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털이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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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소 - 혜일
2000년 09월 223호
출가인 이라도 공을 차며 심신을 단련한다는 것은 허물이 될 수 없을뿐더러 좋은 일이나 지나친 공놀이가 인因이되어 여러 가지 연緣을 꿰어 맺더니 우리들에게 강원 퇴방이라는 과果로 결말이 났으니 부처님께서도 누누히 경계하신 말씀 중 집착으로 인한 화근을 일찍 깨닫은 셈이다. 퇴방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업료를 지불하긴 했지만.... 물론 다시 들어와 강원을 졸업한 것을 보면 해인사와 질긴 인연이 있었는가 보다.
정말 그때 우리는 그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을 찾는데, 축구는 돈이 별로 들어가지 않는 운동이었지만 그래도 공을 차고 나면 시장기가 있기 마련이어서 그 당시 강원 한달 수용비(사중에서 학인에게 지급되는 보시)가 오천원이었는데 처음엔 이 수용비를 모아서 빵이며, 우유, 라면을 차담하다가 나중엔 개인 주머니에 의존하게 되고 이것도 바닥이 나니 외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 사인이 필요로 했었지요.
이렇게 몇 달이 지나니 외상값이 그 때 돈으로 이 십만 원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대중이 외상값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누구에게도 손벌리지 않고 떠떳하게 외상값을 갚고 차담비를 마련할 수 있는 묘안을 짜내었습니다. 지금은 노력만큼 수익이 보장되지 않아 청살모의 좋은 겨울 양식이 되지만 그때만 해도 가야산에 널려있는 잣을 따서 산중 스님께 조금 드리고 수입을 올리고 있는 일에 착안하여 나는 대중들과 은행을 털어서 산중스님께 조금 공양 올리고 팔 것을 결의하고 은행을 털기로 하였습니다. 공 잘 차는 힘으로 열심히 은행을 털고 있는데 웬 낯선 처사들이 와서는 이 은행나무는 이미 봄에 자기들이 수확하기로 사중과 계약하고 대금을 미리 지불하였다며 계약서까지 내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상값을 갚아야 한다는 강박감과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아까워서 도반 중 누군가가 처사들에게 욕하며 강압으로 돌려보내고는 계속 은행을 따면서 일부를 멀리 바위 뒤에 숨겼습니다. 얼마 후 사중스님을 모시고 나타난 그 처사들에게 은행을 되돌려 주고는 수고비는커녕 이 일 때문에 강주스님이 대노大怒하셨다는 이야기로 마음을 조이며 강원으로 내려 왔는데 참회할 생각을 하니 마음은 무거웠지만 그래도 발걸음이 가벼운 것은 숨겨 놓은 은행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허나 이 숨겨 놓은 은행 때문에 모든 것이 탈로 나고 이로 인해 우리는 강당 퇴방이라는 최고의 벌을 받았다.
당시 나는 평지풍파를 일으켜 도반들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은 느꼈던지 다른 도반스님들은 다 떠나고 없는데 혼자 남아서 여러 군데 숨겨 놓았던 은행을 꺼내어 온 몸에 옻을 올라가며 껍질을 벗겨 알맹이를 말려서 현금으로 바꾸어 외상값을 깨끗이 청산한 후 비참한 몰골로 산문을 나섰던 기억이 생생하다.
강주스님은 누구보다도 저를 믿고 예뻐해주셨기에 스님께서 누가 주동을 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솔직히 제가했노라고 말씀드리지 못하였고 도반들도 모두 함께 책임지기 위해 함구를 해주었습니다.
사형스님! 아니 강주스님 죄송합니다. 십 수년만에 진실을 밝혀 참회 드립니다.
지금은 추억으로 남았지만 당시에는 제법 큰 사건이었지요.
인과응보라고 했던가. 지금은 도둑이 주인 되어 수천 그루의 유실수가 있는 사찰의 주지가 되어 도둑이라도 맞을세라 짓돗개와 함께 밤잠을 설치곤 한답니다. 세상은 둥글고 돌고 도는 법, 평지풍파도 약이 될 때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