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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영원한 성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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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2000년 11월 225호
- 종교비평의 시대가 열렸다 -

지난 9월, 이름만 대면 개신교인이 아니더라도 알 만한 서울 강남의 한 대형 교회의 당회장 부자 세습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를 즈음이었다. 계간 <당대비평> 가을호는 ‘한국의 지식 권력 3-권력으로서의 한국 종교’라는 주제를 다뤘다. 주제 발제 격인 ‘한국 종교, 열광과 침묵 사이에서’ 그리고 불교, 개신교, 천주교의 현재 모습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세 편의 글을 실었다.
그리고 다시 10월, ‘종교는 영원한 성역인가?’ 라는 자못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다. ‘성역과 금기에 도전한다’는 모토로 출발해 최근 16호를 낸 무크지 <인물과 사상>이 종교에 대해 물음표를 던진 것이다.
<당대비평>과 <인물과 사상> 모두 우리의 인문·사회과학 분야와 문화계에서는 만만찮은 무게와 날카로움 그리고 파괴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잡지이다. <인물과 사상>은 우리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현역’을 대상으로 실명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실명 비판’이란 용어를 정착시켜 새로운 사회 현상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들 두 잡지가 올 가을에 제기한 문제는 ‘종교 비평’이다. 비평이란, 분석 또는 비판적인 관찰을 뜻한다. 극작 비평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극작가 레싱의 다음의 말이 비평이란 용어의 정의에 종종 인용된다.
“내가 최근에 내놓은 극작 가운데서 꽤 좋은 것은 전적으로 비평의 덕을 입고 있는 것들 뿐이다.… 비평이 작품을 억압한다고들 하지만, 나는 비평에서 작품에 필적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나는 비평의 도움으로 나와 같은 정도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 비평의 도움 없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다음의 말을 가벼이 여긴다면 비평은 설 자리를 잃는다. “나쁜 비평은 나쁜 창작에 못지 않게 비난받아야 한다.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한층 그 해독은 크다.” 비평은 비평 대상과 서로 견제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바람직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비평이란 용어는 애초에 문학에서 주로 쓰였으나, 요즘은 비평이란 말 앞에 비평의 대상을 갖다놓으면 성립되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통용된다. 그래도 종교 비평은 아직 낯설다. 종교가 비평의 대상이라니? 이만 저만한 무례함이 아니다. 종교는 믿음이므로 물음표가 없어야 하니까. 우리는,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종교에 물음표를 던지는 행위는 불경스러움에 해당된다. 더욱이 종교 권력 상층부의 반종교적 행위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가는 영락없이 반종교와 이단으로 몰리고 만다. 이런 현상은 어느 특정종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전반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으뜸의 가르침인 종교를 왜 비평의 대상으로 삼아 무례함을 자초하는가? 젊은 종교학자 장석만(한국종교연구회 연구원)은 종교 집단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견제를 받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지금 한국에서 종교 집단은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 집단이면서도 별로 견제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성을 지닌다. 종교 집단이 방자하게 권력을 휘둘러 사회를 마비시킬 정도의 충격을 줄 가능성은 언제라도 존재한다.… <아마 MBC 뉴스룸을 점거한 만민교회 신도들의 행위를 염두에 둔 듯 하다.> - 한국에서 무력을 합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군대와 경찰을 제외하고는 한꺼번에 무시무시한 규모로 일사불란한 조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집단은 종교단체밖에 없다.”(‘한국 종교, 열광과 침묵 사이에서’, 당대비평 2000년 가을호 223쪽) 종교 행위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종교 행위라는 이름으로 덮여 있는, 그래서 습하고 침침한 어둠 속에서 번식하고 있는 반종교 행위를 햇빛 아래 드러내자는 것이다. 그래야 “그만큼 종교가 사회에 긍정적 기여를 할 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강준만은 종교 비평의 필요성을 시민운동과 종교의 관계라는 특이한 관점에서 제기하고 있다. 한국의 종교가 기복성을 탈피하지 못할 경우 시민단체의 저항에 부딪힐 수 있다는 얘기인데, 듣기에 따라서는 시민운동 집단이 종교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나는 최근 어느 글에서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시민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건 불완전하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국민의 관심과 시간과 돈이라고 하는 그 중요한 자원을 놓고 종교와 시민운동은, 적어도 한국적 현실에서, 상호 경쟁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와 시민운동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기복신앙에 탐닉할 때 기복 행위는 ‘사회로부터의 도피’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시민운동과 전혀 무관할 수 없다. 따라서 대체적으로 기복신앙에 탐닉하지 않는 종교를 갖고 있는 나라에선 종교와 시민운동이 공생관계를 넘어 얼마든지 상부상조할 수도 있겠지만, 기복신앙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국에선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장씨와 강씨는 종교 비평의 당위성을 밝힌 데 이어 종교 비평이 활발하게 전개돼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장씨는 언론을 부추긴다. “매스컴의 종교기사는 단순 사실 보도나 ‘높으신’ 분의 하나마나한 소리로 뒤덮여 있고, 가끔 눈길을 끌기 위해 종교적 관광 명소를 소개하는 꾀를 부리기도 한다.…왜 많은 사람들이 문학 비평과 예술 비평은 당연시하면서 종교 비평은 어불성설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일까?” 강씨는 지식인들에게 겸양의 미덕을 버리라고 말한다. “한국의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겸양의 미덕’을 앞세우며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려 한다. 이젠 사회참여적 글쓰기를 하는 모든 지식인들이 그런 겸양의 미덕을 내던질 때가 되지 않았을까?” <당대비평>과 <인물과 사상>이 종교 비평을 부르짖는 이유에 대해, 그리고 종교 비평의 활성화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대단히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다음과 같은 조계종단에 대한 지적에 마음 편할 리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수행자로서의 승려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직업인으로서의 승려라는 직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에는 실리주의에 집착하는 운영 방식이 불교 종단들에 보편화된 점이 근원에 깔려 있다. 종단이 개인 욕구를 단속하고 정화하여 권위를 유지하는 종교 본연의 모습에서 이탈하고 종단 자체가 실리를 찾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서 승려 개인들도 아예 사적 이익 추구를 정당화하기 시작한 것이다.”(김종찬, ‘불교계, 종단 권력의 정치학’, 당대비평, 2000년 가을호 242쪽) 종교 비평의 당위성과 위와 같은 비판에 대해 동의하거나, 반대하거나에 관계없이 종교 문제는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직접 또는 간접으로 경험하고 있기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문화관광부의 종교 현황을 파악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종교인구는 7천만명에 가깝다. 정부의 통계가 종교단체의 보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국민의 수를 넘어서는 웃지 못할 자료가 되고 있을 정도로 종교는 국민의 일상생활과 맞물려 있다.
‘종교는 영원한 성역인가?’라는 질문에 종교 단체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분들의 답변은 무엇일까? 그 분들의 답변을 듣기도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은 답변을 내렸음에 틀림없다. 단지 종교라는 이유만으로 문제가 있어도 단죄되지 않았던 세월은 지나갔다. 바야흐로 종교 비평의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