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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무한한 그 실천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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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최석호 1986년 11월 57호
1 . 보살이란무엇인가
보살이란 보리실타(菩提薩埵)의준말로 인도어의 보디삿트바(Bodhisatva)를 한문으로 음사(音寫)한 것이다.
중생이란 불성(생명의 본성)이 무명(無明)에 덮혀 탐, 진, 치의 3독에 의하여 죄업을 쌓고 그 업보로 끊임없이 6도 윤회의 굴레에 종속적으로 끄달려 고통 속에서 헤매이는 우리들의 현실적 삶의 양태이다. 부처란 계, 정, 혜의 3학에 의하여 업장을 소멸하고 불성을 실현하여 어둠을 밝힘으로서 윤회의 고해를 극복하여 해탈을 증득한 우리들의 이상적 삶의 표상이다.
그러면 이처럼 대립적인 속성을 가진 부처와 중생이 합성되어 어떻게 한가지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보살은 한편으로는 불(佛)세계로부터 비추이는 광명의 빛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중생계에서 반영된 어둠에 의하여 규정받고 있다. 보살은 완전한 불세계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중생계로부터 밀려오는 고통에 찬 중생의 신음으로 인하여 반쪽은 부처이고 반쪽은 중생인 상태이다. 보살은 자신의 반쪽을 광명에 이르게 하려면 자신을 향한 중생계도 함께 광명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실천이념을 상구보리(上球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고 한다. 불세계를 희구하며 중생계로 향하는 이가 보살이다.
끝없는 구도적 정열을 가지고 무한한 광명인 불세계에 이르기 위하여 발원하고 희구하지만, 몸은 중생계의 고통속으로 향하여 그 고통을 함께 느끼며 함께 극복하는 것이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은 서로 대립되거나 수행 정도의 단계적 분류 또는 수행 장소에 따라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불세계에 이르는 지름길은 중생계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며, 중생의 고통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통하여 이 현실을 불세계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을 통일하기 위해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보살인 것이다.

2. 중생과 보살
보살과 중생은 서로 같으면서 다른 몇 가지 점이 있다.
그 첫째가 무한히 자신 확대시켜 나가려 하는 속성이다.
모든 것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의해서 존재한다. 이러한 의존 관계를 부정한다면 굳이 ‘자기’라고 할 것이 없다(無我). 그러나 중생은 전체와 분리되어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이라 규정하고, 관계를 벗어난 자기의 본성이 있는 듯 착각한다. 개인은 전체에 비해 왜소하고 타인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켜 가고자 한다. 자신을 확장 시킨다는 것은 자신의 의사대로 할 수 있게 되는 범위가 넓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하여 권력이나 재물이나 학식 같은 것을 남보다 많이 소유하려고 노력한다. 권력이나 부를 써서 타인
을 지배하면 타인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으므로 그것으로 자신의 영역이 확대된 것으로 생각한다. 더욱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획득함으로써 더욱더 넓은 영역의 타인을 성적 도구나 전쟁 및 노동의 도구로 전락시켜 고통 속에 빠뜨리곤 한다.
그러나 보살은 모든 것이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의하여 존재함을 앎으로써 개인의 이기적인 아집을 버리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지신의 일부로 인식하기 때문에 한정적인 자신에 대한 이기적인 아집의 벽을 헐어 버림으로써, 자기와 관계된 모든 것이 곧 자기화 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때 타인은 자기화 되고, 자신의 아픔으로 공명(共鳴)하는 타인의 아픔이 클수록 자신은 확장되는 것이다.
중생에게서 자기의 확대라는 것은 소유의 확대로 인하여 타인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며, 보살에게서 자기의 확대는 보다 많은 이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느끼며 이를 함께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영역이 넓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타인의 안락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헌신 하더라도 이는 마치 날아오는 돌을 손으로 막아 손은 다칠지언정 몸 전체의 안전을 위하는 것과 같다.
둘째는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고자 하는 속성이다.
