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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를 받아든 그때가 어제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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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 일백호 기념특집 - 조정화 1990년 06월 100호
조정화/대승불교승가회 청년회원


6월호로 “해인창간 100회 특집 기념호가 발간된다”는 편집장 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100회. 별다른 느낌도 없이 “해인지가 벌써 100회나 되었나?”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책상위에 놓인 계산기를 무심히 눌러보았다.
100÷12=8.3333…
김형곤의 요리문자를 빌리지 않더라도 “아니 ! 이럴수가”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서냐 작업장에서나 하루를 바쁘게 흘려보내는 일상의 연속 속에서 너무나 안일하고 편하게 월초만 되면 어김없이 받아들게 되는 이 한권의 얇은 잡지 ‘해인’이 탄생한지가 어느새 팔년 하고도 삼개월이 지난 것이 아닌가.
그러고보니 그날의 일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불교에 마악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발심자였다. 불교를 알게 되었고 산사를 찾는 일이 잦았다. 특히 우람한 사나이의 기개로 떨치고 일어서는 가야산과, 사계가 모두 다른 색을 띠고 눈앞에 나타나는 홍류동의 계곡을 안고 있는 해인사는 내 의식의 세계에 지울 수 없는 감동으로 각인되어 버렸다. 봄이라기보다는 겨울이 더 실감나던 2월의 하루. 우리 초발심자 일행들이 해인사에 참배 갔더니 스님들께서 큰방에 모여서 “해인사를 상징하고 한국불교의 포교와 참신한 도약을 위해 불교 정기간행물인 문서포교지를 만든다”는 의지를 토론하고 계셨다. 여기 저기서 챙겨두었던 자료들을 뒤적이며 머리를 맞대고 회의와 토론을 거듭하였고, 활기찬 몸짓으로 분주히 움직이셨다. 불교와 스님들이 하시는 모든 일들을 무한한 존경으로 따를 때인지라 옆에서 홈쳐보고 있던 우리들도 뭔가 멋진 일이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으로 덩달아 신이나 그 자리에서 영구독자 신청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한달쯤 후인가? 우편으로 해인 창간호를 받아본 나는 실망과 조소( ? )를 금치 못했다. 우아하고 폼나는 멋진 불교잡지를 기대하며 기다린 그것은 두장짜리 8면의 초라한 종교주보 형식을 빌린 팜플렛에 지나지 않았다. 내용 또한 해인사 불교학생회 소식으로 지면이 모두 메워져 있었다.
당장 해인사로 전화를 했다. “스님. 실망했습니다. 해인사를 대표하고 대중불교를 위한 포교지가 왜 이리 허술합니까?”라고 했더니 그 당시 초대편집장 비슷한 책임을 맡고 계신 종림스님께서 그 특유의 어눌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것도 만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
지령 100호를 맞아 해인을 받아드는 독자분들의 감회는 서로가 새롭고 다르겠지만 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단면적인 기억이지만 ‘해인’창간 당시의 일이 생각나서 적어보았다. “지금의 해인이 어떤 식으로 변화, 발전을 했는가.”하는 식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해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전국의 해인 가족들께서 더욱 멋진 평을 해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짧은 지면이나마 끝맺음으로서 바라는 소망이 있다면, ‘해인’이라는 제목에서 느끼는-해인사를 상정하는 특정사보라는-일반적인 인식을 벗어나, 불교인이든 비불교인이든 이 땅을 딛고 있는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없는 법음(法音)을 전달하는 대중잡지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