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는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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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성규
2000년 10월 224호
내일 당장 죽는다면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낼 것인가?
내일 당장 죽는다는 각오로 오늘을 살지 않으면 우리는 부처가 될 수가 없다. 젊음이 있을 때 이렇게 절박하지 않으면 또한 이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도 없다.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는 맹세보다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하는 것은 없다. 던져 놓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부메랑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철저한 회귀의 본능이 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겠다고 서원하면서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포기할 때 자신과 상대방을 모두 살리며 그곳에 가장 위대한 불멸의 꽃이 피는 것이다.
인간이 어떤 궁극의 삶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 종교다. 어떤 종교든 종교는 그 종교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그 종교 고유의 방법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표현한다.
같은 신앙을 믿고 있으면서도 도달하는 목적지는 천차만별이 될 수 있다. 불교신자, 불자 즉 부처님의 아들(스님도 포함)이라는 것은 절에 살고있거나 절에 다니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목적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아 부처가 되고자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먹물 옷을 입었다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고자 부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부처님께서 보여 주신 그 삶의 모습이고자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수행자가 부처님의 아들로 남아 있을 수 있음도 당연한 이치이다.
여기서 신앙에 앞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신앙으로 도달해야 할 확고한 목적이다. 금강경에서도 경전의 앞머리에 ‘지극한 마음을 일으킨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마음을 내었을 때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수행하며 어떻게 마음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고 수보리가 부처님께 묻고 있다. 불교를 믿고 따르는 자의 목적은 “견성성불見性成佛, 본성을 꿰뚫고 부처를 이룬다”이다.
여기서 불자들은 자신이 이제까지 걸어왔던 신앙의 길을, 지금도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 신앙의 길을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연 내가 부처를 이루기 위하여, 내 삶을 정화시키기 위하여,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있기 위하여 절을 열심히 찾고 있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과 집안 식구들의 평안과 부귀를 위하여, 자식 잘되기를 빌기 위하여, 또 남편 돈 잘 벌고 진급 잘되기를 빌기 위하여 절을 열심히 찾았는지.
우리는 우리가 깊이 믿고 있는 신앙의 나침반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한번쯤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것은 세상살이가 어려울수록 세상이 혼란할수록 더욱더 근원적인 문제가 된다.
부처가 되고자 맹세한 사람의 태도와 기도는 과연 어떨 것인가? 자신만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겠는가? 자기 남편만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겠는가? 자기 자식만 공부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겠는가? 자신과 가족만 배부르면 소말리아와 같은 이웃은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겠는가? 나만 즐길 수 있다면 다른 생명은 무참히 죽여도 좋다고 생각하겠는가? 자기의 자식만 학교에 잘 다니면 청소년 범죄가 어떻게 되든, 사회 윤리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겠는가? 오늘 어떤 생각을 해 놓고 내일 당장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겠는가? 백년도 되지 않는 이 귀중한 삶을 텔레비전이나 보며 술이나 마시며 그렇게 보내겠는가? 쓸데없는 일에 시시비비하며 그렇게 살겠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과 더불어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다른 생명들이 편안하고 자유롭기를 기도할 것이며, 스스로 공부 열심히 하여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더 큰 디딤돌이 되도록 기도할 것이며, 남편이 돈 많이 벌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비의 비를 뿌릴 수 있도록 기도할 것이며, 기도한 대로 자신의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이며, 기도한 대로 그러한 세상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몸부림칠 것이다.
목적이 분명할 때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 목적지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불자로서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렵더라도 목적지인 부처를 향하여 맴돌고 있지만, 목적이 불분명한 사람은 옆에서 심한 유혹이 있거나 집안에 재난이 닥쳤을 경우 쉽게 자신의 신앙인 불교를 포기하고 다른 신앙으로 옮길 수 있다.
단순히 복을 빌기 위하여 절을 찾고 있는 불자가 있다면 복이 주어지지 않을 때는 종교적 혼란을 겪게 되며,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처가 되기 위하여 절을 찾고 있는 불자라면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닥치더라도 부처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인생에서 만나기 어려운 삶을 성숙시키는 계기로 만들 것이다. 부처가 목적일 때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어려움과 사악함까지도)이 긍정적일 수밖에 없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주어지는 대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자신의 안이나 밖에도 온통 목표뿐인 것이다.
목적이 분명하다면 방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달해야 할 목표가 없을 때는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질에 심각한 문제가 되지만 목표가 분명하다면 어디로 가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살기 좋은 불국토라도 그 곳에 강도들이 살고 있으면 지옥이 되는 것이며, 무간지옥이라 하더라도 그 곳에 양심과 질서를 지키는 선량한 보살들이 살고 있으면 그 곳은 극락이다.
그리고 부처가 되는 커트라인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다. 시대에 따라 점수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며, 장소에 따라 점수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참선 조금 해보고 안 된다고 하지 마소. 견성성불하여 부처 되는 커트라인은 부처님의 6년 고행이다. 적어도 그 정도는 노력해보고 공부 안 된다고 푸념한다면 부처님도 긍정적으로 봐 주실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진리는 진리일 뿐이다.
내가 어리석어 몰랐을 때는 불교를 믿는 숫자도 중요했고,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겠다고 휘두르는 위세도 중요했는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허상일 뿐.
숫자와 위세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처가 되고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수행하는 선혜와 같이 지극한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이 우주는 행복한 것을.
세상을 탓하지 마소
시대를 탓하지 마소
내가
진리의 세계를
당당하게 걸어가면
그것만으로도
이 우주는 행복인 것을.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