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무수무량無數無量이다. 무수무량이니 그 어느 것도 진리랄 것이 없다. 매일 아침 동쪽하늘에 떠오른 해가 서쪽하늘로 빛을 다함이 무수무량이었을 것이며, 서해바다 일렁이는 파도가 모래톱을 오르고 내린 것도 무수무량이다. 막막한 하늘에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기도 이미 셀 수 없으며, 모이고 흩어짐으로 계절이 지나기도 헤아릴 수 없다.부처의 앞에는 무엇이 있었으며, 또한 조사祖師의 앞에는 무엇이 있었을 것인가.
모든 부처와 조사의 깨달음의 앞과 뒤에는 아무런 그림자도 없었거니와 그 깨달음으로 얻은 바도 혹은 줄은 바도 없다. 중생의 미혹함으로는 알지 못하는 것이 진리의 세계이니 그 나이를 알 수 없는 만수산萬壽山을 찾아 헤아릴 수 없는 무량사無量寺를 창건한 범일梵日 스님의 마음이 무수무량에 있다.
신라 말 사굴산문堀山門의 개산조인 범일梵日스님이 무량사를 창건하고, 오층석탑은 그 후 고려 초 조성되었다. 탑의 모양은 부근 부여 정림사지 탑의 우아한 모습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탑 앞에는 석등이 함께 조성되어 꺼지지 않는 진리의 빛을 중생에게 전한다.
무량사에는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 개산조인 무염無染 스님이 주석하기도 하였다. 그 후 조선 초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과 진묵震默 대사 역시 무량사에서 진리의 불빛을 보았다.
매월당은 이곳 무량사에서 주석하다 세상과 마지막 연緣을 놓았고, 진묵 대사는 무량사 극락전 무량수 아미타불의 점안點眼을 집전하였다.
하늘은 이불, 땅은 요 삼아/ 산을 베개하여 누웠으니/ 달을 촛불, 구름은 병풍/ 서쪽 바다는 술항아리가 되도다./ 크게 취하여 문득 춤을 추다가/ 내 장삼을 천하 곤륜산에 걸어두도다.
무량사 아미타불에 점정點睛하고 진묵 스님께서 펼친 시심詩心이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마음의 크기가 아닐 수 없다.
무량사 탑이 조성되고 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매월당과 진묵 스님이 그 탑에 합장하고 진리의 세계를 펼친 것도 이미 오백여 번의 가을이 지났을 것이다. 육십 년 짧은 인생에 비한다면 이 또한 무수무량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