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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무엇을 어떻게 회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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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진월 2000년 10월 224호
오랜 방랑 끝에 돌아온 고향인들 그리 친근했을까. 초겨울, 해질 무렵이었다. 홍류동 골짜기는 비었으나 넉넉했고, 골짜기를 두르고 있던 가야산은 말이 없었으나 기백이 있어 보였다. 초행길이었음에도 계곡이며 산세가 그리도 따뜻하게 마음에 감겨왔던 걸 보면, 어느 생에선가 그 곳을 수없이 지나쳤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해인사에 가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냥 무작정 떠나온 길이었다. 전형적인 유교집안에서 자랐으니 출가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해인사에 들어온 순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그 다음날 바로 행자가 되었다. 서른두 해 전 내 나이 열아홉의 끝에서, 그렇게 나는 청춘을 다 바쳐 전력투구했던 수행의 길에 들어섰다.
행자시절은 평생 수행자로서 살아가야 할 인생관이 정립되는 시기며 중노릇의 기틀이 잡히는 때이기도 하다. 행자시절 이후로 오랜 체험과 안목으로 되돌아볼 때, 그 시절 참으로 귀한 시간을 가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귀한 시간 속의 첫 장면은 종무소에서 마주했던 지월 스님과의 만남이다. 행자가 되면 먼저 후원에서 공양주로 일하는 게 상례인데 어쩐 일인지 사중에서는 나를 종무소 시자로 일을 시켰다. 해서 절 안팎으로 오가는 문서수발이나 손님접대 등을 하며 잠도 종무소에서 혼자 잤는데, 어느 날부터인지 밤이면 지월 스님께서 내 방에 들르시는 것이었다.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보면 지월 스님은 달빛 아래 조용히 서 계시곤 했다. 마치 월하노인처럼. 스님은 깊은 밤 나를 혼자 앉혀 놓고 ‘초발심자경문’을 일러 주셨다. 그리곤 옛 선사들의 얘기에서부터 도 닦는 얘기, 중노릇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많은 얘기를 들려 주었다. 성품이 소탈하고 일상생활 자체가 선적이었던 스님의 깊이 있는 말씀은 내가 수행자로서 살아가는 데 정신적 자량이 되었다. 그 때 스님께 받았던 은혜에 대한 감사는 평생 내게 ‘?
置敾愍?성취와 보람을 어떻게 회향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가슴에 품게 했다.
67년부터 총림을 이룬 해인사는 그 당시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이 주석하고 있었다. 종정이셨던 고암 스님을 비롯해 방장 성철 스님, 수좌 석암 스님, 선덕 혜암 스님, 그리고 율주 자운 스님과 일타 스님 등이 계셨고, 지금 해인사 방장으로 계시는 법전 스님은 극락전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강주 스님은 지관 스님이었고, 지월 스님이 주지소임을, 지금 송광사 방장이신 보성 스님이 교무소임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받았던 훌륭한 스님들의 인상은 어디 지월 스님 한 분뿐이었겠는가. 그 시절 나는 짜임새 있게 이뤄진 총림의 훌륭한 수행자들을 목격하면서 다양한 수행방법에 대한 가능성을 개진할 수 있었고, 수행에 대한 열기와 생동감, 그리고 엄정한 정신이 살아 숨쉬던 곳에서 행자시절을 보내고 강원을 마치며 평생 수행자로서의 기틀을 세웠던 것이다.
선임행자시절, 매일 저녁 대적광전에서 예불 후에 다른 행자들과 함께 108참회문을 읽으면서 뜨겁게 달구었던 신심도 잊을 수 없다. 예참을 올릴 때, 끝 부분에 나타나는 보현행원을 염송하면서, 그 거룩하고 위대한 원력에 헤아릴 수 없이 감격했던 것이다. ‘그래, 나도 보현보살처럼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도록 세세생생 목숨 바쳐 수행하리라’ 다짐하며 초발심을 다졌던 것이다. 알려진 것처럼 행자시절에는 사찰예절과 생활방식을 배우고 익히며 의식주 문제 해결 등 평생 중노릇하는 데 필요한 것을 배우는 시기이다. 종무소에서 혼자 지내던 나는, 음식 만드는 법도 배우고 싶고 다른 행자들과 어울리며 탁마하고 갖가지 일을 익혀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아쉬움을 갖고, 원주 스님께 후원에 가게 해달라고 청을 해서 갱두 소임을 보기도 했다. 후원에서 국 끓이는 일을 하며 여름 안거 한철을 보냈다. 그 후 나의 행자시절은 방장실 시자로서 마무리하게 되었다.
