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승림의 ‘외로운 이 돕는 장자의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만일 일부러 짓는 업(業)이 있으면 나는 반드시 현세에 받거나 후세에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아니면 반드시 그 갚음을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 몸으로 짓는 세가지 업이 있으니 그것은 착하지 못해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한다. 다시 입과 뜻에도 세가지 업이 있으니 그것은 착하지 못해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한다.
이떤 것이 몸으로 일부러 짓는 세가지 업으로서 착하지 못해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하는 것인가. 산 목숨을 죽이는 것(殺生), 남이 주지 않는 물건을 갖는 것(不與取), 삿된 음행(邪婬), 이 세가지가 몸으로 일부러 짓는 세가지 업이니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하는 것이다.
또 입으로 짓는 네가지 착하지 못한 업은 거짓말(妄言) 이간하는 말(兩舌) 욕하는 말(惡口) 꾸며대는 말(綺語)이니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한다. 다시 뜻으로 짓는 세가지 착하지 못한 업은 탐내는 것(貪) 미워하고 성내는 것 삿되고 어리석은 소견(邪見)이니 삿된 소견에 떨어진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시할 필요도 없으며 선과 악의 업도 없고 업의 갚음도 없고 이 세상과 저 세상도 없다. 그리고 스스로 알고 깨달아 증득하는 열반의 법도 없다’
그러나 많이 들은 거룩한 제자(多聞聖弟子)는 몸과 입과 뜻의 착하지 않은 업을 버리고 몸과 입과 뜻의 착한 업을 닦는다. 저 많이 들은 거룩한 제자는 이와 같이 정진(精進)의 계덕(戒德)을 갖추어 몸의 깨끗한 업을 성취하고 입과 뜻의 깨끗한 업을 성취한다. 그는 성냄을 떠나고 다툼을 여의며 잠을 없앤다. 날뛰는 마음과 의심을 끊으며, 거만을 버리어 바른 생각과 지혜로 모든 어리석음이 없다.
그의 마음은 크나큰 사랑(慈)과 함께 하여 일방(一方)에 두루 가득 성취하여 노닌다. 이와같이 이•삼•사방과 사유(維)와 온누리 일체에 두루한다. 그 마음은 사랑(慈)과 함께하므로 맺음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다. 극히 넓고 매우 크며 한량없이 잘 닦아 일체 세간에 두루 가득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본래 이러한 마음이 적어서 잘 닦지 않았으나 이제 이 마음이 한량없고 끝이 없으므로 잘 닦아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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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슬피여기는 마음(悲), 기뻐하는 마음(喜), 평등한 마음(捨)과 함께 하면 맺음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어서 지극히 넓고 매우 크며 한량없이 잘닦아 일체 세상에 두루 가득 성취하여 노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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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남자나 여자나 집에 있거나(在家) 집을 떠나거나(出家) 네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熹心)의 해탈을 닦으면 이몸을 가지고 저 세상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을 따라 이곳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이렇게 생각하라. ‘나는 원래 방일하여 착하지 않은 업을 지었다. 이 온갖 것은 지금 그 갚음을 받아야 하는 것이요 끝내 뒤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와같이 네가지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을 향하여 닦아가면 그는 반드시 아나함을 얻고 다시 그 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중아함경 권3)
(해 설)
1. 업 (業)의 창조적 의미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쓰고 있는 불교용어 가운데 가장 잘못 이해되어지고 있는 말의 하나가 업(業:karma)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흔히 업은 현재의 불행에 대한 비탄과 회한어린 감정 속에서 그리고 현실의 불완전함을 미래에서나 보상받으려는 기다림 속에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곧 전생의 업보(業報) 때문에 나의 현실이 이 모양 이 꼴이라고 푸념한다든가 지금 짓는 선업으로 오는 세상에나 좋은 과보를 받게 되리라고 바라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업을 부정적으로만 관찰하거나 확실하게 결정된 것으로만 받아들이려는 사고속에서는 현실을 개조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삶의 의지가 나을 수 없으며 선악의 대립으로 주어지는 업의 사슬을 풀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업에 관한 이러한 왜곡된 시각은 부처님 당시 기존사상계의 업설(業說)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부라만교에 의하면 인간생명은 부라만의 절대의지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운명은 부라만의 뜻에 의해 태어남과 더불어 규정지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부라흐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라고 하는 네가지 계급의 굴레를 인간은 운명적으로 감수해야만 하며 현세에 부라만에 바치는 공덕에 의해 오는 세상에서나 보다 나은 삶의 조건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부라만의 권위를 부정하고 나타난 새로운 사상가들 중 많은 이(예를 들면 자이나교)들은 업을 영혼의 밝음과 깨끗함을 더럽히는 부정적인 삶의 에너지, 물질 (pudgala) 척인 세력으로 파악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업의 오염된 물결이 영혼에 흘러 들어가지 못하도록 육체를 통제하고 육체에 심한 고통을 가함으로써 영혼의 밝음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불타는 이러한 기존의 업사상에 반대하여 업의 참된 의미가 변화와 자기창조, 자유와 도덕적 책임의 세계임을 밝혀 주었습니다. 불타에 의하면 업은 바로 행위로서 지어감(造作)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곧 세계와의 본질적인 관계속에서 몸으로나 입으로나 뜻으로(身•口•意) 어떤 옴직임을 일으킴으로써 자아와 세계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존채의 세력이 업인 것입니다.
