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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미륵신앙의 민중 구세론(求世論)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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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최장일 1986년 11월 57호
백제의 미륵신앙은, 백제가 멸망한 뒤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억눌리고 고통받는 민중의 해방사상으로서 민중의 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한 민중 운동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래서, 그 근원을 백제의 ‘미륵하생 불국신앙(彌勒下生 佛國信仰))에 두고 있는 한국 미륵신앙의 역사는 곧 한
국 민중의 사회적 전기(社會的 傳記)인 것이다. 민중 구세주의(求世主義)로서의 백제 미륵신앙은, 한국역사의 정치적, 사회경제사적 구조에서 나타난 지역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백제 유민이나 구백제 지역에 한정된 미륵신앙이 아니라 한국 민중 전체의 미륵신앙을 대변하고 있다. 그것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 한국 미륵신앙의 역사적 전개가 백제의 미륵하생 불국신앙을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오늘날에 ‘백제’라는 말의 개념이 많은 물산을 산출하는 곳이자 착취하는 곳이었으며 정치적 탄압과 역사적인 멸시를 끊임없이 받아 온 곳이라는 지역적인 개념을 넘어서서 한국 민중 전체의 얼과 한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제 미륵신앙은 민중 구세주의를 표현하는 한국 미륵신앙의 본 바탕이며 그 알맹이인 것이다.

이제, 한국 민중의 사회적 전기 속에서 민중의 피난사상, 민중불교운동, 민중혁명운동, 때로는 무속과 같은 민간신앙과의 습합 등으로 나타난 한국 미륵신앙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백제 미륵신앙 민중 구세주의적인 성격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 백제 미륵신앙의 국토적(國土的) 성격
백제의 미륵신앙은 한 개인이나 소수집단의 구원이 아닌, 미륵하생용화세계(彌勒下生龍華世界)의 국가적 실현이라는 의미에서 국토적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미륵사 창건에 나타난 백제 미륵하생 불국신앙이 그들의 이상세계를 백제땅에 구현함으로서 전체 중생의 총체적 구원을 갈망했다는 것에서 잘 나타나 있으며 이는 불교 구세주의로서의 미륵신앙이 갖는 가장 원초적인 성격이기도 하다.
이러한 백제 미륵신앙의 국토적 성격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 통일신라시대의 미륵신앙 전개 과정에서 더욱 구체화 되었다. 신라초기에는 미륵의 인격적 구현인 화랑을 내세워 신라의 국토와 왕실의 미화(美化)나 신성화(神聖化)를 위한 지배층의 민중교화 이념으로 크게 신앙되던 미륵신앙이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억눌리고 고통 받는 현실을 벗어나려는 민중의 구원신앙으로 발전하였다. 다시 말해, 신라 하대의 미륵신앙은 초기의 정치적 구세주의로서의 관념적인 구원신앙을 극복하고 현실의 사회구조 속에서 불법(佛法)의 실천을 지향함으로써 진정한 불국사상
(佛國思想)의 사회화와 역사화의 길을 모색했었던 것이다.
