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정신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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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바라봅시다 - 이죽내
2000년 11월 225호
종교는 인간의 건강 특히 정신건강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종교는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중심을 잡는다는 이야기다. 마음이 ‘중中’을 떠나면 갈팡질팡이다. 그리하여 종교의 근본 가르침은 ‘중’이요 그것의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은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중용中庸의 ‘중’이나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중도의 ‘중’과 같은 뜻이다.
흔히 일상에서 중용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때 중용이란 뜻은 ‘중’이 아니라 산술적인 의미의 중간이라는 뜻으로 오용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산술적인 의미의 중간은 통계학적인 다수를 가리킨다. 가령 어떤 사람의 지나친 행동을 보고 중용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다수 사람들의 행동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정상正常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다. 중간은 그 기준이 바깥의 다수에 있다. 대체로 인간은 중간을 이루는 바깥의 다수에 끼기 위하여 다수의 대중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면서 다수의 행동범주에 자신을 맞추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의 삶은 획일화 평준화 되어간다. 획일화 평준화의 대열에서 빠지면 불안을 느낀다. 이것이 소위 현대인의 집단 노이로제 현상이다.
그러나 ‘중’은 바깥의 다수를 뜻하는 중간과는 정반대로 내적인 개인적 적정適正상태를 가리킨다. 개인적 적정상태란 개인이 항상 ‘전체’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평형상태(equilibrium), 항상성恒常性(home ostasis)을 뜻한다. 평형상태가 깨어질 때 병이 생긴다. 신체적인 평형상태가 깨어질 때 신체 병이 생기고 정신적 평형상태가 깨어지면 정신적 이상이 생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평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를테면 운동도 하고 영양도 취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양의 운동과 자신이 필요로 하는 영양을 취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운동이나 음식이 나한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중’은 개인적인 자신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정신의 경우도 평형상태를 잃으면 한쪽으로 기울어져 사리事理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편견이 그런 경우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편견 역시 바깥의 다수의견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닌, 개인의 정신적 평형상태를 기준으로 한 말이다. 편견이 없는 마음이 평상심이다. 그래서 도道는 평상심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종교적 현상이나 행태를 보면, 중심이나 평상심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슨 종교든 사람이 믿는 종교이기 때문에 믿는 내 자신의 마음이 우선 바로 서야 한다. 내 자신을 떠난 종교는 사상누각砂上樓閣이다. 자신을 떠나면 떠날수록 병이 깊어진다. 그 대표적인 한 예가 광신도狂信徒이다. 언젠가 한 기독교 신자가 불상과 단군상을 훼손한 일이 있어 모 일간지 기자로부터 그런 사람을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대체로 광신도 중에는 자신들이 나타내는 광신적 행동과는 정반대로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 깊은 불신과 회의에 쌓인 사람들이 많다. 그 불신과 회의를 없애기 위해 그것과 정반대 되는 광신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너무 선善만 강조하는 듯한 인상이다. 인간의 삶에는 선악이 공존한다. 악惡이 없으면 선善도 없다. 악이 있으니까 선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선만을 강조하다보면 악은 억압되기 마련이다. 선을 강조하여 악이 사라진다면 좋겠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나는 대학시절에 어느 존경하는 선생님의 기독자적 삶에 감화를 받아 한 때 교회를 다닌 적이 있다.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사탄아 물러가라’고 힘주어 말씀하신 구절이다. 그 때는 그 말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사탄이나 악마는 우리가 퇴치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우리 자신의 일부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사탄이나 악마라 하는 것을 우리 자신의 밖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과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천국이 네 마음 속에 있다고 했듯이 악마도 네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불가피하게 선택적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는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 그런 선택과정에서 다른 것들은 의식으로부터 배제되고 억압당하기 쉽다. 억압될 때 정신의 평형상태인 ‘중’이 깨진다. 억압된 내용이 악마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억압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일 때 그것은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다. 악을 받아들여 선으로 바꿀 때 우리는 비로소 선악의 갈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선악의 갈등으로부터 해방될 때 선도 악도 아닌 즉 선악의 대극對極이 지양된 ‘중’이 실현되는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 등의 모든 종교 형태는 ‘중’의 실현을 위한 방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각각 자라온 사회 문화적 환경이 다르기에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불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라면 이것 또한 ‘중’을 벗어난 편견적 태도이다. 기실은 남의 종교를 비하하고 배척함은 자신의 종교를 비하하고 배척함을 뜻한다. 더 나아가선 자기자신을 비하하고 배척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인 즉 ‘중’의 실현을 위해 체험하는 자는 자신의 종교를 존중하는 만큼 남의 종교를 존중하게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불교나 기독교 등 어떤 형태의 종교가 아니라 석가나 예수가 체험했던 종교적 체험이다. 그런 체험은 ‘같은’ 진리의 체험일 수밖에 없다. 그런 진리의 체험 위에 사회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종교가 생겨난 것이다. 이를 불가에서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로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체험된 ‘하나’의 진리가 불교나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 형태로 표현되고 그 다양한 형태의 종교는 역시 ‘하나’의 진리로 귀일歸一하는 것이다.
종교적 체험이 없는 곳에 종교적 제도가 무성하게 된다. 종교적 제도가 무성함에 따라 종교는 그가 지닌 본래의 의미(중中)를 잃고 형식주의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형식주의는 자신의 내면적 체험보다 외적인 종교적 제도에 자신을 맞추어 가게 한다. 이로써 겉으로는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내면적으로는 자신의 배반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 등의 형식이 인간의 자각을 도와줄 수 있는 조건이나 수단이 될 때는 그 형식은 창조적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기독교인은 신 앞에 선 외로운 단독자單獨者이다. 누구도 자신의 구원을 대신할 수 없다. 불교적 표현으로는 불교인은 자신밖에는 믿을 것이 없는 외로운 고행苦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종교인은 외롭게 사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