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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 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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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정 보덕행 2000년 10월 224호
가을은 햇것들의 완숙과 그 햇것을 키워 낸 모체의 소멸에서 온다.
어디 이 가을에 햇것이 콩뿐이랴 마는 유독 햇콩에 가 닿는 나의 체감은 어떤 가을의 비유보다도따스하다. 그래서 매년 근교 오일장에 들러 햇콩 두어 되를 사다 두고 묵힐 대로 묵히다 콩밥을 해 먹는 게으름을 반복하기도 한다. 그 때마다 만나는 촌로들이 장바닥에서 다 해도 닷 되가 되지 않는 햇콩을 파는 모습조차 눈물겹다.
남보다 다소 늦은 사춘기. 세상에 눈 뜨이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집 가까이에 절을 드나들던 때다. 절은 자상한 스님과 인심 좋은 공양주 보살 덕분에 내 집보다 더 편한 곳이었다.
도심 중앙에 자리한 덕분에 절 살림은 넉넉했다. 또한 불심 지극한 신도들이 많은 도량이어서 제철 과일이며 음식 공양이 늘 끊이지 않았다. 이런 절에 해마다 가을이면 일년에 딱 한번 오면서도 정말 하찮기 그지없는 공양물을 신주 단지 모시듯 해 오는 분이 있었다.
단정한 쪽머리에 한 자락 빠져 나옴 없이 깔끔한 모습의 노보살님!차림으로서는 공양주 보살이 일러 준 대로 ‘시내에서 두부공장을 하는 보살’이라는 말이 무색한 반가班家의 노마님이었다. 노보살 손끝에서 한 알 한 알 가려내진 잘 생긴 햇콩으로 정성을 다해 마련해 온 뽀얀 두부며 비지를 채 김이 가시기도 전에 콩나물 한 시루와 함께 올리던 소박한 불심! 공양주 보살은 모난 콩 하나 없는 콩나물을 시루에서 뽑아내며 매년 똑같은 탄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철없는 나로서는 콩나물과 두부는 제쳐 두고라도 속가에서조차 허드레 음식에 지나지 않는 비지 공양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노보살은 비지만은 꼭 공양주 보살에게 건네며 한 가지 당부를 덧붙이곤 했다.
“묵히지 말고 저녁 공양에 스님네들 꼭 잡숫게 해 주이소.”라고노보살이 단백질이 부족한 사찰 식단을 보충해 주려는 심중은 아닐 터이고… 그렇다면 내 생각으론 주지 스님께서 비지를 각별히 좋아하시나 보다라고 나름대로 지어내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해이던가 공양주 보살이 출타 중인 절에 노보살님이 예의그 가을공양을 올려 왔다. 나는 은근히 비지를 누가 인수받을 것인지 염려되었다.
노보살은 후원에 들러서야 공양주 보살이 출타 중임을 알고 비지 인수의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학생! 너 밖에 아무도 없나?” 할 수 없다는 듯 노보살은 비지 인수 인계 때 빼 먹지 않는 당부를꼭 공양주에게 전해 줄 것을 다짐받고서야 나에게 비지를 건네 주었다. 나는 비지 공양의 석연치 않은 의미를 공양주 보살이 돌아오자 물어 보았다. “두부공장 보살님 말씀은 스님들께서 비지를 잡수시고 싶어도 누가 하찮은 비지를 공양으로 올리겠냐면서 그래서 비지를 두부보다 더 공들여 만들어 온다는 거라.” 가벼운 요량으로 비지를 저울질한 나의 마음이 죽비를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나는 공양주 보살을 통해 노보살님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노보살의 후일담은 더 아름다웠다. 돌아가신 후 시장에서 좌판 장사를 하는 아낙이 문상을 와서는 노보살님의 자식들도 모르고 있던 이야기를 하더라고… 어려운 시장 사람들에게 두부며 콩나물을 나눠 주었는가 하면 땔거리가 떨어져 추위에 떠는 어느 집에는 연탄을 사서 들여주기까지 한 노보살의 이야기는 절에서 얻어 먹던 그 뽀얀 비지찌개보다 더 따뜻한 온기로 내 가슴을 덥혔다.
그 후 수년이 지나면서 나는 까맣게 두부공장 노보살님의 비지 공양을 잊고 살았다.
젊음은 안을 들여다 보기엔 너무나 자신만만한 오만을 품은 탓일까?비지 공양을 잊고 살면서 나는 시시콜콜 인연을 공부하기에는 정신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과 인연을 지으며 살았다. 마치 ‘인연 따위가 뭐 대수인가’라며 항변이라도 하듯이 절을 잊었다.
그러다 결혼을 앞두고 다시 한 번 노보살님의 비지 공양이라는 죽비를 세차게 내려 맞았다.
주지 스님께 결혼 인사차 절에 들르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스님께선 나의 결혼 소식을 미리 아시고 계셨다면서 일러 주셨다. “알고 보니 네 시댁 될 댁이 내가 아는 집안이더라.
너도 알지? 비지 공양 올리던 두부공장 노보살님… 그 집 막내아들이 신랑이라문서…” 그 때까지 나는 어른을 모두 여읜 막내아들인 신랑의 집안이 예전에 두부공장을 했었다는 말을흘려듣고 있었다.그 후 결혼식을 마칠 때까지 며칠 동안 노보살님은 늘 내 머리 속에서 비지를 건네 주는 모습으로 계셨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노보살님 아니 시어머니 산소에 들렀다.
그 때서야 마음 공부 부족한 나를 이렇게 당신 며느리로 인연 지어 꾸짖고 계신 뜻을 알아채고 눈물을 일렁거렸다. 함께 온 시댁 형제들로서는 이유 모를 나의 눈물바람… 착한 며느리 보았으니 이제 한 걱정 놓으시라며 시어머니를 위로하는 바람에 나는 저고리 고름 끝으로 눈물을 꾹꾹 찍어가며 산소를 내려와야 했다.
올해는 가을 장마가 길어 아직은 햅쌀도 햇콩도 흔치 않다. 생전에 즐겨 드셨다는 비스켓을 기도방에 놓인 시어머니의 사진 앞에 올려 놓는 남편을 보면서 비록 비지 공양은 올리지 못하지만 잘 닦는 마음 공부로 내 곁의 세간을 아름답게 할 서원을 시어머니 영전에 다시 한 번 올리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