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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방귀放歸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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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성환 2000년 10월 224호
녹음이 짙었던 앞산이 어느새 색이 조금은 퇴색되어 있다.
여름보다는 떠오르는 태양이 직광이 아닌 비껴 뜨는 햇살이라서 훨씬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이고 물빛 또한 청아하다.
그간에 가을이 몇 번이나 지나고 앞으로도 해를 거듭해서 항시 맞이해야 할 계절.
여름엔 뼈속을 저리듯이 시린 물이 얼마 전부터 따뜻한 기운을 낸다.
워낙 가을날씨와 노인네의 기운은 믿지 말라는 속설이 있듯이 가을의 날씨는 변덕스러워 볕만 좋으면 가을준비에 여념이 없다.
해마다 이맘때면 참 바빴다.
햇볕이 유난히도 잘 솟아오르는 아침이면 분주스럽게 움직이는 가을 손길.
창호지로 문도 바르고 좌복도 거풍을 시켜야 하고, 여름내 비에 씻기고 더위에 절은 장독의 손질도 이맘때면 부지런히 갈무리를 하게 마련이다.
또 가을걷이도 빼 놓을 수 없다. 붉은 고추 따서 말리는 것, 김장밭 가꾸는 일 등등.
그런데 올 가을은 바쁘지 않는 계절이 되어 버렸다.
때늦은 태풍으로 내린 폭우에 김장 밭은 다 씻겨 내려가 예전의 채소밭의 풍성함은 간 곳이 없고, 내리쪼이는 가을볕에 밀짚모자 눌러쓰고 붉디붉은 고추를 따다가 손질하는 풍요로움도 맛보지 못하며, 호박은 채 익기도 전에 연일 내리는 비와 바람으로 떨어져서 호박 덩쿨 한켠에 나둥그러져 있고 그 옆 밤나무는 아람을 채 떨구지도 못한다.
춘추春秋, 봄과 가을은 대비를 잘 이룬다.
봄이 씨를 뿌리는 계절이고 새들의 지저귐과 설렘의 대명사라고 한다면 가을은 거두어들이고풀벌레 소리 정겨운 차분한 계절이다. 저녁예불 시간을 마치고 듣는 풀벌레 소리나 새벽예불 시간이 지나 도량에서 듣는 여러 가지 벌레 소리는 마치 자연 교향곡 같다.
귀뚜라미 소리가 단연 1위를 차지하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지렁이 소리도 참 정겨운 소리다….
그런데 지렁이 소리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가을에 느끼는 정취 중에 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두어들인다는 말 이외에 방귀放歸 놓아 돌아가게 한다는 말이다.
방귀放歸는 만물이 태어나 본래로 돌아가는 것이다.
초목은 가을이 되면 몸속의 물을 다 밖으로 내 보낸다.
봄에 뿌리를 통해 물을 끌어들여서 가지마다 싹을 틔워 한여름 맘껏 뽐내다가 가을이 되면 다시 뿌리를 통해서 밖으로 조금씩 조금씩 내보낸다.
물기를 내보내고 나서 나름의 색으로 단풍을 장식하고 그 잎조차 땅으로 돌려보내 양분을 삼는다. 겨울을 최소한의 재산으로서 산다… 말라서 죽지 않을 만큼.
꼭 내게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살 수 있는 것, 필요치 않는 부분은 남김없이 내줄 줄 아는 자연이야말로 말없는 스승이다.
아니 자연은 사계에 걸쳐 항상 법을 설하고 있는데, 듣지 못하는 이가 있어 이런 말이 나온다.
봄에는 만물이 생동하는 것으로써 법을 설하고
여름에는 무성함과 장마로 인해 멸렬되는 초목으로써도 법을 설하고 계신다.
어찌 스승이 항상 웃는 얼굴과 고운 목소리로만 가르치겠는가.
때로는 매를 들기도 하고 때로는 찡그린 얼굴을 하기도 하고 또 제자를 위해서는 성내고 외면하는 것으로서도 가르침을 주신다.
태풍이 이 같음을 우리는 명심해서 원망하지도 포기하지도 말고 많은 가르침에 대해서 한층 더올곧은 마음으로 삶에 임한다면 태풍 만나기 전보다 더 나은 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산과 물과 돌과 소나무와 달을 보면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는가….
산을 오르면서 그 높은 것 배우기를 생각하고, 물에 다다르면 그 맑은 것 배우기를 생각하고, 돌에 앉으면 그 굳은 것 배우기를 생각하며 소나무를 보면 그 절개가 곧은 것을 배우기를 생각하고, 달을 대하면 그 밝은 것 배우기를 생각하는 것이니 이 세상 만물들에 다 장단점이 있어 가르침을 주지 않는 것이 없다.
방귀의 크나큰 진리를 가르쳐 주는 가을.
이 가을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모든 것이 방귀의 자세이다.
배운 만큼 가르쳐 주고 얻은 만큼 보시하고자 한다면 무엇에 방해 받고 무엇에 불평이 있겠는가.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도 타인에의 방귀의 자세이다.
우리가 가을을 좀더 신중히 받아들이고 한번 더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을 내는 것은 아마도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가을,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는 계절, 돌아보고 돌아보아 자신을 살필 수 있을 만큼 살펴보고픈 계절, 성숙됨을 바로 볼 수 있는 계절.
그러므로 모든 것을 놓아 버릴 수 있는 여유스러움이 있는 계절이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