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세 가지 수레
불타는 집 속에서 놀이에 미친 나머지 아무리 타일러도 나오려 안하는 아들들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로 찢겨졌을 것이 예상되나, 그런 중에서도 어떻게든 구해내기는 구해내야 될 일이매, 마침내 방편을 쓰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하여 그들을 향해 외
쳤다.
“너희들이 가지고 놀 이 노리개는 희유(希有)하여 좀체 얻기 어려운 것들이니, 만약 지금 안 가지면 뒤에 가 반드시 뉘우치리라. 이런 갖가지 양거(羊車)·녹거(鹿車)·우거(牛車)가 이제 문밖에 있어 가지고 놀 만하니, 너희들은 불붙은 이 집에서 어서 나오라. 너희들의 뜻대로 무엇이나 주리로다.”
그러자 아들들은 “아비가 말하는 노리개의 얘기 듣고 마음에 드는지라, 각기 재빨리 서로 밀치며 함께 내달려” 밖으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문밖에 서서 그렇게 외쳐대도 마이동풍으로 흘려버리던 그들이, 양거·녹거·우거를 주겠다는 말에는 앞을 다투어 문 밖으로 뛰쳐나왔으니, 위대한 것은 방편의 힘이다. 이는 중생의 자질의 어떠함과 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시는 처지에서, 그것에 맞추어 설하셨기에 거둘 수 있는 성과였던 것이니, 처음부터 자신의 절대적 깨달음에만 입각해 설하셨던들 어찌 불교가 성립이나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은 신라의 구산화상(龜山和尙)이다. 전등록에는 청원하(靑原下) 칠세(七世)인 장경선사(長慶禪師)의 제자인 것만으로 되어 있어 상세한 이력을 알 길이 없거니와, 거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규봉(圭峰)·황벽(黃壁) 같은 이의 문하에도 드나들어 선에도 일가견을 지니고 있었던 당대(唐代)의 재상 배휴(裵休)가 한번은 어느 절에 갔다가 경을 독송하고 있는 한 스님에게 물었다.
“무슨 경이오.”
“무언동자경(無言童子經)입니다.”
“그것은 몇 권으로 되어 있소.”
“두 권입니다.”
“무언(無言)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두 권일 수 있다는 것인가.”
과연 배상국(裵根國)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것에 걸맞는 날카로운 일격이었는데, 그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후일 이 말을 전해 들은 구산선사의 대어(代語)는 이러했다.
“무언을 논한다면 오직 두 권만은 아니리라(若論無言, 非唯兩卷).”
대어는 남을 대신해 대답하는 일이어서, 내가 그 사람이라면 이렇게 응수했을 것이라는 것인데, “무언을 놓고 말한다면야 어찌 두 권뿐이겠는가. 실로 무언에서는 무수한 권으로 이루어진 경들이 끝도 없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라”고, 반격을 가했어야 옳았다는 것이 그 말의 내용이다. 언어가 끊어지는 자리를 진리의 체(體)라 한다면, 무궁한 언설(言說)이 그것으로부터 전개됨은 진리의 용(用)이니, 세 가지 수레를 들어 유인한 방편이 없으셨다면 부처님의 진실이 어떻게 진실일 수 있었겠는가.
그러면 양거·녹거·우거가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들은 성문승·연각승·보살승에 해당하고, 또 그렇게 보는 것이 방편품의 취지와도 어울리니, 중생들에게는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기에 그동안 삼승을 설해 생사에서 벗어나도록 유인해 오신 것이 된다. 여기에서 기준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의 자질(근기)이었고, 그렇게 자질에 맞추어 설하셨기에 교화가 성과를 거두실 수 있을 것이니, 삼승이 갈린 것은 처음부터 부처님 측에 이 세 가지 가르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 쪽의 자질에 그런 등차가 있었기 때문일 것은 말할 나위 없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삼승을 굳이 세 가지 수레(三車)에 비유하신 근거는 무엇인가 사람을 실어 먼 곳으로 운반하는 것이 수레고 보면, 그것이 깨달음의 세계로 중생을 실어나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유하기에 족할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거니와, 양과 사슴과 소에 대하여는 다시 점검이 필요하다. 양은 인가를 떠나 집단생활을 하면서 목자의 통제·밑에 움직인다. 그러므로 출가하여 승가를 구성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수행하는 생활을 하는 성문의 비유일 수 있다. 또 사슴은 산중에서 단독으로 살아가는 동물이라, 그것이 독선적 성자인 연각에 어울릴 것은 뻔한 일이다. 그리고 소는 인가에 살면서 논밭을 갈고 무거운 짐을 실어나르니, 이것은 보살에 잘 어울린다. 거기다가 양이나 사슴이 끄는 수레가 있다 해도, 이는 사람이나 짐을 실제로 실어나를 수는 없는 점에서 기실은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껏 제몸이나 건사할 뿐 남을 제도활 능력이 없는 소승의 성자와 흡사하다. 그러나 소가 끄는 수레는 여러 사람을 태우고 먼 데까지 갈 수 있는 점에서, 남들을 교화해 일체지(一切智)에 이르게 하는 보살승과 상통한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세 가지 수레가 얼마나 정교한 비유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ㅂ. 똑같이 나눠준 한 수레
불난 집으로부터 아들들이 무사히 나온 것을 본 아버지는 더없이 기뻐하는데, 그때 아들들은 아까 준다던 수레를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아버지는 어떻게 하였는가.