그러나 업은 업을 일으키는 주체가 업 속에 따로 있고 업이 지향하는 객체가 업 밖에 나가 있는 실체로서의 업, 자기의 고유영역을 보존하고 있는 그러한 업이 아닌 것입니다.
업(Karma)이란 자아(我:Atman)가 자아가 아니므로(無我) 일어나는 자아와 세계가 상호교섭하는 생명의 흐름(無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업은 자아와 세계속에서 규정되어지지만 자아와 세계는 업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며 업을 통해서만 경험의 빛 속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즉 자아와 행위, 행위와 자아는 서로 앞뒤가 없이 한 때에 주어지는 것이니 우리가 말할 때, 말하는 주체가 말이라는 행위 밖에 따로 떨어져서 그 말을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말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표현되어지고 있는 자아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그루 매화(梅花)를 예를 틀어 말하면 매화라고 불리우는 꽃자체(体)와 매화의 꽃모습(相)과 매화의 향기와 빛깔, 꽃의 나부낌들(用) 중 어떤 하나의 것이 다른 것 앞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 따라 오는 것이며 동시에 주어지는 것(同時生起)과 같습니다.
이와같이 주체는 세계체험 속에서만 있어지는 주체이며 주체와 행위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므로 본경에서 말하고 있는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身•口•意三業)은 주관성으로서의 업이 아니라 의식-존재,주체-객체가 동시에 겹쳐지고 있는 경험의 장인 것입니다.
즉 업은 존재일반(一切 : 五蘊.十二處.十八界)의 상호교섭에 의해서 일어나지만 존재일반은 업을 통해서만 자신을 밝히고 자신을 이루어가는 것이니 부파불교의 논사(論師)들은 업을 통해 생성하는 존재일반의 모습을 업감연기(業感緣起)라는 이름으로 교리체계를 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업감연기설은 업이 주체-객체속에서 연기하므로 자성이 없고(無我) 자성이 없으므로 새롭게 연기한다(無常)는 불타 본래의 업사상과는 달리 업에 관한 주관적이고 실체적인 집착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이에 부파불교 논사들의 잘못된 사견을 깨뜨려서 부처님의 본래적인 업사상을 밝혀낸 것이 대승불교인 것입니다.
중관불교(中觀佛敎)는 업이 주관-객관 의식-존재 속에서 필연적으로 규정되어 나오지만 업의 필연성은 필연이 필연 자체를 스스로 부정해 버리는 선험적 터천(業性)에서 새롭게 규정되어 나오는 필연(業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는 본질적인 자유속(本覺)에서 생성되어가는 행위인 것이니 업에 있어서 업을 짓는 주체와 업 그 자체와 업의 갚음을 받는 주체는 실체적으로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경에서 현재 짓는 없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 그 갚음을 받는다고 한 것을 실재론자들은 잘못 이해하여 업종자의 알맹이가 마음속에 담겨 있다 밖의 경계를 만나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견을 깨뜨리기 위해 유식불교(唯識佛敎)는 업의 현실태(現行)와 가능태(種子), 업의 보편성(제8 아뢰야식)과 특수성(전6식)이 상호규정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업을 일으키는 주체(六根)-객체(六境)는 독립된 자성이 없이 서로 서로 의지해 있으므로 주체와 객체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면서 둘입니다(一而異) 유식불교는 이와같이 주체와 객체가 단절되지 않고 서로 교환되는 전체성의 장, 경험의 열려진 원본을 제8아뢰야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8아뢰야식 곧 서로 교환되는 주체(根)와 객체(境)가 겹쳐져서 개체의 특수한 업(六識)이 일어나는 것이니 업에 있어 전체성과 개체성 특수와 보편은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영역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업의 현실태는 제8식의 자기부정의 터전 속에 갈무리된 가능태의 씨앗을 움직이고(現行薰種子) 8식 바다에 약동하는 가능태의 생명수는 현실태로 출렁이는 업의 물결을 일으켜서 역동적인 상호규정의 운동을 계속하는 것입니다(恒轉如瀑流:唯識 頌) 그러므로 지금의 업과 다음의 업, 원인과 결과, 업을 지음과 업의 갚음을 받음, 현세의 몸과 내생의 몸은 서로 이어짐도 아니고(不常) 끊어짐도 아니며(不斷) 하나도 아니고(不一) 다름도 아닌 것(不異)입니다.
