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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단마(石田瑞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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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숲 - 편집실 1986년 11월 57호
자비가 정당한 자비가 되기 위하여서는
중도에서 좌절되는 따위의 불철저한 것 이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까지 베풀고 베풀고 또 베푸는 것이 아니라면
자비심은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상대가 떨어져 가는 곳에는 어디까지라도 따라가
마지막까지 구원의 손길을 거두지 않는
철저한 자비가 요청된다.
그것도, 자비는 누구라고 가리지 않는,
특정되어 있지 않은
그리고 많으면 많을수록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누구의 고통이라도 대신 걸머지려는
자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자비는 자기 손을 조금도 더럽힘 없이
점잖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흙 속에서 남을 건지려면 자기도 진흙 속에서
뒹굴어야 한다. 지옥이나 아귀와 같은
말로 상징되는 악의 현실 속에 들어가
자기도 악에 물들어야 한다.
흙탕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는 한 자기 지신이 그 속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구해낼 수 없다.

그려나, 여기에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은,
진흙 속에 뛰어 들어가 악에 물드는 것이
그대로 악에 물들어 버리고 마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악에 물들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있어야하니,
말하자면 물들어 있으면서 물들지 않고,
물들지 않았으면서 물들어 있는,
그런 점이 없어서는 안 된다.
구하려다가 자기도·함께 빠져 죽는다면
구원도 도중에 끝나게 되며,
도리어 자비의 구제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밖에는 안 될 터이다. 여기에서도,
물들면서 물들지 않는다는 점이 자비의 근본적인
성격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아울러 그 자비를 관철시키는 힘을
보살은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보살이 갖추어야 하는 그런 능력은
이미 밝혀졌듯이 ‘공’의 실천이라는 사실 속에
포함된다. 보살은 자기의 온 힘을 다해
공을 체득하여 공을 실천할 수 있는데,
그 사실이 그의 자비를 물들면서 물들지 않는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아무 것에도 집착함이 없는 공의 실천이 없고 보면,
그의 자비는 악에 물들기를 거부하든지 아니면
아주 물들어 버리고 말든지 이 두 가지 중의
어느 것에 그칠 터이다.

그러나 공의 실천은 멈출 줄을 모른다.
그것은 정지 없이 계속하여 나아가는데,
꼭 이와 같이, 보살의 자비도 물드는 것에 의해
다사 물들지 않는 것으로 정화를 계속하는 것이다.
물드는 것이 자기의 정화가 되며,
그 정화는 다시 더욱더 물들기를 요구함으로써,
자기를 끝없이 정화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이 걷는 깨달음의 길이며,
그의 진실인 것이다.

석전단마(石田瑞廣) 저, 이 원섭 역 “유마경의 지혜” 가운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