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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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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통신 - 정문태 1990년 06월 100호
선조들의 한 맺힌 징용길을 더듬어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피눈물로 얼룩진 대한해협을 건너 시모노세끼항에 발을 디디는 순간 ‘외국인’‘일본인’‘한국인’으로 나뉜 입국통로의 팻말과 부딪치며 사뭇 긴장을 한다. 이것이 단순한 행정편의나 우호를 위한 나눔이 아니라 차별과 홀대임을 직감하고, 연이어 눈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현실을 똑똑히 바라본다.
‘외국인’ 입국통로의 약 설흔여 명이 간소한 수속을 마치고 유쾌한 콧노래를 부르며 빠져 나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인’ 통로 쪽에는 거친 일본말 질문 세례를 받으며 고작 네 명이 통과했을 뿐이다.
더더욱, 세계 어느 입국장에서도 볼수 없는 여행자의 지갑검사-심사관이 일일이 여행자의 지갑을 열어 돈을 세어본다-라는 야만적 작태에 직면한 한국인 여행자들은 별 수 없이 죄인과 닮아 버리고 만다.
그렇다. 부 -관 연락선이 보다 세련된 여객선으로 바뀌었을 뿐 제국주의 일본의 역사와 본질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종전과 함께 형식적으로 불난 일본과 한국간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구조와 의식 속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압축적인 장면을 깊이 새기며 나가사끼행 열차에 몸을 던진다.
나가사끼로 가는 동안 시위하듯 차창에 와닿는 풍요로운 농촌과 도시의 모습들은 바로 한국 농민층 파괴(분화)를 발판 삼은 것이기에, 초토화된 우리 농촌을 떠올리며 심상치 않은 거북한 피로에 휩싸인다.

군수산업의 요충지였던 나가사끼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원폭공원은 마치 올림픽기념공원이라도 되는 양 꾸며져 있어 참혹했던 살육의 현장이라는 선입견을 날려 버린다.
화려하고 분주한 풍경 속에서 석연치 않은 마음으로 각종 조형물, 위령탑, 폭심지를 돌아 숱한 관광객들에 쓸려 전시관을 둘러보고는 급기야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 올라온다.
원폭공원, 이 곳은 결코 못된 역사의 반성이나 교훈의 새김터가 아니라 패전의 안타까움을 되씹으며 적개심을 가꾸는 위장된 교육장이라고 침을 뱉는 순간, 2차대전 때 침몰한 항공모함과 전투기에 대한 추도기간이 선포되고 많은 사람들이 떼지어 참배하고 있던 야스꾸니신사의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1910년의 이른바 ‘한일합방’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에 대한 살인적인 수탈을 시작한 이래, 대륙 침략과 2차대전에서는 부족한 전시 노동력을 매우기 위해 광란의 인력징발을 감행한다. 이 무렵 강제징용, 정신대 등의 폭압적 수단에 의해 끌려가거나 또는 토지, 재산의 침탈로 인해 부득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이 무려 236만5천236명(일본후생성 복원국 통계)에 이르게 되고, 이들 가운데 약 10만명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의 핵폭탄 투하에 노출되어, 그 가운데 약 5만여 명이 현장에서 폭사하고 나머지 약 5만명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조선인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서 도일하게 되었건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의한 직접적인 결과이며, 아울러 조선인 피폭자들은 그 부산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처럼 결코 우연이 아닌 10만명의 조선인 피폭자에 대해서 자료는 고사하고 ‘조선인’이라는 단어조차 전시관 어디에서건 끝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본 뜻이 비록 가시적인 효과에 불과할지 언정, 십수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영국과 호주 등에 대한 배려와 비교해 볼 때, 극심한 차별을 보인다. 게다가 일본 당국이 패전 후 강제징집된 조선인의 명부를 의도적으로 폐기처분해 버렸거나 자료를 은폐시켜 반세기가 지나는 오늘날까지 구체적인 피폭상황조차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다. 덧불여 이러한 야만성에 바탕을 둔 제국주의에 대한 가증스러움은, ‘한국인 피폭자 위령비’를 히로시마 원폭공원 안에 모시고자 하는 각계의 간절한 소망과 탄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원 밖의 한 모퉁이에서 갖은 냉대와 박해의 수모를 겪으며 피울음을 토하고 있는 위령비를 바라보노라면, 그 극에 달한다. 방대한 전시관 내부의 어느 구석을 둘러보아도 전쟁과 핵폭탄에 대한 참다운 역사적 의미나 반성의 흔적을 결코 엿볼 수 없다. 단지 핵 폭격에 따른 피해와 파괴상만이 즐비할 뿐.
이와 같은 단순한 역사의 처리는 필경 가해자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하면서, 인파에 휩쓸릴 승강기를 포기하고 비상계단을 통해 9층부터 걸어 내려 오는 동안 하나씩, 하나씩 역사의 의미를 되씹어 본다.
과연, 미국의 핵폭탄 투하는 불가피했나?
세계 제패를 꿈꾸던 제국주의 열강의 상호침략으로 가시화된 2차세계대전은 1945년 7월 12일경 마침내 일본이 항복을 전제로 한 명분 찾기에 돌입했고, 미국은 괌, 유황도, 오끼나와를 점령한 채 일본 본토공격만 남은 상황에서 쏘련의 참전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종전에 임박한다.
한편, 1941년부터 추진된 미국의 ‘맨하턴 프로젝트’(핵무기 개발계획)는 최초의 대상국 독일이 전의를 상실함에 따라 그 실험과 타격 대상지를 일본으로 변경하여 기어이 인류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두 건의 학살실험을 강행하고야 만다.
이것은 대형 살상무기를 바탕으로 종전 이후의 세계질서를 재편하고 지배체제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며, 특히 이미 규정한 가상적국 소련에 대한 엄포용 무력 시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미국의 핵폭탄 투하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인간의 역사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자 파렴치한 도전인 셈이다.
이러한 전쟁놀음 틈에 한국인 피폭자들이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치명적인 이중의 피해를 입은 채 썩어문드러진 몸뚱아리를 부여잡고 쓰라린 기억과 치떨리는 분노를 쓸어 담으며 한 민족 한 핏줄로부터도 버림받은 채 숨어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엄청난 역사의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무관심과 편견으로 한국사의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절폐시켜 버린 결과이며, 동시에 피폭자들의 한맺힌 통곡이 메아리쳐 산천을 적시고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점이 바로 1만2천여 생존자들이 겪고 있는 삼중의 피해인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45년 이후 대를 이은 부도덕한 남한 정부는 민족의 역사는 고사하고 민중들의 처절한 삶을 지켜낼 어떠한 역할도 수행하지 못한 채 이기적인 체제와 기득권 유지를 위한 흡혈작태를 부리며 결국 피폭자 문제를 방기해 버렸다. 다시 말해 명확한 역사의 기술을 통해 피폭자들의 자리매김을 선도하고, 약 98%의 피폭자들이 노동력을 상실해 있는 현실적 과제를 무엇보다 우선 시켜야했던 것이다.
피폭자들이 받아들이기조차 수치스러운 라면 1박스, 담요 2장, 쌀 반가마가 지금껏 정부가 벌인 유일한 보상이고 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현실임을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덧붙여, 60년대 초 한·일간의 음성적인 회담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3억불의 대한국 무상원조를 빌미로 피폭자를 비롯한 징용한국인들의 개별적인 대일본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못박아 버렸고, 이와 같은 굴욕적인 메모는 그 후 한·일 국교 정상화 때 수정없이 조약으로 변해 버렸다. 일본의 처지에서는 식민통치의 책임으로부터 형식적인 외교적 언급조차 없이 자유의 몸이 되었고, 어이없게도 한국은 제국주의 일본의 엄청난 과오를 국내 문제로 다루어야 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물론 무상원조 3억불조차도 경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어떤 경우에도 이 모든 사실을 정직한 역사로 담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며 전시관을 돌아 나오는 언덕길에 “핵병기 전면철폐를 위한 서명운동”이라 적힌 현수막이 바람에 넘어진다.

