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한 수행에 유사한 목표
필자가 늘 관심을 두었던 것은 일반 윤리보다도 양쪽 종교의 수행자들의 생활이다. 나는 거의 40년 전에 한국에 도착한 한 카톨릭의 수도승으로 호기심을 끌었던 것 또는 매력을 느꼈던 것은 사찰과 승려들의 생활이었다. 양쪽 수도자들의 수행을 비교해 볼 때 유사한 것들을 너무 많이 발견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상 서로간의 영향이 있었다는 고증이 없는 것을 감안해 보면 생활양식의 유사점에 대해 더욱 궁금해진다. 수행방법이 비슷하면 수행의 목표도 비슷하지 않을까?그렇지만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카톨릭 수도자와 불교의 승려에게 왜 이런 길을 택했는가 물어본다면 그 대답이 상당히 다를 것이다. 그리스도교 수도승에게 왜 수도원에 왔느냐 물어볼 때 하느님과 예수를 빼놓을 수 없으며 은총恩寵과 성소聖召와 순명順命 같은, 불교도에게는 아주 생소한 말들이 나올 것이다. 기본적으로 카톨릭 수도자는 예수를 따르고 섬기기 위해 이 생활을 택했다고 말할 것이다. 불교의 승려가 내세우는 동기는 그와 아주 다를 것이다. 성불, 해탈, 열반 등 그 모든 단어들은 역시 그리스도인에게 낯선 것들이다. 그런데 수단이 같은 경우에 목표가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수행자들의 공통된 생활양식을 간단하게 묘사해보자. 그들은 우선 출가자들이다. 즉 그들은 사회를 등지고 결혼과 성생활을 포기한다. 또한 그들은 재산을 포기하고 무소유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그런 생활 양식을 유지하기 위하여 계율(불교) 또는 수도규칙(천주교)을 지킨다. 이렇게 비슷한 삶을 택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교리상의 개념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더 깊은 열망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그것이 자유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다. 물론 이것을 해방이나 해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를 얻는 것이 수행자들의 최고 목표이다. 그 자유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다.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하여 온갖 탐욕을 끊어야 한다는 진리는 종교인들의 공통된 지혜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부처나 예수가 똑 같이 가르쳤다. 물론 그 표현 방법이 서로 다르다. 부처는 자아의 존재까지 부인하면서 자아가 있다는 착각에서부터 벗어나라고 외쳤다. 예수의 어투는 그와 다르다. 그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입니다.”(마르코 복음 8장 34-35절)라고 말했다. 여기에 나오는 ‘버린다’는 단어는 본래 부정(deny)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철학이 달라도 표현은 거의 같다. 더구나 오직 자아부정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그 가르침은 동일하다. 부처와 예수의 이 동일한 가르침은 보편적인 것이다. 즉 모든 인간에게 자유 내지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자기 중심의 태도를 버리지 않고서는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더 철저하게 자아포기의 길을 걷기로 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양쪽의 철학이 달라도 일정의 종교가 고도에 올라가면 출가하여 사회적 위신, 개인의 소유, 가정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 같다. 이들이 서로 만날 때에 동료처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불교의 스님들과 천주교의 수도자들이 서로 동반자로 환영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상호간의 보완
양쪽 수행의 기반을 출가라고 부르면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로간의 철학과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 수행에 들어가면 많은 차이점을 보게 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한 예를 들어서 불교에서는 육체의 절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술과 담배 뿐 아니라 육식까지 금지된다는 것, 스님들이 가끔 실행하는 고행을 볼 때 필자는 우리 카톨릭 수도자들이 그런 면을 너무 소홀히 생각하지 않는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옛날 서양의 수도승들이 육식을 삼가하며 단식과 고행을 많이 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데 요즈음 천주교에서는 육체의 극기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너무 무시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교리상의 차이도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언제나 독신과 무소유 그리고 모든 육체적 고행보다 순종 곧 뜻의 포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남의 말을 하느님의 말처럼 듣고 따라감으로써 자기 자신을 가장 철저하게 버릴 수 있고 따라서 가장 효과적으로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은 항상 순종의 약속과 실천을 놀랄 정도로 강조해 왔다. 이것이 불교 수행과 그리스도교 수행 중에 가장 큰 차이가 아닌가 생각한다. 천주교 수도자들은 불교 스님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볼 때에 부럽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안에 참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신념 때문에 한 번 선택한 길에서 정진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불교의 수행과 그리스도교의 수행에는 비슷한 점도 많고 서로 다른 점도 많다. 필자의 소견으로 그것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라는 초대일 뿐이다. 세계화 시대에는 불교가 동양의 종교이고 그리스도교가 서양의 종교라는 것이 지나간 날의 이야기인 것 같다. 달라이 라마가 유럽에서 받은 환영도 그것을 증명해 준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종합종교가 생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의 신념을 지키면서 수행방법 면에서 서로에 대하여 많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서로의 수행을 보면서 선의의 경쟁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타종교 수행자들의 열성을 볼 때 더욱 큰 정성으로 자기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경제 제일주의와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밝은 희망과 빛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