중생은 자신의 생명을 현재의 상대적인 민족이 유지되는 기간 동안으로 상정하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이는 권력이 상실되면 자신의 생명도 소멸되는 것으로 알고 권력을 지키기 위해 좀더 큰 힘과 부에 자신을 종속시켜 비굴한 삶을 살아가는 한편, 타인을 고통 속에 빠뜨린다. 부자에
게는 부가, 학자에게는 명예가 자신의 생명이 되므로, 이를 지키기 위하여, 5계를 범하고 온갖 죄악을 저지른다.
보살은 중생의 고통을 해결하고 불세계를 실현하는 발원이 유지되는 동안에 생명을 부여받는다. 비록 보살이 발심을 하였더라도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발원을 실천하지 못하면 보살의 생명은 다하는 것이다. 권력이나 부의 유혹 또는 육체적 생명이 위협을 받더라도, 이를 취함으로써 죄업을 지어 원력의 성취에 방해가 된다면 기꺼이 버리거나 새로운 생명으로 몸을 바꾼다. 마치 내일의 안락을 위하여 오늘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과 같다.
곧 중생은 자신을 확대시키고 영생을 얻고 싶어 하지만 끝내 왜소해지고 죽음의 고통에 떨며, 보살은 자신을 버리고 생명을 바치지만 결국 온 세계를 얻으며 영생을 성취하는 것이다.

3. 보살과 불국토
세째로 또한 보살과 중생은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윤회를 하며 8고(八苦)에서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중생은 자신의 업에 의하여 고통을 받으며 종속적으로 윤회를 하지만 보살은자신의 원력에 의하여 중생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고 중생의 고통을 함께 극복하고자 주체적으로 윤회를 한다.
보살은 “모든 업과 번뇌를 자재로 제어하고 있으면서도 업과 번뇌에 지배되는 상을 나타내고, 자성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생사의 본채가 없음을 알면서도 생사의 몸을 받으며 모든 생존의 경계를 떠나 있으면서도 모든 생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로지 중생의 고통
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보살이 중생계에 오는 목적은 보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중생에게 있다. 그러므로 휘황한 광휘를 두 거나 금빛 가사를 걸치고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중생과 똑같은 모습으로 와서 중생들의 고통을 체험하고 중생의 목소리로써 제도하여 함께 극복하여주는 것이다.”
네째로, 보살과 중생은 모두 이 현실을 고통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이 현실 속에서 기쁨과 성취를 누리는 것이다.
중생은 소유가 무한히 확대됨으로써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하여 이를 성취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소유의 충족에 의한 기쁨을 영원히 얻을수 없다. 소유의 충족에 의한 기쁨이란 상대적인 것으로 남보다 더 많이 또는 전보다 더 많이 소유 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소유의 확대를 위하여 경쟁하고 타인의 희생을 전제로 하여 자신의 안락을 취하려 하므로 항상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중생은, 마치 죽음에 직면한 우물 속의 사나이가 한방울의 꿀로써 안락을 구하듯, 소유가 충족되는 순간순간에 젖어서 더 큰 고통을 잊고서 현실 안락으로 착각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보살은 자신의 반쪽은 광명을 찾았으나 중생의 고통에 찬 신음으로 인하여 자신의 아픔이 생기기에 현실을 고통의 세계로 느낀다. 그러므로 온 중생계의 고통이 소멸되고 불세계가 건설되는 것이 완전한 안락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보살의 기쁨은 영원히 성취될 수 없다.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고통이 때하면 보살의 발원도 끝나겠지만 중생계가 끝이 없고 중생의 고통이 끝이 없으므로 보살의 발원도 끝이 없다” 하는 것처럼, 보살은 시간의 개념 속에서는 불세계가 이룩될 수 없다고 본다.
보살에게는 이땅이 바로 불국토이다. 보살에게는 불국토란 완성된 세계가아니라 자신의 발원을 행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세계가 불국토이다.
그러므로 현실은 보살의 무한한 실천의 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