그렇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거의 제국주의 환상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반성 없이 숨겨 놓았던 정체를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폭로하기 시작했다. 고쳐지지 않는 역사와 의식구조, 변함없는 체제 속에서 조짐이 아니라 똑똑히 바라볼 수 있는 현실이다.
야만적 속살을 내보이며 이미 세계최대의 군사대국으로 무장해 버린 일본의 모습이 무력패권주의의 본질을 폭로하는 잣대로서 부족함이 없다.
다른 한편, 늠름한 자세로 사과조차 받아내지 못하는 남한 정부는 부단히도 일본을 흠모하여 바다를 건너갈 요량이고, 부족함을 느꼈던지 불경스러운 역사의 원흉을 이 땅에 불러들일 계획을 꾸민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결핍으로 인하여 구걸해야만 지탱할 수 있는, 정통
성을 지니지 못한 정부의 표본과도 같은 모습인 것이다.
일본의 무장을 유감이라 성토하면서 6월부터 실시되는 제13차 RIMPAC (환태평양 군사훈련)에 그들과 무기를 맞대고 정다운 얼굴로 참여를 결정한 것은 또 무슨 변고인가.
세계 양심의 염려와 지탄 속에서 추진되고 있는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체의 본질이 제국주의 질서와 지배구조의 확고한 유지에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아무도 허락하지 않은 사태를 야기시키는 무리를, 누구도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이 순결한 역사의 교훈인 것이다.

1990년 3월 21일 나가사끼. 급기야 ‘국제질서 참여와 경제적 이익’이라는 허무맹랑한 구호 아래 못된 역사와 동일한 수법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학살하면서까지 바다 건너 일본을 찾아 가려는 가소로운 무리들이 있다. 다른 한편 정신착란적인 전쟁놀음을 꿈꾸며 군사대국화를 또 다시 열망하는 땅에는 1945년 8월 9일과 빼닮은 저녁 노을이 아직도 지고 있다. 기계적인 친절함과 표정 잃은 사람들의 어깨를 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