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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찾은 봉화 북지리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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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여화 - 정영호 2000년 11월 225호
경상북도 영주의 부석사는 고려시대 건축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조사당벽화, 소조여래좌상 등 국보로 지정 보존되고 있는 문화재가 많이 있어 불교문화재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불교미술을 공부하려 할 때 누구든지 이곳을 여러 번 찾게 된다.

필자가 부석사를 처음 답사한 것은 서울 수복 직후인 1953년도 늦가을이었다. 당시 모든 사정이 어려운 때였으므로 부석사 가는 길도 풍기역에서 내려 자갈이 가득한 신작로를 여러 시간 걸어 갔었다. 그래도 그 때는 걷는 일이 당연하였으므로 오히려 차를 이용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1959년도 숙명여고 역사교사로 재직할 때 사진반과 사생반을 지도하며 다시 부석사를 답사하게 되었는데 여러 해 전에 스님으로부터 전해들은 북지리 마애불 생각이 문득 나서 부석사로부터 동남쪽 북지리 마을을 찾아갔었다. 동리 어른들에게 큰 바위에 새겨 놓은 부처님, 즉 마애불상의 형태를 설명하며 물어보았으나 그러한 부처님은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몇 년 전 스님의 진지한 말씀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아 묻고 또 물었으나 마을 분들은 오히려 짜증까지 내는 것이었다.

다음해 또 한 번을 찾아가 북지리 일대를 살폈으나 마애불상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몇 번을 답사하는 동안 마을 어귀에서 석불좌상과 광배석, 옛 암자터 등 여러 가지 불교유적을 찾고 살필 수 있었으니 이것은 뜻하지 않은 수확이라 하겠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북지리 마을에서 제일 연세가 높은 어른에게 ‘북지리에 큰 마애불이 꼭 있다’고 스님에게 듣고 왔다고 하였더니 나의 간곡한 표정을 한참 보다가 “혹시 봉화군 북지리가 아니냐”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의아하여 북지리가 이 곳 말고 또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어른은 여기는 영주군 부석면 북지리이고 또 한 군데 북지리는 “봉화군 물야면의 북지리”라는 것이었다.

순간 멍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마음으로 물야면 북지리의 위치, 가는 길 등을 소상히 이야기 듣고 마을을 떠났다.

일단 부석면을 거쳐 봉화쪽을 향하여 걷는데 얼마쯤 갔던지 영주군과 봉화군의 군계郡界에 이르렀다. 주막에서 쉬며 봉화군 물야면을 물어보니 여기가 물야면이지만 소재지는 한참 더 가야 된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걸으면 해질 무렵까지는 도착할 수 있다기에 뛰다시피 걸음을 재촉하여 해가 있을 때 물야면 소재지에 다다랐다. 단 한 집뿐인 여인숙에 여장을 풀고 앞개울에 나가 땀과 먼지투성이인 몸을 씻고 하룻밤을 지냈는데 이 곳에서 북지리는 한나절 길이라는 것이다. 다음 날 큰 희망을 품고 북지리를 찾아 큰길가의 주막에서 농주로 시장기를 때우고 주모가 일러준 수월암水月庵을 갔더니 그 곳의 보살이 저 건너편 큰 바위에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하여 한숨에 달려가 마애불 앞에서 덮썩 큰절을 하였었다.

이 마애여래좌상의 정확한 위치는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657-1이며 국보지정 소재지로서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불상은 결가부좌하였는 바 양각陽刻한 두께(레리이푸)가 강하여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데 각부의 조각이 다소 마멸되고 광배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고고高古한 수법이 주목된다. 암벽으로부터 1.7m 이상으로 양각한 좌상이 중앙에 위치하고 그 좌·우 뒷벽에는 화불化佛이 상·하로 2구씩 배치되었는데 오른편 윗부분의 화불이 반쯤 파손되어 아쉽다.

현재의 앉은키가 3.45m의 거대한 불상인데 무릎 밑이 매몰되고 석단이 축석되어 있으므로 밑부분까지의 실제 높이는 4m 이상으로 추정된다. 머리는 약간 숙이고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으며 백호는 표시되지 않았다. 양쪽 귀는 어깨 위까지 길게 늘어졌고 양쪽 눈썹과 눈, 코, 입술 등에 다소 마멸이 보이나 입가에 미소가 어리어 있고 상호가 원만하고 부드러워 자비가 넘쳐 보인다.

법의는 양쪽 어깨에 걸친 통견通肩으로 가슴 부분에서 원호형圓弧形을 그렸고 양쪽 팔에 걸친 의문이 양옆으로 늘어졌는데 그 주름의 선이 아주 굵어 보인다.

수인은 전면이 파손되어 분명하지 않으나 법의法衣 의문이나 주름 등으로 미루어 보아 오른쪽 손은 가슴에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오른쪽 머리 뒷부분과 두광頭光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왼쪽 부분이 완전하여 본래의 형태를 복원 고찰할 수 있으니 곧 보주형寶珠形 두광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중심에는 머리 주위에 연화문을 조각 장식하였다. 이 밖의 두광부는 내곡內曲되고 굵은 원형의 테로 내·외를 구분한 흔적이 보이며 주연에는 화염문이 분명하다. 외곽에는 화불을 조각하였는데 정상에 1구를 배치하여 현재는 4구뿐이나 본래는 도합 7구의 화불이 배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각 화불은 같은 양식과 수법으로서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합장하여 보주형 두광을 구비하였는데 특히 오른쪽 밑부분의 화불 두광에는 두 개의 원을 돌려 3구분한 것이 보이고 이 밖의 화불 간지間地에는 화염문이 장식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 불상은 암벽을 따라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자연 암벽을 깊이 2m로 파서 다듬고 만든 감실龕室 안에 봉안되었으니 이러한 감실 의장意匠의 유례로는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慶州南山佛谷石佛坐像(보물 제198호), 충청남도 태안군의 태안마애삼존불상泰安磨崖三尊佛像(보물 제432호) 등을 들 수 있다이와 같이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서 조사한 마애불상을 살펴보았는데 이 마애좌불상은 조상형식이나 법의 의문, 세 부분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이 곳에서 가까운 영주 시내의 가흥리마애삼존불상可興里磨崖三尊佛像(보물 제221호)과 신암리마애삼존석불新岩里磨崖三尊石佛(보물 제680호) 등의 각부와 흡사하다고 하겠다.

이 봉화 북지리의 마애불좌상은 삼존상의 형식은 아니라 할지라도 조각된 모습에서 고태古態를 느낄 수 있어 같은 계보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마애불좌상은 온화하고 원만한 상호라든가 법의와 두광의 형식, 화불의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조성연대를 7세기 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불상은 이후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奉化北枝里磨崖如來坐像이라 칭하며 국보 제201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