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어느 모임에서든가 불교의 앞날에 대하여 논의한 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할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화방과 절망이라는 2가지의 양분된 의견을 갖고 있었다. 불교의 앞날이 절망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들어 이야기했었다
첫째로 사회 문제로 민족의 현실에 참여하지 못한 점이요, 둘째로 불교대중의 사회 역사에 대한 몰이해가 빚어낸 불교의 현장 곧 불교가 뿌리내릴 수 있는 그 기반을 상실했다는 점이요, 세째로 불교의 교언(敎言)이 과리의 내용만을 담고 있어 다분히 교언(巧言)에 머무른다는 점이
요, 넷째로 불교의 어용성이 문제요, 다섯째로 지포층(승려)이 사회 대중보다 사회 인식에 관한 수준이 더 낮다는 데에 문제가 있음이요, 여섯째로는 한국불교가, 역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초역사적인 이론이나 선적인 방법을 유입한다면 조금은 이해될 수 있는데도, 다분히 그 방법들이 역사척인 것을 도외시하고 불교적인 관념이나 형식의 틀이 빚어낸 개인주의나 형식주의 및 회피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
불교의 앞날이 회망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다수가 불교 내부의 문제가 비록 지금은 암울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사회 전체의 흐름과 같이 생각하여 볼 때에는 희망적이라고 말한 것 같다. 이러한 이유는 오늘의 한국 불교 내부의 문제가 역사적인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국 불교의 문제가 곧 우리 민족의 절대적인 모순과 부합되고 따라서 민족의 모순이 해결되면 자연히 불교 내부도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라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사람들은 흔히 불교의 비현실성과 비역사성에 대하여 많은 비판을 가해 오지만, 일제의 식민지 시대와 해방 이후의 우리의 정치 문화를 살펴보면, 불교가 종교로서의 그 역할을 담당하기에 앞서 이미 외적인 조건들에(지배논리) 의하여 지도력을 상실한 저지대로 하락 하였다는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불교야말로 이시대의 민중지대요 피지배자의 집단체라 할 수 있으며, 이 점은 민족의 문제나 사회 문채를 해결하는 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불교의 발전이야말로 민족의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올 한해를 되돌아볼 때에 나는 이러한 양분된 의견들에 대하여 거의 합일점을 찾지 않았나 생각된다. 금년 초에 전례에 없던 불교인의 시국선언은, 비록 이땅의 모든 양심인들의 노력에는 도저히 그 무게를 견주어 볼 수 없겠지만, 그것이 갖는 의의는 참으로 크다고 할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것이 불교인이 사회문제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것임과 동시에 가장 저지대를 이루는 층을 대변하는 발언이었다는 점에서 실로 중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연이어 불교 정토구현 전국승가회의 출발과 민중불교 운동의 활동은 불교인과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 저변에서부터 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민족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9월에 있었던 해인사의 전국 승려 대회는 승려들의 거대한 사자후로서 세간과 출세간이 결코 둘이 아님을, 또 민족의 현실과 불교가 둘이 아님을 안팎에 천명한 실천적 행위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불교가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좌표가 되었다 생각된다. 이러한 의지는 봉은사의 불교 자주화 실천대회를 통하여 더욱 굳건하여졌으며 이로 인해 1986년은 한국불교의 크나큰 분기점을 이룬 한해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올 한해 동안에 보여 준 불교의 활동은 불교인, 비불교인을 떠나서 많은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으며, 그것은 불교와 민족의 앞날에 대한 밝은 전망과 희망을 심어 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만큼 불교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음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한국 불교가 앞
으로 어떻게 통일된 모습으로 민족 문제와 사회 문제를 해결하여 나갈 수 있을 것인지는 단순히 불교의 부분적인 행위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중차대한 과제이다. 또한 올해에 이루어진 여러가지의 결의 사항(해인사 결의)올 어떻게 관철시킬 것이며 총무원장 스님께서 말씀하신, 전도된 호국불교의 모습을 특정한 정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것으로 가꾸어야 한다는 그 결연한 의지는 비단원장스님 한 개인의 발언이 아닌 국민에게 다짐드리는 승가모두의 약속일진대, 앞으로 그 구체적인 해결방법과 실천을 어떻게 펴나갈 것인지가 우리의 과제이리라.
