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또다시 가을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이달의 이야기 - 이 심우행 2000년 10월 224호
아직 한낮의 볕은 남국의 열기를 잃지 않고 따가워 알곡 여물리는 일이 한창인 벼는 고맙겠지만, 그래도 가을은 가만가만 마을로 들판으로 걸어 내려와 천지를 덮으려 하고 있다.
한여름 무성히 자라 올라 길을 지우던 풀들도 자라기를 멈추고 제 속에 검고 단단한 씨앗을 품기 시작하면, 건조한 바람에 마른 잎사귀 이리저리 흩날리지 않아도, 이미 마음은 가을 맞을 준비를 끝내는데, 앞마당에 꽃 달고 한여름 주홍으로 타오르던 참나리꽃대도 이때쯤 갈색으로 슬슬 마른다.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뿌리로 돌아가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세월 속에 밀쳐 두었던 그립고 안타까운 것들을 가을볕에 끄집어내 보기도 하는데, 그럴 때쯤은 왜 견딜 수 없이 어머니 생각이 더 간절해지는지…….

억새 밭에 꽂히면 하늘거리는 억새 꽃들 하늘 한쪽 지운다 그 잎새 가까이 가면 어머니, 그 손마디가 만져진다 까슬까슬한 이파리에 눈을 대보면 내가 알고 있었던 세상이 그 누런 잎새보다 작다
모든 것이 지고 있는 계절
예순 일곱의 어머니는
가을이다

언제든
질 준비를 하고 있다

- 이대흠, 『어머니는 가을이다』 ( 계간문예 《다층》 1999 가을호)
우리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루한 여름 건너가는 법을 몸소, 굵은 손마디 살로 증명해 보여 주시던 분이셨으니, 이 가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당연한 것이리라.
한여름 폭염 아래 논밭에서 흘린 어머니의 땀방울이 풍성한 가을을 거느리고 온 것이니.
돌아갈 길 보며 바람에 모든 것 맡기고 허연 머리칼 나부끼는 어머니를 필연코 만나게 해 주는 가을은, 하여 쓸쓸하다.
수고로운 생이 마무리되는 자리, 까맣게 여문 씨앗 속에는 저 혼자 쓸쓸히 돌아가야만 하는 길이어둡게 숨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머리를 하늘로 둔 목숨들은 누구나, 지나온 길이 느닷없이 의심스러워지고 왜 사는지 어리둥절해지는 것이리라.
얼마 전, 부득불 시골에서 시내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혼자 몸이라 워낙 짐이 없어, 이사 같지도 않은 이사였지만 그래도 이사는 이사인지라 혼자 청소하고 짐 나르고 하다보니 몸이 천근보다 더 무거워 끙끙거리다가 이까짓 일에 운신을 못하는 나 자신이 하도 한심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애들 소꿉살이 장난감만큼이나 무게 없는 홀홀 단봇짐에도 휘둘리는 내 꼴이라니! 살 때는 잘 몰랐는데, 몸뚱이 빠져나간 자리 둘러보니 참 을씨년스러웠다.
산다고 살아도 참으로 허술하게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어리석으면 언제나 길은어둡고 고달프기 한량없는 것, 먼지구덩이 속에서 파묻혀 살 때는 몰랐다.
내가 얼마나 줄거리 없이 어수선하게 에둘러 살고 있었는지.
구석구석 끼여 있던 수북한 먼지들하며, 한 때는 꼭 필요해서 목숨처럼 아끼던 그러나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버려 둔 많은 잡동사니들하며, 소용없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또 싸 놓은 후줄그레한 짐 보따리들하며…… 이번만큼은 이 아둔함 꼭 가르치고말겠다는 듯, 이사하는 동안 내 앞에 놓여진 시간은 제법 독한 것이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의 매운 맛이려니…….
그 때, 난 한여름 불볕과 몇 차례의 바람을 못 견디고 떨어져 내리던 풋감들을 기억해냈다.
설핏 부는 바람에도 섣불리 툭툭 떨어져 내리던 주먹만하던 감들, 그 속에 아무리 씨앗 품고 있어도 덜 여문 풋감은 모두 허옇게 썩었다. 그러나 어려운 시간을 제 힘으로 이겨낸 튼실한 것들은 더 단단한 씨앗을 품고 이제 볼이 불그레해져가고 있다.
그렇다. 결코 자연은 덜 익은 것들을 데리고 가을을 부르지 않는다.
덜 여문 것들이 시간 아무리 재촉해도 일없다. 썩혀버리지 새 생명 다시 주지 않는다.
이 가을, 여문 씨앗들 앞에 두고 나 얼마나 여물었는지, 돌아갈 시간이 언제인지 한 번 가늠해봐야겠다. 수천 번 수만 번 왔다 가며 사람들을 데려오기도 하고 데리고 갔을 가을이 또다시 곁에 와 있다, 아, 우치又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