다시 가능태와 현실태, 보편과 특수가 역동적으로 교섭되어 이루어가는 업의 경험성은 여러가지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므로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으므로 새롭게 연기해 가는 것입니다. 곧 업에 있어서 경험성과 선험성은 따로 분리되어지지 않고 업의 자기부정의 심연이 업을 이루어 가는 선험성의 세계, 언제나 한결같은 진여(眞如)의 세계인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기신론은 여래장(如來藏)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기신론에 의하면 업의 경험성(心生滅)과 선험성(心眞如) 은 둘로 쪼갤 수 없는 하나됨의 장(一心)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핀 바에 의하면 중관-유식-여래장으로 이어지는 대승불교 교설의 큰 줄거리는 그것들이 각자 독립된 교리체계가 아니라 근본불교의 업설 연기설의 참뜻을 바로 드러내 보이기 위한 시대논리로서의 부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즉 대승불교 교리는 근본교설의 시대적 해석인 것이니 대승가의 그러한 해석을 종합해 보면 업은 주체와 객체, 특수와 보편, 가능태와 현실태, 경험성과 선험성, 자유와 필연이 서로 겹쳐서 이루어지는 경험의 장, 존재의 터전인 것입니다. 업의 이와같은 모습을 화엄경은 다음같이 간결하게 하나의 노래로써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비유켠데 깨끗하고 밝은 거울이 譬如明淨鏡
대함 따라 얼굴 모습 나타내지만 隨對面像現
제각기 서로 서로 알지 못하니 各各不相知
업의 성품 또한 다시 이와 같도다 業性亦如是
이 게송에서 비유로 든 깨끗한 거울은 주-객의 상호교섭이 이루어지는 전체적인 경험의 장으로서의 마음(淨心体)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거울이 대함을 따른다는 것은 마음이 선악의 모든 씨앗을 머금고 있어서 현실태로서의 업의 훈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며 얼굴은 우리가 일으키는 착하거나 악한 업(善惡業) 더럽거나 깨끗한 업(染淨二業)을 비유한 것입니다. 거울이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은 마음 바탕에 머금겨 있는 가능태의 씨앗이 업의 물들임을 받아 더럽고 깨끗한 두가지 과보(染淨二報)를 새롭게 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서로 알지 못한다고 했으니 마음과 마음속의 가능태의 씨앗, 그리고 업의 과보가 모두 자성이 없어서 거울과 얼굴, 거울의 영상이 서로 모르면서 비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업의 성품도 이와 같다는 것은 선험성으로서의 업의 성품(業性)과 경험성으로서의 업의 나타남(業相)이 모두 자성이 없어서 둘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불교에서 말한 업은 자기 안에도 자기 밖에도 실체적인 출발점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니 불교의 업설은 신이란 우상, 영혼, 이성, 물질이란 우상앞에 자아를 종속시켜 왔던 인류앞에 인간자신의 현실 경험의 지평 행위의 지명이 세계창조의 지명임을 보여준 혁명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몸과 업과 뜻으로 일으킨 뭇삶들의 노동, 언어, 인식의 흐름이야말로 세계를 만들어가고 세계를 인간화해 가는 창조의 에너지임을 보여준 인간주체 의식의 드높은 고양인 것입니다.
