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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나라, 우리들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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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법연 1986년 11월 57호
온통 한 가지 색깔로 넘실거리며 무한 아름으로 가득했던 가올의 들판이 그 어느 자락에서부터라고 할 것도 없이 조금씩 조금씩 비워지면서 어느새 가을을 막음하는 노을이 유난히 붉고 그 선명함이 예리한 사금파리와 같은 한기를 뿜고 있어, 가히 심상찮은 시절을 반증하는 한폭의 깃발인 양 섬뜩하다.
그렇게 실팍지고 풍요로왔던 들판은 대기를 치른 것보다 더 알뜰히 거둬졌지만 정작 우리들의 창고와 식탁은 가난과 썰렁한 냉기뿐이고 줄기차게 달리는 고속도로만이 더욱 악을 쓰고 있다. 흔히 말하듯이 가을은 모든 풍요와 결실을 약속하고 보장하는 계절일 진대, 우리의 형편은 가을이 오기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뿐 아니라, 짧은 콧노래 한 가락 불어제낄 흥마저 일지 않는 고즈넉한 논두렁에 버려진 검정 고무신짝 같은 심정임에랴. 외려 가을은 더욱 춥고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들판이 비어 가듯이 주위도 우리에게서 점차 멀어져가고 애꽃은 겨울비 같은 비보와 소식들만이 추적추적 모두의 가슴을 적시고 있는 것이 이 나라의 전반적인 기상개황이라면, 두겹의 철창을 격하여 바라보는 도반스님의 푸석푸석한 얼굴도, 해맑은 비구니스님의 앳된 모습을 대하면서 마냥 헛헛한 웃음과 흐려지는 눈빛으로 대신할 밖에 도리가 없는 것 또한 이 나라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혼한 보기일 것이다.
서울 어느 곳을 어느 때에 걸어도 매운 재채기를 피할 수 없음이 누구나 겪는 일이듯이 나이어린 전경들이 거리 곳곳에 배치되어 제자리 걸음질로 무료와 추위를 좀 덜어보려는 모습이며 세워 놓은 수송차에 앉아 연신 선하품을 쏟아내고 있는 꼴도 이 나라의 거리에서는 이미 낯익은 풍경이겠다.
죄없고 선량한 놈도 혹시나 지신도 모르는 꼬투리나 실밥을 달고 다니지는 않는지 좌우를 살피며 가슴을 죄고 걸어야 하고, 젊은 놈들 혈기와 객기의 욕설과 삿대질도 오해의 소지가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 꼬리를 사려야 할 판국에, 날이면 날마다 문제 학생, 문제 교사, 문제 종교인, 문재 국회의원, 문재 노무자…라 하며 줄줄이 떡밥 식으로 낚시대들을 팽팽히 드리운 채, 아침 저녁으로 우리들의 가는 목을 죄어 온다.
인류의 투쟁사가 곧 행복이란 낱말 하나를 손안에 넣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전제할 때에 요즘의 가시울타리를 친 듯한 시국은 마치 줄 끊긴 연만큼이나 허무맹랑하다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이 사회의 비극이며 행복의 또 다른 형장이다.
우리들에게 유보된 행복은 이제 새장속의 한쌍의 비둘기나 애완동물 들에게나 걸맞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태 짐작에 짐짓 섣부른 단정일까 행복의 의미가 한가정이나 한 개인에만 국한되어 운위될 성질의 것이 아닌 바에야 나라사람들의 행복이란 그야말로 부도(不渡)난 허깨비다. 물론 이 시각에도 행복한 사람은 있을 것이며 행복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것 받고 있는 작자도 없지 않을 것이지만, 사람이란 어차피 같은 어우러짐 속에서 공동의 장에 뿌리를 근거한다고 규정할 때에, 그 행복이란 얼마나 황당하고 한낱 이기적인 삶으로 구획되어지는 부분적 형태들일까.
계절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어 바람이 차고 오로지 한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수가 네자리 수에 이르니 그 걱정과수심의 숫자는 또 얼마나 클 것이며, 제삼 제사의 중생에게로 미치는 전달 효과가 적지 않을 터이니, 밤마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잠을 설치는 사람 또 얼마이겠는가. 이런 상
도(想到)에 어찌 가슴이 미어지지 않으랴.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또 무엇이 그렇게까지 극단적a로 처단되어져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의 비애는 그들이 그렇게 되어야 빼고 그런 구호가 엄청난 것으로 인식 되어야 하는 우리네 나라의 현 처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어수선한 공기, 흉흉한 소문들이 망령처럼 이나라 전체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 광풍지세(狂風之勢)는 언제까지 우리네 작은 가슴들을 유린할 것인지 암담하다.
빈 들녘에 겨울의 긴긴 밤이 까마귀떼 처럼 내려앉는다. 우리들의 잠은 깊을 수없다. 제각기 빗장문을 덜컹거리며, 새로운 동녁을 준비하는 별들을 차가운 얼음의 촉각으로 지켜보면서 이나라와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