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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와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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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불교동화 - 정진채 1986년 11월 57호
아득한 옛날, 북인도에 마란타라는 조각가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란타의 조각 솜씨는 너무나 뛰어나서 그 고장 사람들은 그의 재주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습니다.
마란타가 새나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들은 마란타의 눈동자를 통하여 마란타의 머리속 깊이 사진 찍혀졌습니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것처럼 날 수도 있고, 눈도 깜박일 수 있는 새가 마란타의 손끝에서 만들어져 나왔습니다.
꽃도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마란타의 머리에 한번 찍힌 꽃은 마란타의 손끝에서 곱게 피어 방실방실 웃었습니다. 마란타가 꽃을 만들어 나가면 벌과 나비들이 다투어 그 꽃을 향해 날아들었습니다.
이렇듯, 마란타는 나무잎새 위의 이슬 한 방울까지도 꼭 그것처럼 새겼습니다.
어느 가을날 마란타는 먼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단풍이 산과 들을 수놓아 그림처럼 고와서 마란타의 마음은 온통 즐거움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렇게 종일을 단풍이 타오르는 계곡을 헤매다가 문득눈앞의 화려한 단풍 속에서 뜻밖에도 황홀하도록 이름다운 여인을 발견하였습니다.
마란타는 장승처럼 한 자리에 못박혀 서서 뚫어져라 하고 그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여인도 마란타를 보았는지 한참동안이나 멈추어 서서 웃는 듯, 우는 듯 촉촉히 젖은 눈으로 마란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란타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여인의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 여인의 발앞에 무릎을 꿇었읍니다.
“아름다운 아가씨여! 당신은 하늘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땅 속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
여인은 약간 수줍은 듯 웃고는 여전히 마란타를 바라보았습니다. ”
마란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여인의 손목을 덥석 잡았습니다. 그 순간 마란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은 예름다운 여인의 손목이 아니라 차갑고 딱딱한 나뭇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 이럴 수가?!”
마란타는 얼마동안 넋 잃은 사람처럼 나무를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이웃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는 톱을 빌려다가 그 나무를 베기 시작하였습니다.
마란타는 그 나무를 집으로 운반해와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마란타의 손끝에서 나무는 머리와 가슴, 그리고 허리와 종아리까지 차츰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갔습니다.
오똑한 콧날이여
얌전히 다문 입술까지 이제는 그 윤곽이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란타는 온 정열
을 나무의 조각에 쏟았습니다. 망치와 끌이 움직일 때마다 마란타의 눈동자가 반짝였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손질을 끝내자 이 나무여자는 마란타가 산에서 본 그 여자와 같이 아름다운모습이 되었습니다.
마란타는 이 나무여자를 향수에 목욕시키고 나서 비단 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마란타는 저녁 밥상머리에 자기가 만든 나무여자를 불러 앉혔습니다. 여자는 걸을 줄도 알았고 주인 옆에 앉아 얌전히 술을 따를 줄도 알았습니다. 다만 말만은 할 줄 몰랐습니다.
마란타는 그런 나무여자를 보면서 은근히 솜씨를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그 당시의 남인도에는 아요타라는 유명한 화가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요타의 그림은 또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이가 없으리 만큼 훌륭하였습니다. 남인도에서는 아요타의 그림을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실물보다도 더 색깔이 선명하고 호흡을 하는 듯 움직이고 있어서 모두들 놀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조각가 마란타는 화가 아요타를 정중하게 초청하였습니다. 향기 높은 술과 맛난 나물과 달콤한 과일들을 준비하고는 그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화가 아요타가 조각가 마란타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마란타는 아요타를 친 형제처럼 정답게 맞아들이면서 먼 길을 온 것을 고맙게 생각하였습니다. 아요타도 이름만 듣던 조각가 마란타를 만나게 되니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두 사람은 백년지기처럼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동안에도 니무여자는 부지런히 방 안팍을 드나들며 잔심부름을 하였고, 주인과 손님의 사이에 다소곳이 앉아서 술을 따라 올렸습니다. 화가아요타는 시간이 흐를수록 나무여자를 사모하는 마음이 더해 갔습니다. 그럴수록 나무여자는 가만히 웃기만할 뿐 입을 열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착하고 교양있는 아가씨다. 조각가가 허락을 한다면 아내로 삼고 싶다.’
