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세생생 보살도를 닦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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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송암
2000년 11월 225호
1999년 3월 2일 자정 무렵이었다.
나는 그 때 내 출가본사인 범어사 도량을 거닐고 있었다. 겨울이 꼬리를 마저 감추지 않은 청랭한 밤 기운에 몸을 맡긴 채 서성이며 나는 되뇌이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스승과 영원히 이별해야 하나, 앞으로 어떻게 스승 떠나신 텅 빈 세상을 홀로 살아가야 하나’. 달빛은 왜 그리 밝던지…, 하늘 높이 솟은 둥근 달은 또 하나의 나를 정확히 만들어 주고 있었다. 마음 속 고뇌까지 비춰줄 것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달빛 아래에서, 스승 떠난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 보제루 앞마당을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보면 참으로 인생 잠깐인 것이 이슬이나 번개 같다고나 할까, 열아홉 어린 나이로 범어사를 찾은 것이 1971년 3월이었다. 바로 엊그제 같기만 한 그 때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니, 남쪽의 훈풍이 반갑기는 했어도 바람 끝에는 여전히 찬 기운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스승의 열반을 당하여 범어사 보제루 앞마당을 거닐고 있었을 때나, 서른 해 전 범어사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나 같은 계절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비록 서른 해의 시간이 격해 있기는 했어도 나는 어느새 그것을 훌쩍 뛰어넘어 내 나이 열아홉, 범어사 행자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스승의 열반에 따르는 슬픔에 젖어 탄식의 한숨을 토해내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처음 범어사를 들어서던 때를 회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지 바른 언덕에 진달래가 막 피기 시작하던 삼월이었다. 범어사 경내에 들어서자 멈칫거림 없이 마치 제 집에 온것처럼 나는 곧바로 광덕 스님을 찾았다.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더벅머리 애숭이가 지나가는 어느 스님을 붙들고 광덕 스님 이름을 함부로 들먹였던 것이다. 용케도 그 스님은 크게 야단치지 않고 나를 무사히 스님의 처소까지 안내해 주었다. 예절이나 격식은 몰랐으니 아예 무시한 채 소개장 하나를 광덕 스님께 불쑥 내밀었다. 서울 녹번동의 방울 스님이라 불리던 홍도 스님께 받은 소개장이었던 것이다.
그 길로 나는 후원 공양간으로 배속되었고, 몇 달간 공양주 보조인 국 끓이는 갱두로 있다가 곧바로 공양주로 승진(?)했다. 그리곤 행자시절 대부분을 공양주로 밥하다가 마쳤다. 사실 공양주 소임은 책임이 막중하기 그지없고 무엇보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다. 그 당시 범어사 전체 대중 200여 명의 공양을 하루 세 번씩 준비하노라면 쉴 틈 없이 줄곧 일만 해야 했다. 그 시절만 해도 쌀에 돌이 많이 있을 때라 일일이 손으로 돌과 미를 골라내야 했고, 불 땔 나무나 국거리를 미리미리 준비하고 다듬어야 했으며, 아무리 피곤하여도 아침 저녁 예불은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또 저녁에는 소나기처럼 내리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면서 ‘사미율의’나 ‘초발심자경문’과 ‘습의’를 익혀야 했으니 가히 눈코 뜰새 없이 바쁘기만한 시절이었다.
그래도 꿈은 무한했다. 후원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 행자들이 무려 이십여 명이나 되었으나 일손이 마냥 부족해 허덕거렸는데도, 어떻게든 꾀를 써서 잠시 짬을 내어 동료행자들과 범어사 계곡 넓직한 바위 위에 앉아 꿈을 꾸었다. ‘앞으로 스님이 되면 우리 모두 일체 중생을 인도하는 대도인이 되자’고 다짐하며 약속했는데, 그 때의 그러한 다짐은 지금까지도 우리 도반끼리 회자되고 있는 그 유명한(?) ‘바위 다짐’으로 남아 있다. 그 시절 나는 푸른 하늘을 날며 무한한 꿈을 꾸었고, 창창한 앞날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수놓으며 설계했다. 물론 부귀영화를 기약하는 꿈은 아니었다. 무지무지하게 큰 스님이 되어서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 꿈이었던 것이다.
