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27 경신 대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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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박충식
1986년 11월 57호
도량은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에 의해 짖밟히고 스님은 폭력과 폭언에 땅을 치고 울었으며 불자들은 치욕과 분노로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렸다. 계엄사는 그때까지의 불교계의 자율 정화 노력을 송두리째 무시한 채로 불교계 한쪽 구석의 비리와 폭력성을 대대적으로 왜곡 확대하여 선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전국의 사찰을 구둣발로 휩쓸었다.
“불교는 우리민족의 전통종교로서 민족정기와 주체의식을 함양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여 국민의 정신 영역을 계도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사이비 승려와 폭력배들이 난무•발호하는 비리 지대로 화하여, 뜻있는 성직자와 신도들은 물론 일반 국민의 지탄과 빈축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계엄 당국은 과감한 숙정과 정화 조치를 단행하면서도 종고가 지니는 특수성과 독자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불교계 자체의 자율적 정화와 숙정이 있기를 기대하여 왔던 것이나, 상당한 기간이 지나도 아무런 차체정화의 움직임이나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뿐 아니라 자력으로는 도저히 갱생의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 부득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계엄당국은 이들 사이비 승려나 상습적 폭력배를 교계에서 과감하게 소탕•추방하는 조처를 계기로 하여 전통 종교로서의 불교본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자체정비와자세의 정립이 촉진되기를 기대하며, 아울러 민주복지국가 건설을 향한 국만의 정신적 계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밝혀둔다.”
그러나 계엄사의 이러한 사탕발림은 그 속셈이 곧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으니 그 결과로 불교의 자율정화라는 맹아는 한때 뿌리채 뽑혀졌으나 그 뒤에 사태를 수습하는 데에 미비했던 점과 더불어 다시 분규의 씨앗을 뿌리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10 ·27불교계 정화를 단순히 정화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법란으로 규정짓는 까닭은 10 ·27이 단순한 정화의 차원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무력과 강압에 의한 것이었으며, 승려와 사찰에 대한 지각한 행위까지도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성역이라 할 수 있는 사찰에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이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며, 성직자인 스님들께 차마 귀에 담지 못할 욕설과 구타를 자행활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사태가 어떻게 해서 연유되었고 또 사회와 어떤 연관을 갖고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살 펴 봄으로써 10·27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보아야 하겠다.
그 옛날 일제는, 한국 불교의 어용화를 꾀하기 위해, 조선 사찰의 퇴폐를 방지한다는 핑계로 ‘사찰령’을 만들고서 총독이 직접 본사 주지를 임명하는 제도를 만들어 놓았었다. 일제는 또한 불교를 사찰령으로 얽매어놓고 민족해방라는 우리민족의 대열망을 제도적으로 봉쇄하면서, 한
국 불교를 왜색화, 무력화하는 제도적 장를 만들었다. 해방 이후에 불교 내의 비리와 모순의 척결이 초미의 과제로 제시되지만 그 무렵만 해도 혁신적인 스님들의 활동이 없었을 뿐더러, 뿌리깊은 왜색화와 함께 친일내각 탓에 청산해야 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데 대한 무관심으로
불교는 자기의 환부를 미처 잘라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지니게 된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 정화 유시로 인한 비구와 대처 사이의 싸움은 그 후 불교가 관의 지배 아래에 놓이는 계기로서의 집안싸움으로 치닫고 만다.
역사적 상황 속에서 불교의 정화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불사(佛事)였으나 이것이 불교자체 내에서 자율적으로 발발한 것이 아니라 정치의 입김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불교 정화는 끝내 종교의 순수성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의 이용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불교내의 자체 역량이 그만큼 미흡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적인 조건들이 오히려 더 깊이 옭아매 사슬이 되어 불교를 혼란에 빠뜨린 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리하여 비구와 대처 사이의 싸움은 끝내 해결되지 않은 채로 5 ·16 군사정부 밑에서 사찰령과 그 맥을 같이하는 불교 재산관리법이 재정된다. 이 법령에 의해 불교는 일제시대처럼 완전히 관제불교화하게 된다.