미륵이 하생하여 이루게 될 용화세계는 중생의 현실적인 생활고까지 해결되는 지상낙원이며 석가불 때에 구제받지 못한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구원한다는 것을 요지로 한 미륵신앙은 통일신라의 전제 왕권 밑에서 민중의 구원신앙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가 더욱더 깊은 모순
에 빠지게 됨에 따라 민중의식이 대두되었고 현실의 구조적인 질곡(桂橋)에서 고통 받는 민중들을 마워할 구세주로서의 카리스마가 등장할 것이 요청되었다. 이러한 때에 궁예는, 신라의 지배체제를 타도할 것을 부르짖으며, 미륵을 자칭하고 나서서 그 무렵 반체제적이던 민중의 역량을
모아 새로운 국가사회의 건설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때의 미륵신앙이 지닌 공동체적 성격이 잘 드러나게 되는데 궁예는 그 자신이 승려라는 사회적 위치에 있었고 불교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님과 아울러 왕자의 신분이라는 점들로 인하여 미륵신앙으로 기울어진 민중불교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아. 따라서 궁예가 미륵불로 자처한 것은 이상국가를 갈망하던 민중 구세주의의 시대적 요청이며 민중 속에 있는 미륵의 발현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궁예의 세력을 꺾으려는 신라의 탄압은 한국 역사에서 맨 처음으로 나타난, 미륵신앙적인 민중 구세주의에 대한 탄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민중 위에 군림하는 카리스마가 아닌 민중과의 동고동락(同苦同樂)속에서 돌출부로서의 기능과 역활을 다했던 민중 종교의
지도자 궁예에 대해서는 민중의 사회적 전기의 맥락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견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
아뭏든 백제의 멸망 뒤에 백제 미륵하생 불국신앙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나타나는 미륵신앙의 국토적 성격은 시대가 거듭 바뀌어도 오늘에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오는 바이니, 특히 역사의 변혁기에 나타나는 민중운동의 전통속에서 그 맥을 찾아볼 수 있다. 보기를 들어, 고려시대 우왕때(1382년)에 경상도에서 일어난 이금(伊金)의 미륵신앙운동과 조선시대 숙종 때에 경기도 양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여환(呂遺)의 미륵신앙사건들을 대표적으로 꼽을수 있으며 조선시대 말기에 있었던 여러 민란들도 미륵신앙이 정감록류의 정진인(鄭眞人) 출현설과 융합되어 이루어진 민중운동들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민중운동에 나타난 미륵신앙은 모두 백제 미륵하생 불국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미륵하생의 이상 세계를 이땅위에 국가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모두 백제 미륵신앙의 국토적 성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륵신앙적 민중운동은 미륵불을 신봉하는 신앙조직에 의해서 주도되었으며 사원을 중심으로 불상조성, 탑 건축, 사찰 건설 및 보수와 같은 일들을 통하여 승(僧)과 속(俗)을 하나로 묶어 불교신앙을 민중 속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신라의 통일에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재가불교신도의 신앙결사체인 보(宝), 결계(結契), 향도(香徒)가 중심이 되어 민중불교신앙을 계승하였으며, 그러한 민중 신앙조직은 곧 부락 공동체 단위의 향촌 질서로 발전하여 미륵신앙을 집단화 공동체화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미륵신앙의 성격을 띤 민중불교조직은 그규모가 스무명, 서른명으로 이루어진 것에서부터 수천명으로 이루어진 대조직으로 까지 발전하였는데, 예천 개심사(開心寺) 석탑기(石港記)에 의하면,미륵향도(彌勒香徒)를 중심으로 한 일만명의 인원이 석탑조성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통일신라 때부터 미륵신앙이 집단적이고 부락공동체적으로 신앙되었다는 것에도 백제 미륵신앙의 국토적 성격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집단적, 부락공동체적 신앙 활동을 통해 미륵신앙은 민중속에 더욱 토착화 되었는데,시골의 부락 어귀에 서있는 돌미륵은 바로 그 부락전체의수호신 격으로 새 국토적 미륵신앙이 남긴 보편적인 혼적이다.
한편으로 미륵신앙의 부락 공동체적인 신앙 형태는 조선시대 초엽 곧 14, 15세기에 나타난 매향신앙(埋香信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곧 땅에 묻은 향나무가 미륵이 되어 나타나기를 기원했던 매향신앙은 매향을 매개로 하여 발원 집단과 하생한미륵불이 서로 연결되기를 발원하는 구세주의적 신앙 형태이다. 매향비(理香碑)의 발굴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고려시대 말기와 조선시대 초기에 왜구의 격심한 침탈을 받았던 해안지방에서 민중들이 현실의 고통과 위기적 불안감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한 방법으로서 미륵신앙과 접합된 매향을 택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또한 미륵신앙이 융성했던 지역공동체의 신앙조직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백제 미륵신앙의 국토적 성격은 한국 미륵신앙의 역사 속에 나타난 미륵신앙적 민중운동의 발현 형태와 주도집단의 집단적, 공동체적 성격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바이니 그것은 역사적, 사회적 실천을 통해 미륵하생의 불국토를 이 땅위에 건설함으로써 억눌리고고통 받는 민중 전체의 국토적 구원을 갈망하는 민중구세주의 바로 그것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