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쉽게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소롭지 않게 들리는 말이나 어떤 사람의 태도나 성격등이 자신의 신경 혹은 아픈 곳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경 혹은 아픈 곳이란 자신의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의식적 자아로부터 억압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겪는 체험내용가운데서 현실세계의 도덕관이나 가치관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하게 된다. 가령 어릴때부터 性的인 것을 입밖에 내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듣고 자라온 사람은 성적인 것을 억압해 왔고, 그 억압된 성적인 것이 자신의 그림자가 되어 있다가, 이를테면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어떤 사람이 성추문으로 신문에 보도되었을 때 그것이 자신의 억압된 성적 그림자를 자극하여 그에게 지나치게 열을 올리면서 비난의 화살을 퍼붓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나쁜 짓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교육받아온 경우 나쁜 생각과 감정이 자신의 무의식에 억압되어 그림자를 만든다. 이 그림자가 이를테면 어떤 존경받는 이의 부정부패 행위에 투사되어 과도하게 분개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얼뜻보면 도덕적으로 결백하게 보이고 주위사람들도 그렇게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신 속에 억압된 성적 그림자나 나쁜 감정의 그림자를 갖고 있는 한, 결코 고상하거나 청렴결백 할 수 없다. 그런 욕구를 억눌러 억지로 그렇게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사람처럼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부정의 수렁에 자기도 모르게 빠지며, 도덕적 결백을 신조로 내세우는 사람이 성적 추문을 일으키며, 자유와 고매한 정신을 지향하는 지식인이 권력과 금욕에 눈이 어두워 뭇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자신의 그림자를 해결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위선자僞善者나 이중인격자二重人格者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림자는 개인적 성격을 띄고 있는 『개인 그림자』외에 집단적 성격을 띄고 있는 『집단 그림자』도 있다.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다보면 그 집단에 공통되는 도덕관과 가치관이 형성되어 그것에 맞지 않는 것은 집단의식으로부터 밀려나 그 집단 공통의 그림자를 형성하게 된다. 개인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집단 그림자 역시 자각되지 않는 한 집단간에 그 그림자를 투사하여 집단적 편견을 강화시켜 나간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지역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국가간에는 한국과 일본을 들 수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은 근본적으로 그 지역의 그림자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경상도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전라도 사람의 성격은 바로 경상도 사람 자신들의 내면에 억압되어 스스로 보지 못하고 있는 자신들의 그림자이다. 그것이 전라도 사람들에게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 역逆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문제인 그림자를 상대방에게 투사하여 상대방을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이 상대방의 것이 아니고 자신의 어두운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자신도 모르고 있는 자신들의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동양과 서양의 관계도 그러하다. 뿐만아니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유물론과 유심론, 유신론과 무신론 등 이념이나 사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인간사人間事에 있어서 개인과 집단간의 갈등, 국가간의 알력, 종교간의 분쟁등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신들의 그림자에 기인하는 수가 많다.
어떻게 그림자를 해결할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구경각究竟覺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림자는 면할 수 없다. 구경각의 경지는 빛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림자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자아自我가 없는 무아無我의 경지이기 때문에 그림자가 있을 수 없다. 궁극적 깨달음을 얻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자신과 인류의 행복을 원한다면 그런 노력은 하지 않을 수 없다.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문제(그림자)에 대한 인식은 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자신의 문제가 타인에 끝없이 투사되어 자신도 괴롭고 타인도 괴롭다.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그림자를 알고 받아드려야 한다. 그림자는 자신의 무의식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그림자를 갖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자신을 잘 관찰하면 자신의 결점이나 열등한 면이 자신의 그림자와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불쾌한 모습이기 때문에 드러다 보기 싫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정신치료에서 환자가 치료에 저항을 나타내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으려는 저항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진실하려는(無自欺)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결점이나 열등한 면을 볼 수 있고 대면할 수 있다. 특히 이런 결점이나 열등한 면인 자신의 그림자는 대인관계에서 타인에게 투사되어 나타날 수 있다. 투사가 일어날 때는 상대相對에 대하여 강한 감정반응을 일으키고 그 상대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상대에 자신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지각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들의 삶이 대체로 집착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집착에 길들어져 있고 집착 덕분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떠나고서야 자기 주장이 어디 있으며, 세속적 학문이 어떻게 가능하며, 세속적인 입신출세가 어떻게 가능한가. 아집과 법집을 떠난다고 함은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는 마치 자아의 죽음(無我)과도 같은 것이어서 두려움으로 느껴진다. 그러기에 집착을 끊기 위해서는 새롭게 태어나는 각오와 용기로 수도자적修道者的 삶을 살아야 한다. 집착이 끊어진 상태에서 비로서 우리는 진정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無爲)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