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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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담는 오솔길 - 진명
2000년 11월 225호
쌀쌀해진 기온은 산을 물들게 하고 들녘에 은빛 억새풀의 춤이 가득한 요즘이다. 늘 반복되는 도심의 일상이 지리하게 느껴질 때 이른 새벽 법당 앞 마당에 서서 어둠을 헤치고 밝아오는 아침 햇살을 만난다. 어제의 빛이 아니고 내일의 빛도 아닌 오늘만의 빛을 바라보며 다시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이다.
날마다 아침이면 음악으로 청취자를 만나는 게 요즘 나에게 주어진 소임이다.
부처님 말씀과 수행자의 삶의 향기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시간… 나에겐 어쩌면 특별한 수행의 시간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이면 오늘은 어떤 음악과 함께 청취자를 만날까를 고민하는 게 하루의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음악과 함께 하게 되었다. 책을 읽거나 휴식하며 차를 마시는 시간에 듣게 되는 음악이 있는가 하면 차 안에서 가볍고 편안하게 듣기 좋은 음악이 있다. 또 여행을 하면서 함께 떠나고 싶은 음악도 있다. 수행자에게 때론 음악이 소음이 될 때도 있지만 삶에 있어서 공기와 빛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다면 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소리의 높낮이를 아름다운 소리로 조화롭게 만들어서 우리는 음악이라고 하고 있지만 진정 아름다운 음악이라면 자연의 조화에서 생기는 음악의 소리만큼 아름다운 음악은 없을 것이다.
강원시절 금당에 앉아 운무가 휘도는 비로전을 마주하는 것은 산중에 사는 수행자의 행운이었다. 해탈교를 지나는 물소리와 휘몰아치는 바람에 못 이겨 사선으로 내리는 빗소리며 묵은 기왓장을 타고 내려와 마침내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자연의 소리는 그 어떤 장중한 오케스트라 음악보다도 더 웅장하고 장엄한 음악이었다. 때론 피아니시모로 숨을 죽이게 하는가 하면 때론 거세게 몰아치며 퍼붓는 빗소리가 포르테시모로 가슴을 후련하게까지 연출했던 것은 정말 멋진 음악이었다. 아마 산에 사는 스님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일이지만 그나마 마음 안의 귀로 자연이 들려주는 음악을 들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까. 그 이후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이 있었다. 지나는 바람소리며 고요하게 내리는 가랑비 소리까지도 예사롭지 않았고, 새 봄에 나뭇잎 피어나는 소리며 가을에 낙엽 지는 소리까지도 나에겐 삶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소중한 소리의 환경이다.
이런 쌀쌀한 가을 아침, 맑은 차 한잔을 마시며 Johann Sebastian Bach의 Partitas for Violin Solo를 Viktoria Mullova의 Violin 연주로 자주 듣는다. 많은 연주자들이 이 곡을 연주했지만 Mullova가 연주하는 선율이 가을 아침 시린 햇살에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색과 잘 어울리는 연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긴 여름을 인내한 당당함과 시린 공기의 냉정함, 어둠을 열고 나타난 아침 햇살의 따사로움까지 담고 있는 연주이기도 하다. 그리고 절제된 질서가 있는 연주라 수행자로 사는 내 시간 안에 더 가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방안에 차 향기와 음악의 잔향이 사라지기 전에 집을 나설 때 그 풍요롭고 개운함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문을 나선다. 나에게 주어진 24시간을 무엇을 위해 보람있게 쓸 것인가를 생각하며 만들어가는 하루가 내일로 가는 단단한 징검다리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생활의 질감과 향기가 달라지는 것이 바로 삶의 묘미라면 오늘은 좀더 담박한 향기가 충만하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