그러다가 70년대 말기부터는 불교 내 에서 자각과 반성이 조금씩 홍기하기 시작하였다. 유신의 폭압 속에서 온 국민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지내었으나 10 ·26사건이 터지면서 이제까지 억눌려 있던 온 국민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제3공화국이 몰락함과 더
불어, 불교계에서도 불교를 근본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해온 불교 재산관리법의 폐지 또는 개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곧, 1980년 3월 1일에 대한불청회장. 회의에서 불교재산관리법의 개정을 촉구하고 이어 4월 28일에 송월주 총무원장스님이 기자회견에서 불교 개혁 의지를 명확히 표명하였다. 송월주 총무원장 스님은 이제까지 정권에 이용당했던 암울한 시대를 청산하고 불교가 새로운 시대의 민족적,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을 올바로 담당하기 위해서는 불교 재산관리법의 폐지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같은 해 4월부터 일어난 일련의 불교 개혁의 몸부림을 헤아려보면 이러하다. 불교 헌법 개정심의 연구 위원회를 구성하여 4월 8일에 첫 회의를 소집하고 통도사를 포함한 다섯개 사찰의 공원화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으며, 7월 25일에 초종파 연합기구인 한국불교회의 전한국불교회의
(내용:애국적인 국보위 시책을 지지한다)에서 탈퇴하면서 국보위를 찬양하는 공식행사를 일체 거부하였으며, 8월 3일에는 종단의 자주-자율적인 운영방언에 관허여 검토하며 문공부의 총무원장 등록 지연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자율 운영을 주장하면서 노골적으로 관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또 같은 해 8월 5일에는 불교관계법 개정 5인 추진위가 구성되었는데, 그 뒤로 정치권력의 실력 행사가 조계종 정화추진 방안을 발표함으로써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에도 전혀 굴하지 아니하고 9월 16일에는 불교관계법 개정 시안을 마무리 짓고 개정 추진위를 40명으로 대폭 확대 개편하였다. 이어서 9월 17일에 조계종 총무원은 불교 재산관리법, 문화재 보호법, 공원법, 도시계획 시행령 들과 같은 관계법령개정 시안을 마련하여 문공부에 제출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와 관계된 제반 법령에 대한불교내의 노골적인 불만과 합법적인 철폐나 시정 요구는 정부와의 심각한 대립을 가져왔고 정부는 불교의 자립의지를 두려워한 나머지 총칼을 앞세워 10 ·27 법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종교탄압을 자행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인 1980년 11월 14일자 일간신문에 ‘승려부정축재 200억원’이라는 표제로 시주착복을 비롯하여 모두 1백97억5천8백여만원을 부정축재하였다고 집계해 놓았는데 그 자세한내용을 열거해 보자면 실로 무엇을 두고 부정축재라고 하였는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부정축재한 자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은 아니나 200억원이라는 막대한 액수가 어떻게 계산하여 나온 것인지는 아직도 그 근거가 확실하지가않다. 다만 현직 신민당 국회의원인 김 경우 스님과 그때에 도선사 주지였던 이 혜성 스님이 부정축재로 착복한 금액의 합계가 190억에 이른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뒤에 그분들이 아무런 착복의 근거가 없어 무혐의로 풀려난 사실만보아도 착복이니 부정축재니 하는 것의 기준을 어디다 두었는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수가 없다.
그들이 진정으로 불교의 정화에 그 목적을 두었다면 한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로서 처음의 시도부터 그렇게 무계획적이고 우발적이지 않았을 터이며, 조계종 내에서 제시한 자율 방안을 좀더 구체적으로 진지하게 받아 들였어야 했으며 그들이 진실로 불교의 내일을 걱정하였다면 군부의 단독적인 행동에 의하지 않고 적어도 주변의 원로스님들과 충분한 의론 끝에 합의여 정화작업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 무렵에 정치가 불교에 가한 행위가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자. 1980년 5월 광주사건을 진압한 현 정권은 비상계엄 조치 밑에서, 국보위를 통하여 개헌 작업에 들어갔다. 국보위는 아홉 가지의 추진 지침을 내세워 국가와 사회의 전반에 걸친 문제들을 그 의 뜻대로 다스려 나갔는데 그 지침 가운데 하나인 ‘종교를 빙자한 정치 활동의 통제’를 오로지 불교사찰에만 적요하여 마침내는 전국의 사찰이 계엄군의 밑에 놓이기에 이르렀다.