“사리불아. 그때 장자(長者) 아들들에 동일한 큰 수레 한 채씩을 주니, 그 수레 높고 넓되 중보(衆寶)로 치장하고, 둘레에 난간이요 사면에 방울이라. 다시 그 위 헌개( 蓋) 펴니 진기한 여러가지 보배로 치장하며…흰 소로 멍에 메우니, 살빛 깨끗하며 몸매 아리따와 큰 힘이 있으며, 걸음 고르며, 그 빠르기 바람 같거늘, 또 많은 종 있어 이를 시위하더니라.”
세 가지 수레를 줄 테니 나오라 해놓고, 막상 아들들이 불난 집에서 나옴에 미쳐서는 크다란 흰 소가 끄는 동일한 수레(一大白牛車)를 나누어 주었으니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동안 삼승을 설해 오시다가, 법화경에 오자 오직 일불승이 있을 뿐이라고 하신 것의 비유임은 말할 것도 없다. 개권현실(개삼현일)에 대하여는 앞에서 누누히 밝힌 바 있지만, 아들들의 기호에 맞추어 세 종류의 수레로 유인하였으나 처음부터 주고자 한 것은 일대백우거였으매, 진실에서 방편이 흘러나가고 방편은 다시 진실에 되돌아와서 진실과 방편이 다르
지 않음을 보임이니, 개권현실의 도리를 더없이 잘 나타낸 비유일씨 분명하다.
그리고 덧붙여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를 둘러싸고 있어온 삼거설(三車說)·사거설(四車說)이다. 삼거설이란 장자가 아들들에게 주겠다 약속했던 우거(牛車)와, 아들들이 집에서 나오고 난 뒤에 나누어준 백우거(白牛車)는 동일하다고 보는 해석이요, 사거설은 그 둘이 다르다고 보는 견해니, 삼거설에 서면 이전에 설하셨던 보살송이 바로 법화경의 일불승인 것이 되고, 사거설은 이전의 보살승과 법화경의 일불승은 다르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보살승은 성불을 추구하는 점에서 곧 불승(佛乘)이요, 또 그것이 대승의 뜻임은 말할 것도 없으므로 본래의 말뜻에 있어서는 셋이 같은 것이 되나, 법화경의 대승이 이전의 대승과 같으냐 다르냐 하는 것을 따라 삼거설 ·사거설이 갈린다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어느 것을 옳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전의 대승은 소승에 대해 자기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대승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대립이 남는 대승이므로 상대적임을 면치 못하니,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 앞에 선다면 스스로 소승의 자라로 전락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에 비해 법화경에서 표방하는 일불승을 대승이라 할 때, 에 대승은 소승·대승의 대립을 없애서 오직 대승만이 있는 것, 바꾸어 말하면 소승까지도 개권현실에 의해 유일절대의 대승 속에 거두어서 일불승이게 하는 대승이다. 따라서 모두가 대승이요, 있는 것이라곤 대승밖에 없는 터이므로 더 이상 대립이 남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입장에서는 이전의 것은 방편의 대승(權大乘)이었고, 법화경의 그것만이 진실의 대승(實大乘)이라는 말이 되는 바, 천태대사가 삼거설을 물리치고 사거설을 주장하고 나섰던 근거가 여기에 있다. 어떤 선객이 나타나 한 획은 길게 긋고 세 획은 짧게 긋고 나서, “하나는 길고 셋은 짧다”는 말을 쓰지 말고 표현해 보라고 하자, 마조(馬祖)는 함 획을 그은 다음에 “짧으냐 기냐”고 반문한 일이 있다하거니와, 한 선(線)이 길고 짧음을 초월하듯 일불승의 ‘하나’는 온갖 분별을 떠난 하나며, 법화경을 대승이라 할 때의 대(大)는 대소를 초월하여 비교할 것이 끊어진 ‘대’였던 것이니, 사거설이야말로 법화경의 성격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