화가 아요타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습니다. 조각가 마란타는 등잔에 불을 밝히고 손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어, 이제 주무셔야 할 시간이군요. 아요타 화백, 누추하지만 이 방에서 주무십시오. 나는 건넌방에서 자겠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아요타 화백의시중올 들게 하겠습니다.” 화가 아요타는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꽃처럼 예쁘고 수줍은 저 아가씨가 시중을 들다니 꿈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조각가 마란타가 정말이지 고마웠습니다. 조작가 마란타가 건넌방으로 가자 나무여자는 등불 곁에 조용히 섰습니다.
화가 아요타는 은근한 목소리로 나무여자를 가만히 불렀습니다.
“어서 이리 가까이 오시오. 아기씨.”
그러나 나무여자가 말을 할 턱이 없었습니다. 아마 수줍어서 그렇게 다소곳이 서 있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한 아요타는 나무여자의 손목을 잡아당겼습니다. 순간 아요타는 종일토록 마신 술이 한꺼번에 확 깨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여자가 아니라 나무인형이었기 때문
입니다. 정말 그런 줄도 모르고 그 인형을 향해 몸이 달았던 자신이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 두고 보자!’
마란타가 자신을 속였으니 자기도 응당 그 갚음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화가 아요타는 밤을 새워 출입구의맞은편 벽에다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요타가 입은 옷 그대로 노끈으로 목을 매달야 죽은 모습을 열심히 그렸습니다.
노끈이 팽팽하게 매여지고 지신의 몸이 축 늘어져, 눈알은 튀어 나올 듯 허공을 향하고 혀가 입 밖으로 삐어져 나와서 피를 뚝뚝 흘리는 그림이었습니다.
문득 아요타는 손을 잠시 멈추고 나무인형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무인형은 그때까지도 불앞에 조용히 수줍은 듯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습니다.
“흥! 어디 두고보라지”
아요타는 한번 비웃고 나서 이번에는 자신의 입가에 파리떼가 날아와 붙은 모양을 그렸습니다. ”
“어때 ? 네 주인 마란타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군.”
아요타는 나무인형을 바라보면서 눈을 찡긋해 보였습니다.
과연 놀라운 솜씨였습니다. 입가에 붙은 파리때들이 꿈틀 꿈틀 살아서 가고 있는 그림에는 아요타 자신의 괴로운 모습이 빈틈없이 그려졌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자, 아요타는 그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와 방 앞의 마루밑에 몸을 숨겼습니다.
날이 밝자 조각가 마란타가 손님의 방에 아직도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동정을 살피다가 살그머니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곧,
“으흑!”
하고 놀라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화가 아요타가 목을 매달아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란타는 문을박차고 방으로 들어가 칼로 목을 매어단 노끈을 힘껏 끊었습니다.
“아니 ? 이럴 수가? ! ”
그제야 마란타는 그것이 아요타가 아니라 아요타가 그린 그림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조각가 마란타 탄식하였습니다. ”
“내 재주만 너무 믿어 눈이 어두웠구나. 과연 놀라운 그림 솜씨다.” 하고.
그때 마루밑에서 아요타가 나왔습니다. 마란타는 부끄러워 몸 둘 곳을 몰랐습니다. ”
“마란타님, 당신께서 나무여자로 나를 속였으니 나도 그림으로 당신을 속인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정을 저버리지는 않었습니다.”
하고화가아요타가 말했습니다. ”
마란타는 아요타의 손목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작품앞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나무여자와 그림을 서로 번갈아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요타 화백!”
“예에 ?”
“세상 사람들이 서로 속여 마음을 어지럽도록 빠지게 하는 것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읍니까?”
마란타의 밀에 아요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실로 그러합니다, 마란타님. 우리는 오늘 우리의 조각과 그림 앞에서 이 세상의 살아가는 모습 보는 듯 합니다. 속이고 속고 하는 속에서 한평생을 보내는 것이지요”
하고 한숨을 내쉬었옵니다. N
‘세상살이는 그렇게 허망하고 덧없는 것이다’
두사람은 어느새 서로의 가슴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각기 그 친하고 사량하는 것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조용히 집을 나섰습니다. 도를 닦는 길이 실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은 그 길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