비록 앞에서는 희망적이라고 표현하였지만 지속적인 노력과 꺼질 줄 모르는 소망이 없이는 오늘 이러한 모습도 그저 시대의 상황에 요구하는 형식에 편승한 것으로 그칠 뿐, 결코 불교의 앞날이 밝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요즘에 스님들을 만나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더
욱 간절하다.
아직도 많은 승려들이 승려대회의 근본적인 취지나 목적 그리고 사회인들이 승려대회에 왜 그토록 열렬한 호응과 관심을 보였는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없이 지엽적인 폭력 문제만 나무래고 소극적인 승려의 본분만을 고집한다. 그렇다고 결코 폭력을 지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폭력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올바른 정의 없이 함부로 해인사 승려대회에 대해 폭력 운운한다는 것은 소견이 좁은 생각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폭력이란 본래 불경에서도 마음속에 있는 악의 씨앗이나 미움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을진대 해인사 승려대회는 직접 사람에게나 어떤 생명체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가 결코 아니었음에랴. 그것은 다만 오늘날 불교를 가장 근본적으로 저해하는 상징적인 요소를 철거하자는 대중들의 한결같은 심중의 뜻이 발로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더구나, 스님 일천오백 여명의 경건한 정근과 눈빛 속에서 이루어 졌는바 그것이 어찌 폭력이라고 규정될 수 있겠는가. 또 한편 승려대회를 주동한 몇몇 사람이라 하는데 이와 같은 불교의 대법회가 어찌 소수의 몇 사람에 의해서 치루어 질 수 있는 대회일는지 도저히 그 본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승려대회는 본디 교단이 외부의 침해로 흔들리거나 아니면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승려대회가 해방 뒤로부터 지금까지 서너 차례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종권 문제와 깊이 연결된 것들이라는 점에 비추어보아도, 이번 해인사 승려대회는 근대 불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려대회 뒤에 그 근본 목적을 성취하려는 노력은 간데 없이 사분오열되어 종권 탈취니 좌경 용공세력 운운하는 소리만 들린다면 불교 내부의 모습들이 아직도 얼마나 암울한 것인지 싶다. 지광스님이 혈서로 쓰셨듯이 오늘의 승려들은 진정코 눈을 떠야 할 것이다.
오늘날 불교는 이 사회, 이 민족을 위하여 막중한 책임과 의무를 떠 맡고 있다. 따라서 교단도 개인도 더 이상 자기 분열의 모습이나 방관자의 태도 속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중생의 문제 곧 오늘날의 모든 생명들의 문제는 바로 오늘의 나의 문제이며,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나의 사명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매일 노래하는 사홍서원을 살펴보아도, 한없는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대원력이야말로(중생무변서원도) 다함이 없는 번뇌를 끊을 수 있는 지름길이며(번뇌무진서원단), 이 세상의 소리와 모습(법문)을 다 알고 깨닫는 것이(법문무량서원학) 평화의 세계를 건설(불도무상서원성)하는 근간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듯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이 마음의 열림은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고 어떻게 고통받고 있는지에 대한 눈뜸이며, 이러한 눈뜸은 곧 나 개인의 번뇌와 욕망이 덧없음을 인지시켜주고 또 세계에 대한 연기적 모습을 배우게 하고 일께워주며 실천적 행위를 열어준다 하였으니, 모든 불교도는 개인주의 및 초월주의에서 벗어나 모든 의지와 깨달음을 중생 속으로 회향시켜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와 민족 앞에 새 지평을 여는 길이며 승려대회의 본원(本願)인 것이다.
당신은 왜 출가하였느뇨?
당신은 무엇 때문에 승려 생활을 하는가?
오늘 당신의 모습은 또 어떠하느뇨?
영어(囹圄)의 몸으로 차가운 방에 앉아 계신 스님들, 봄은 곧 또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