 최근 이삼년이 더 힘들었다는 것이 김영석 씨의 말이다. “칠년 동안의 잦은 가택연금, 행적 추적 속에서 살다보니 87년 6.29 때는 해방보다 더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달라진 것은 거의 없으니, 결국 정치인 특히 정부가 가슴 아픈 유가족이나 부상자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조롱만 하고 있는 셈입니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광주특별법이 여야간의 팽팽한 대립으로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상태에서 최근 정부가 ‘대통령이 특별히 생각해서 지원자에 한해 삼천 만원까지 차용해 준다’고 선심쓰듯 하는 태도를 짓는 것에서 몹시 분노를 느낀다. “개가 죽어도 개 값을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하물며 사람이 죽고 칠년간 탄압하고 삼년간 조롱해 놓고 특별히 생각해서 차용…”하면서 말문을 다 잇지 못하는 김동석 씨. 게다가 동수는 아직도 법으로는 ‘폭도’로 되어 있는 채 그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는데 돈 몇 푼으로 무마하려는 처사에 할 말을 잊는다. 지금 그의 슬하에는 오남매가 있다. 그러나 그 때 그 충격과 후유증으로 순탄한 성장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과 형편, 심경 속에서 살다보니 술을 가까이하게 되었고, 또 그러다 보니 체중이 10킬로그램도 더 빠진 깡마른 몸에 이제 쉰여덟의 나이가 열살은 더 늙어 보인다. 1미터 70세티의 작지 않은 키이건만 형편없이 왜소해 보이는 김영석 씨의 얼굴에서 과연 언제고 환한 웃음을 볼 수 있을까.

진상규명만이 진정한 명예회복
올해로 광주항쟁 열돌을 맞았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특집을 제작하여 보도하고 방송하였다. 광주에서는 연일 집회와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그 아픈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소식이나 증후는 보이지 않는다. 올해 들어 3당 합당으로 더욱 오만해진 정부 여당의 태도로 보아, 그나마 정치권에서의 타협 종결선언도 실종될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잘못된 것이기에 제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되면 광주 문제는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셈이다. 그래서 세간 사람들 사이에는 5공의 탯줄에서 태어난 6공이 광주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지적이 새삼 광범위하게 제기되어 설득력 있게 퍼진 상태이다. 비록 6월 임시국회에서 정부 여당의 의도대로 몇 푼의 보상으로 마무리짓는다 할지라도 이에 수긍할 국민은 매우 적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엄청난 사건의 발포 명령자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행방불명자의 암매장 의혹도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404명이 내란죄의 멍에에 걸려 있으며, 고 김동수 법우 등은 폭도로 기록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정부는 ‘양비론(兩非論)’, ‘양시론(兩是論)’의 입장에서 일정한 보상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짓고, 기념사업 등은 법의 제정으로써가 아니라 일선 행정에서 지원하겠다고 한다. 정부 발표만으로도 당시 약 200명이 죽었고, 그때 그 부상의 후유증으로 죽는 이가 지금도 계속 있으며, 감옥소 갔다 오고 부상당하고 한 이와 그의 가족, 친지를 합하면, 그 일로 고통받고 피해를 입은 이는 헤아릴 수도 없는 이런 상황에서.
당시 스님으로서 항쟁에 참여하여 민간 적십자 대원으로 활동한 이광영 씨(진각스님, 5.18 당시 계엄군의 총에 맞아 하반신 불구가 됨)는 정부 여당의 양비론, 양시론은 그 자체가 불합리한 논리라고 일축한다.‘5.18 뒤 군인은 훈장도 받은 이가 꽤 있지만, 광주시민은 받은 이가 없다. 또 5.18로 광주시민은 수천명이 연행되고 수백명이 감옥에 가는 등의 처벌을 받았지만, 군인이 처벌 받았다는 말은 못 들었다. 이것이 어찌 양비론, 양시론이란 말인가.”
정부(계엄군)와 시민(시위대) 양쪽 모두가 잘못되었다거나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에 따른다 하여도 훈장을 받으면 양쪽이 다 받고, 처벌을 받더라도 양쪽이 함께 받아야 이치에 맞다는 주장인 것이다.
보상과 배상의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 계엄군의 발포와 학살은 정당했다는 논리를 깔고 있는 ‘보상’과 잘못 되었다고 보는 ‘배상’은 단어의 차이만 아니라 그 의미에 있어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엄청난 시각차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광영 씨는‘10년도 참아 왔다. 성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은 역사 속에서 규명되고 정리되어야 하며 꼭 배상을 쟁취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또 그는 ‘배상과’ 기념사업의 전제조건인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미국 문제의 규명이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화합과 치유가 가능하다”고 이어서 말한다.
광주시민과 대부분의 국민은 명확한 진상규명과 광주시민의 명예 회복을 원하는 것이지, 몇 푼의 돈 지급이 급한 것이 아님을 정부 여당은 알아야 한다.

‘자비의 불교’에서 자비가 없다면
진각스님은 부상당하고 1년 5개월쯤을 병원에서 보냈다. 그런데 그 동만 스님을 찾아온 불교인은 항쟁에 같이 참여하고 절친한 도반이었던 성연스님 등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종단·문중·신도단체 등 어디에서도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위문차로든 방문이 없었다. 오히려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들로부터 위문도 받고 심지어 타종교인의 도움을 얻었다고 한다. 결국 하반신 불구가 되어 성직자, 구도자로서의 길을 포기해야 했다. 그 무렵 그가 겪은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여서, 몇 차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초파일 준비로 광주 시장에 나왔다가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승려로서의 양심’ 때문에 참여했던 광주항쟁의 대가로서 그는 영광의 상처만 안은 채 불교 집안에서는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 학살의 최고 책임자요, 정권 탈취를 위해 하극상을 감행하고 온갖 부정과 비리의 주범으로 지목된 전두환 씨 부부가 갈 곳이 없을 때, 많은 불교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담사를 내어주고 총무원장을 비롯한 수많은 교계 지도자( ? )들이 백담사 가는 길이 마르고 앓도록 내왕하는 자비를 베풀면서, 어렵고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자비는 커녕 내 식구 하나 챙겨 주지 못한 불교가 쇠락한 권력에 아부하는 꼴은 더 이상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뜻있는 이들의 말이다. 김영석씨도 이렇게 한탄했다. “한 때는 동수 위패 하나 둘 곳이 없는 불교 현실이 서운했었다”고.
광주민중항쟁 열돌을 보내는 오늘의 이 시점에서 확실한 진상 규명과 그의 치유는, 광주학살로부터 힘을 얻은 현재의 지배세력의 물러남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아울러 현재 불교 풍토와 같은 몰이해가 극복될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자비의 불패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위한 진정한 자비를 잃어가는 것에 커다란 우려를 금치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