계엄사는 주요 사찰에 계엄군을 진주시킴으로써 청정도량을 부끄러움 속에 빠뜨렸다. 사찰에 진주한 계엄군은 완전 무장에 착검까지 하고 흙 묻은 군화발로 법당을 어지럽혔다. 이들은 이러한 일이 누구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든, 스님들을 구타하고 갖가지 모욕적인 기합을 강요하기도하였다. 이 어찌 우리들에게 치욕이 아니겠으며 부처님께 불경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송월주 총무원장스님을 비롯하여 스님 153명에 대하여 수사를 한다하더니 18명 구속, 32명 제명 또는 승직 박탈, 몇몇 승려의 비리 같은 내용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다.
이러한 폭행, 폭언, 고문의 결과로 그때에 낙산사 주지스님이었던 원철스님이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얼마 못가서 입적하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승려의 생활을 사사건건 파헤쳐 보이면서 소수의 그릇된 점을 전체의 것으로 확대-왜곡 하였던 것이다.
불교의 분규와 비리의 근본적인 원인이 불교 자체에만 잇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대개가 정권에 의해 조장되고 더욱 심화되어 왔음은 불교의 역사가 보여 주고 있다. 불교계의 분규에 대하여 정권은 아무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스님들과 신도들도 성직자와 종교인이기에 앞서 대한민국 국민임이 명백할 진대, 10 • 27 법란의 과정 속에서 수없이 많은 스님들과 신도들에게 자행되어진 그 행위는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인권 탄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불교에 대한 탄압을 언제까지나 수수방관하고만 있을 것인가. 앞으로도 이러한 탄압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터이다. 이런 시점에서, 불교가 자율적으로 발전이 길을 걷고 불교 내의 민주화를 이룸과 더불어 정권에 의한 불교계의 탄압을 종식시키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자.
불교도 다른 사회 부문과 함께 이 민족 안에 속해 잇는 것이기에, 불교가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립을 하려면 다음과 같은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로, 정치의식을 함양하고 관제 불교에서 탈피하여 진정한 민중 불교가 되어야 하겠다. 불교의 위치도 마땅히 사회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으므로, 불교의 실청은 사회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 억압된 현실의 모습을 정견으로 파악하고 그 원인을 규명함과 함께 또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 승가와 재가의 유대가 깊어져 불교의 교세 확장과 아울러 불법 수호에의 조직적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선불교에 치우쳐 종교적 실천이 미약한 점을 다시금 반성하고 좀더 현실적인 고민을 민중과 함께 풀어나가는 실천적인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셋째로, 수행 단계와 사회적 실천이 단순히 선과 후의 관계에 있지 않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에서 상구보리가 우선되어야 하화중생을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화중생 속에서 부단히 노력할 때에 반작용으로 상구보리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진리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종교적 진리가 현실 생활과 무관하다면 그것을 어찌 종교적 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넷째로, 불교의 진리를 종교적 진리로만 스스로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종교적 진리를 하나의 보편적 진리로 보고 이를 각 방면에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과 불교적 진리가 불이(不二)의 관계에 놓여질 때만이 진정한 불교적 진리가 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불교에 대한 관권의 탄압은 용서하고 사과 받는 차원에서 파악할 것이 아니고 그 원인과 본질을 정확히 규명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태를 모든 불자들이 알고 있어야 하며 또한 이러한 일을 계기로 자체 내에서는 깊은 반성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그렇게 힘없이 당해야만 했던 불교계의 현실을 직시하고 조직적인 유대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겠다. 또다시 불법이 유린 당하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영원히 우리 불교는 이 역사에서 씻지 못할 치욕의 오점을 남기리라.
불자여 민중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모순 덩어리이지만 이 고통의 땅이야말로 구원의 땅 ‘정토’이며 이를 떠나서는 부처의 나라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진실을 알고 모두 함께 뭉쳐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