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위에서 춤추는 세상’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 어린 애인은 ‘인간이 무섭다’며 질금질금 눈물을 뿌렸지. 그래 우리는 서로 할퀴고 배반하고 화해하며 이 삶터의 역사를 이루어왔다. 개에겐 조건 없는 믿음에 주는 감동은 있지만 역사가 없다. 유비의 어린 자식 가슴에 품고 외롭게 적진을 돌파했던 조자룡의 기개나 ‘인두가 식었고나 다시 달구어라’ 제법 체통있는 말씀을 남긴 성삼문이나, ‘그래도 지금 지구는 돈다’ 마음 약해서 혼자 중얼거린 갈릴레이 갈릴레오 선생이나 상전의 가슴에 칼을 박은 만적의 힘살이 역사를 싱싱하게 증거해 왔다. 지금 이 세상 이야 기개도 체통도 소신도명분도 붉어진 난세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지구는 돌고 뒷통수 치는 기개, 남밟고 올라서는체통, 목짖 아래 꿀쩍 삼켜버리는 소신, 주판알 팅구는 명분이라도 있긴 있지 않은가. 그래.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식량이라면 이것 가지고 죽이라도 쑤어보자.
중생들 얇은 위벽에 부담을 주지 않고 알알이 붉은 피톨로 영글 수 있는 죽을 쑤려면 먼저 죽 쓰는 자 스스로가 죽 쑤는 일에 보상을 바라서는 안 될 것이다. 무보상의 노동-이것이야말로 얼마나방만한 영혼의 아름다움인가. 시인 또한 시시한 인간일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자극한다. 문학이건 정치건 사업이건 우리들 삶의 모습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자각이 평화를 낳는다. 사회적 지위나 명예 따위 사치는 일 없는 소인배들에게나 맡겨두라. ‘내가 죽을 쑤어 먹이니까 나는 베푸는 자로서의 선민이다’ 따위의 엘리트 근성이 편싸움을 낳고 죄를 낳는다. 그냥 즐겁게 땀흘리며 불을 때고 주걱을 놀릴 일이다.
맛있는 죽을 쑤려면 인습적 구문의 틀에서 벗어날 일이다. 먼저 죽에 대한낱말의 형식에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죽’하면 ‘못사는 거렁뱅이들이 먹는 최소 단위의 음식’이라든지, ‘영양가 없고 맛없는 음식’이라든지, ‘깽판 나버린 창피스런 사태’ 따위로 생각하는, 그 고정화된 두개골 구조부터 해체시켜야 할 것이다. 죽은 얼마나 부드러운 음식인가. 죽은 또한 얼마나 자유스런 영양식인가. 한곳에 소복하게 쌓여있지 않고 딱딱하게 몸을 도사린채 앉아있지 않고. 자기를 담는 용기의 능력과 형편에 따라 자유로이 모습을 맞추는 저 넉넉한 여유. 죽은, 그리고 얼마나 욕심 없는 인간의 모습인가. 개기름 자르르 흐르는 고단백 따위가 아예 제거된, 투명한 삶의 에너지. 그래서 죽은 밥도 물도 아닌 죽 자체로서 그 존재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왜 죽 쑤는 일이 창피한가. 죽 쑤는 일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그 고약한 선민의식이 우리의 역사를 난장판으로 황폐화시켰다. 지금 이 땅 끊임없이 엎드려 침략을 꿈꾸는 물귀신 일당들의 아가리에 죽 한 사발씩을 먹여야 한다. 탐욕과 시기질투로 배 아픈 잡귀들을 편안케 하고 한데 어우러져 몸 섞으며 하나됨을 이루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