또한, 아침 저녁 예불시간이 하도 좋아서 어서어서 예불시간이 오기를 기다렸고, 밥하는 사이에도 국 끓이는 사이에도 목탁 대신 부지깽이를 들고 땅바닥을 두드려가며 염불을 익혔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누가 먼저 외우는지 내기를 걸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몰래 한밤중에 깨어서 스님들께 들키지 않게 살그머니 담요를 들고 솟을대문 밖, 너럭바위에 앉아 잠든 삼라만상을 응시했다. 옛 스님들의 공부하시던 장면을 짐짓 흉내 내본 것이다.
그러나 행자시절이 모두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깜빡하는 사이 아침밥이 늦어서 참회를 한 적도 여러 번이었고, 밥에 돌이 들어가 몇 개 없는 노장 스님들의 귀한 치아를 못 쓰게 버려 놓은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저녁공양을 준비하려고 쌀을 씻어 조리로 일고 있는데 누군가 바라보고 있는 듯한 예감이 들어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 같이 높기만 하던 광덕 스님이 쌀 씻는 나를 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며 우두커니 서 있는 나에게 ‘잘 해라’, 한마디 던진 여운이 며칠씩 사라지지 않았는가 하면, 쌀을 씻다가 수채 구멍으로 떠내려간 쌀알 때문에 눈물을 펑펑 쏟도록 꾸중을 듣고 잘못을 빌었던 때도 있었다. 훗날 그 시절을 돌아보며, 그렇게 고달픈 행자생활이 뭐가 좋아서 도중에 이탈하지 않고 사미계를 받았는가, 혼자 웃어 본 적도 있었다.
돌이켜볼수록 초발심의 빛이 있었으며 큰 서원이 있었던 행자시절이었다. 그것은 초발심자가 온 몸을 떨어가며 산 시절, 내면에서 솟아난 환희의 빛이었다. 용화전에 걸려 있는 조사상을 우러러보면서 나도 저와 같은 도인이 되어 세세생생 보살도를 닦아 가리라는 다짐과 서원이 있었기에 말이다. 그 시절 어린 생각에 용화전에 모셔진 조사상을 보면서 저처럼 되리라는 끝없는 희망 속에 앞날을 꿈꾸며 거듭거듭 발심했고, 은사이신 광덕스님을 우러르며 보살도를 맹세했었다.
회고하건대 나의 행자시절은 곧 발심과 맹세의 시간들이었다.
처음 그 시절엔 인생이 무척 긴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그래서 꿈도 많았는데, 이제 다시 돌아보니 그것도 잠깐, 아니 삼십여 년의 세월도 수유런가, 그 시절의 어린 행자는 이미 오십이 다 되었고 하늘로 받들었던 스승은 열반으로 세연을 거두었으니 무상살귀의 냉혹함을 다시 말해 무엇하랴. 다만 안수정등의 법문이 놀랍기만 하다.
여기까지 지난 행자시절 되돌아보던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발길을 돌렸다. 이제 내일이면 다비식을 모셔 이승에서 스승과의 모든 인연을 끝맺어야 한다. 행자생활을 거쳐 사미계와 비구계를 받고, 범어사를 떠난 지도 어언 서른 해, 이제 다시 돌아와 보니 소년 사미승의 꿈을 키웠던 옛 도량은 여전히 포근하고 정겨웠으나 나는 이미 그 때의 소년이 아님을 탄식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남은 시간 무슨 일을 더 하여 인생의 업적을 높일 것인가, 다시 무슨 망상을 더 보태어 부질없는 이름을 떨칠 것인가. 그동안 번거로웠던 일체사를 고요히 내려놓고 다시 행자시절, 기쁘기만 했던 초발심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남은 인생을 진정한 출가수행자로서 살도록 하자.
기쁨을 갖고 가슴 속에 자비를 담고 살자.
헛된 공적을 쌓고 티끌 같은 이름을 길이 전하기 위해 살아서야 되겠는가.
물처럼 달처럼 낭연하고 무심하게 살자. 순수하고 겸허하게 살자.
출가수행자로서, 아니 행자시절 가졌던 꿈과 뜻으로 마지막까지 사는 것이 앞으로 남은 인생의 과제이고 ‘바위 맹세’의 실천이리라.
내가 죽고 난 뒤 과연 내 모습을 그려 누군가 용화전에 걸어 줄까.
내 모습을 보고 누가 발심할까.
내 인생을 보고 아무도 감동하지 않는다면 수행자로서 헛되이 세월만 보내고 농부가 땀흘려 지은 밥만 축낸 것이 아닌가.
무섭고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