언동이 짱짱하고 온몸에 기품이 서려 있던 성철 스님의 수발을 들고 수행비서 노릇을 하는 도중, 어느 날 밤 삼천배를 하고 새벽에 화두를 받았다. 그 후 끊임없이 여덟해 동안 씨름하여 그 숙제를 풀었다. 방장실이 선원에 있었으므로 자연히 나도 참선을 익히게 되었다.
선원스님들은 곧잘 정수리가 솟아오른 내 머리통을 보고 도골이라고 하며 전생에 수행을 많이 한 징표라고 칭찬하고는 참선을 하면 쉽게 도를 틀거라는 등 격려의 말씀들을 해 내 신심을 더욱 북돋워주기도 했다. 큰스님을 모시고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좌들을 보며 수계 후에는 곧바로 선방에 가야지 했으나, 처음 입산 당시 강원에서 들려오는 글 읽는 소리에 매료되었었고 이미 치문을 배우고 있던 터라, 강원을 졸업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 그 뒤 강원을 마치자마자 선방으로 갔다.
고암 스님께선 퍽 나를 아끼셨는데, 수계산림 때 사미계를 받기 전에 내 법명으로 도원道元과 도윤道允을 제시하시며 두 이름이 다 좋지만 마음에 드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라고 하시기에 나는 도원을 취했다. 그 후 8년 만에 법호로 진월眞月을 인가하셨다. ‘80년에 비로소 세상으로 회향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학교육사정을 잠시 둘러보고 싶어서 동국대학에 잠시 다녀보려고 등록을 하고는 인사차 뵈러 간 내게, 스님께서는 ‘자네는 선림의 선지식이 되길 바랐는데…’ 하시며 크게 아쉬움을 보이시던 기억도 난다. 물론 나중에 내 공부가 불법의 참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려 하는 원력임을 이해하시고, 특히 처음으로 국정자문회의에 다녀오신 후에는, 사회 사람들을 구제하려면 세상물정에 밝아야 되니 ‘기왕 공부하려면 박사가 되라’고 격려해 주시긴 했지만 말이다.
요즘 나는 때로 생각해 본다. 가능하다면 산중으로 돌아가 내가 과거에 겪었던 수도원 분위기에서 그 시절 선지식들이 내게 심어 주었던 것처럼 새로 출발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수도자정신을 심어 주고, 실존적인 해탈에 대한 공부를 도와 주고 싶은 생각을 해본다. 물질문명의 발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신문화가 부실한 이 시대, 종교인 나아가 수도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중노릇을 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세상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종교인의 사명감을 지닌 수행자는 개인의 성취 뿐 아니라 불교공동체, 나아가서는 세상에 필요한 선지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지혜와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수행에 투철해야 할 것이다. 수행에서 나온 지혜로써 사회를 위해 회향하는 것이 오늘날 수행자의 몫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옛 선지식들이 지녔던 전통정신의 구현과 현대를 포괄함으로써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할 때甄? 그러므로 부처님의 참뜻을 상황에 적응시킬 수 있는 이가 오늘날의 선지식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되돌아봐야 할 때다. ‘무아無我’를 내세우고 ‘탈속’을 얘기하며 더 집착하고 더 갖고자 하는 것!
은 아닌지를 말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서울 목동의 법안정사에서 매주 일요일 법회를 보는 외에, 토요일 오후마다 다른 종교인들을 포함하여 대화와 명상의 모임을 갖고 있는 것도 또한, 그 동안 내가 국내외를 두루 다니며 보고 듣고 공부한 다양한 경험을 세계적 안목에서 함께 나누기 위해서이다. 또한, 자신의 존재와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눈을 틔워 주는 일이 내가 행자사절부터 선지식들에게 받은 은혜를 다시 회향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전통과 현대를 균형 있게 아우른, 그리고 동서의 지혜를 고루 갖춘 이 시대의 선지식으로 세상에 서 있길 늘 발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