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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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에세이 - 이 자비행
1985년 12월 46호
바람에 떨어져 나딩구는 낙엽처럼 그렇게 늙어간다는 어느 여류작가의 글을 보고 공연히 거센 체 악한 체 세월만 잡아먹고 살아온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아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흔히 말하는 인생이 이렇듯 고달프고 후회스러운 기억들로만 남아야 된다면 난 그 오랜 세월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하는 자책과 회의 속에서 뒤이어 다가올 좌절을 버릴 수가 없다.
열심히, 그리고 지극히 평범하게 살고 있던 나의 삶이 한낱 어릿광대 놀음에나 열중하다 우연히 마주친 맑은 거울 앞에서 「결코 이것은 아니였노라」고 외치고픈 충동을 어찌하랴!
솔직하다는 것, 어쩌면 가장 부럽고 탐나는 이 단어를 나는 한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다. 항상 평범하고 상식적이어야 한다는 잠재된 교훈이 무거운 강박감으로 나를 짓눌러 왔다. 또 그래야만 가장 잘사는 삶인 줄 알았기에 애써 고통을 감추면서 그렇게 길들이고 또 길들여져 온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이 교훈이 권태롭고 너무나 두터운 자기 상실과 모순, 위선 따위를 동반해야 한다는데서 쌓이는 이율배반과 공허는 유령처럼 떠다니는 구멍을 안겨준다. 그리고 잡을 수 없어 버리지 못하는 그 구멍에 대해 더욱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걸 의식하며 공연히 반항같은 아픔을 느낀다. 현실과의 타협, 하찮은 자존심을 살려야 하고, 모순된 논리에도 맞장구질 하며 무던히도 열심히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내겐 어울리지 않는 야외복 마냥 눈물이 나도록 우스꽝스러운 자신을 어찌 진정 나라 하겠는가 알맹이는 들킬세라 감추어 두고 껍데기만 허적허적 살아온 나.
마음을 통해오는 한 찰라적인 순간을 위하여 기꺼이 나를 버려도 좋노라던 그 무늬 맑던 염원은 간곳 없고 거치레에만 연연하는 무리들 속의 내 한 점 텅 빈 머리 속에 무엇을 채울까는 잊은지 이미 오래다. 눈에 보이는 안락함에 눈은 멀고 가난한 영혼은 팽개쳐 버린채 내 내면의 삶은 그렇게 해서 매말라만 가는가?
젊은 날의 기억들이 아스라하다. 무언가에 열중하며 「버지니아 울프」를 읊조리든 시절, 밤 새워 문학•철학을 논하며 빈약한 가슴을 살찌우던 보석 같은 날들, 소박한 한송이 꽃을 피우기 위하여 고뇌하고 차(茶)빛으로 얼굴 익던 고전적 모습들, 결코 관념의 노예는 되지 말자던 그 모습은 새로운 것을 위한 태동의 몸짓이었던 것을…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어 묻혀버린 지금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움이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어 순간순간 내 의식의 밑바닥을 맴돌고 있다.
먼 곳에의 그리움, 분별과 사려와 결단만이 나의 벗이노라. 온갖 꿈이여 낭만이여 물러가라 고 외치고픈 이 절박함, 그러나 그 외침 뒤에 숨겨진 무한정의 외로움이 있다. 늘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에 목말라 하며 그래도 버리지 못하는 그리움과 안타까운 삶에의 갈등은 모양할 수 없는 공허가 된다.
지금은 상실만 남은 삭막한 도시의 한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옛 친구를 본다. 어느 사이 무수히 내려앉은 무서리에서 피곤하게 살아온 내 자신을 본다.
지난날보다 짧게 남은 시간들, 표정없는 화려함 보다 사고하는 고민을 갖고 싶다.
잠든 종자가 눈을 뜰때 내 피안의 언어도 날개치리라.
어느 지층에 쌓여 있다가 돌아온 토속의 흙내음를 맡으며 비옥한 땅을, 새로운 의미를 수확할 수 있다면 난 그래도 녹 쓴 내 마음의 거울을 닦을 수 있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