2. 행위의 해방 세계의 해방
위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삶이 세계와 더불어 주어지며 세계를 경험하면서 사는 삶이므로 행위가 곧 자아이고 자아가 곧 행위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본경은 객체와의 관계속에서 행위가 일어나므로 주체가 주-객의 참된 모습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주-객의 대립을 일으키고 대상에 상처를 입히는 행위를 착하지 못한 업(不善業)이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둘이 아닌 주-객의 참된 관계성에 바로 직면하여 주-객의 조화를 이룩하고 대상을 자아와 함께 성장시키는 행위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착한 업(善業)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상과 관계는 맺되 선악업의 경우처럼 대상에 직접적인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업이 있다면 그것은 무표업(無表業)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여기서 선악의 구분을 말했지만 선악업의 구분은 처음부터 그 가치판단의 기준이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변하는 상황속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되어 나오는 것이니 불교의 업설은 선악에 관한 어떤 고정된 개념화도 거부함으로써(不思善 不思惡) 구체적인 상황속에 항상 새로운 방편의 옷을 입고 나타날 도덕적인 자유의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대상을 이롭게 하는 착한 업을 짓고 대상을 위해 많은 것을 베풀어 준다 해도 주-객의 대립의식을 뛰어넘지 못하고 착한 행위를 했다는 마음의 찌꺼기를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들외 머무름 없는 삶의 자유는 차단되어 버릴 것입니다. 즉 행위의 주체와 행위가 지향하는 대상과 행위 그 자체가 모두 자성이 없으므로 한생각이라도 그 어느 곳에 머무름이 있으면 열려진 생명의 자유는 소외되어 버리는 것이니 경전은 주-객의 대립의식에 떨어져, 선한 행위 그 자체안에 출발과 목표가 남아있는 선업을 유루복(有編福)이라 하고 스스로 지은 선업자체를 삶의 전체성 속에 해방해가는 선업을 무루복(無編福)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루복의 세계를 지킨다고 주-객이 끊어진 평등의 경계에만 머물러 대상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무표업(無表業)의 경계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업은 주-객의 대립의식은 없다할지라도 주-객을 창조적으로 다시 살려내려는 묘용(妙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모든 대립적인 얽힘을 풀기 위해서는 차별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온갖 것에 머뭄이 없어야 되지만 진정한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머뭄 없는 경계에 함몰되어서는 안되며 머뭄 없는 곳에서 일체법을 구체적으로 건립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여섯가지 객관대상에 머뭄없이(不住色聲香味觸法) 육바라밀을 닦아가야 한다고(妙行) 말하고 있습니다.
본경에서 말한 사무량심(四無量心)은 쉬임없이 세상을 향해 선업을 짓되 선업을 짓고 있다는 마음의 찌꺼기를 부정해 버린 열려진 마음을 말합니다. 즉 주-객의 대립을 끊었으므로(不住生死) 유한속에서 이미 한량없한 마음을 성취했으나 한량없음에도 머물지 않고(不住漫樂) 주-객의 조화로운 관계를 새롭게 꾸려내며 대상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을 쉬지않는 행인 것입니다.
네가지 한량없는 마음 가운데 크나큰 사랑(慈)이란 세상에 기쁨과 행복을 베풀어주는 행이며 슬피여김(悲)이란 세상의 괴로움을 함께 괴로워하며 그 괴로움을 벗겨주는 행을 말합니다. 기뻐함(喜)이란 남의 좋은 일을 따라서 함께 기뻐하는 마음 세상을 살리는 긍정적인 사업에 함께 힘을 합하는 마음이며 평등함(捨)이란 나와 너, 있음과 없음에 치우침 없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행위란 자아-세계가 서로 사무치고 있는 존재의 장이므로 사무량심으로 표현된 행위의 완성 자유로운 행위의 모습은 어떤 추상적인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량심은 곧 인격이 아니되 인격아님도 아니며 세계가 아니되 세계아님도 아닌 것이니 사무량심은 우리들 존재의 본래적인 참모습임과 동시에 지금 현전의 순간에 이루어야 할 삶의 당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은 사무량심이 구현된 자아의 모습을 영원한 생명의 부처님(아미타불)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사무량심이 현전하는 세계의 모습을 정토(淨土)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아미타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로부터 십 만억 국토 멀리 떨어져 있는 서방정토에 아미타불이 계시며 아미타불을 좌우에서 모시고 있는 일생보처(一生補處)보살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은 자비(慧悲)의 화현이며 대세지보살은 희사(喜捨)의 상징이므로 아미타불은 자비희사의 구현체 곧 네가지 한량없는 마음이 현현하는 무너질 수 없는 생명의 장인 것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정토는 여기있고 저기 있으며, 시간과 공간 속에 제약된 유한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곳은 뭇삶들이 거기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터전 항상 고요한 광명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주-객이 본래 없는 자아의 선험적 터전속에서 자아를 새롭게 정립해내며 고통받는 세상을 향해 네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쉬임없이 베풀어 나간다면 그는 세계의 모든 진리의 완성자들과 함께 손을 잡고 일하는 진리의 사자일 것입니다. 또한 그는 사바에 앉아 아미타불의 마정수기를 항상 받는 지이니 화엄경은 그러한 보살의 삶을 다음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홈훌普興平等願 隨其所集淸種業
意以뺑施諸群生 如是大홈終無擔
보살은 평등한 원 널리 일으켜
쌓아온 바 깨끗한 업을 따라서
온갖 공덕 뭇삶들께 모두 베풀며
세상 위한 이 큰 서원 버리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