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차와 「해인」을 만나면서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손자원 1985년 12월 46호
1985년, 한 해의 끝자락을 딛고 서서 지나간 시간 속의 영상들을 거두어 본다. 졸업과 더불어 새로운 형태로 만난 각양 각색의 많은 사람들과 일들, 좌망(坐忘)하면 인생이란 객관(客館)같다는 선인의 싯귀처럼 속절없는 인생이라 해도 어찌 이 만남들이 내게 소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인연 속에서도 무엇보다 귀중한 만남이 있었다면 그것은 앞으로 나의 삶을 풍요하고도 겸손하게 다듬어 줄 것 같은 틀림없는 예감과 더불어 만난 차(茶)와 「해인」이었다.
9월 어느 날 나는 처음 차를 접하게 되었다. 주위에 일찌기 녹차를 하던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내게 차를 권할 이 역시 있었을리 만무하건만 스스로 다례(茶禮) 배우기를 청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얼마 후 거리에서 “선다원”의 개원을 알리는 팜플렛을 보게 되어 약도를 들고 어렵게 선다원을 찾았다. 거기서 「해인」을 만났다. 말씀의 숲, 여덟 편의 시는 내게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당시 나를 잡아매던 여러가지 이념들 한 울타리 속에 있을 땐 비슷 비슷한 빛깔을 가졌다고 생각된 여러 친우들이 이제 일제히 밖으로 쏟아져 나와서는 서둘러 저 만의 빛깔을 만들어 그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또 나는 제 빛을 가려 내지도 못한 채 언제까지나 제 자리에서 망설이고만 있어 “넌 기차를 타지만 역에서 떠나지 않는 기차만을 택하지”라는 사르트르의 비양거림에 늘상 몸을 움추리고는 자신에 대한 불신과 자책 등 갖은 상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내게 「해인」의 말씀은 내가 내 안에서 그 출구를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이후 나는 틈틈히 선다원을 찾았다. 그곳은 한여름 벗과 함께 찾아 갔던 해인사의 자비에 넘친 엄숙과 평온, 그리고 푸른 총림의 그늘을 한 자락 잘라내어 대구 시내의 한 가운데에 조그맣게 펴놓은 듯 했다. 짙은 갈색의 마루에는 검소한 회색의 방석, 정갈한 차상이 언제나 마련되어 있어 때로 들러서 흰 빛이 고운 찻잔에 맑고 푸른 차를 다려 마시노라면 어느새 마음은 가야산 산사에 머문다. 어느날엔가 함께 차를 나누던 불자가 나의 이러한 차와「해인」과 선다원의 만남을 듣고는 전생의 인연이라 말하였다. 가슴에 스미는 말이었다. 이는 어쩌면 겁 (행)을 지난 해후일런지도 모른다. 나는 해인과 선다원에서 만난 친우와 조그만 입문서(入門書)를 통하여 이제서야 겨우 부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 몽매한 중생이나 다실에 앉아 조용히 차를 대하노라면 가라앉은 마음속에 아직은 그 향방을 모르나 지금의 나로부터 개방되고 성장하여 나아갈 출구가 조금씩 조금씩 열리고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