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4년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강원도 원주지역의 불적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당시 아버지가 원주금융조합에 근무하고 계셔서 원주군내의 사정을 자세히 전해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는 흥법사지 뿐만이 아니라 법천사지法泉寺址와 거돈사지居頓寺址가 있다는데 깊은 산골이어서 찾아가기가 힘들며 특히 거돈사지는 찻길이 없어 더욱더 힘들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이셨다.
흥법사지 조사를 마친 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우선 법천사지를 찾아 나섰다. 흥법사지에서 앞에 흐르고 있는 강을 건너 약5Km 좁은 길을 따라 걸으니 원주와 경기도 여주를 잇는 신작로가 나스며 문막면 소재지에 이르게 되었다. 문막에서 부론면 부론리까지 약16Km인데 이때는 하루에 한번밖에 없는 버스편으로 겨우 부론면 소재지에 이르러 여인숙에서 하루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이 걸어나서 법천리法泉里에 이르니 자욱한 안개 속에 당간지주가 희미하게 보이어 일대가 절터임을 알수 있었다. 법당과 사찰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에는 민가가 여러집 들어섰으며 이밖에 일대는 모두 논과 밭으로 변해져 있었다. 너무나 파손이 심하여 석축 또는 건물자리가 뚜렷하지 못하고 곳곳에 파손된 석탑의 조각, 연화문 배례석, 주초석들이 산란할 뿐이었다. 다만 지광국사현묘탑비智光國師玄妙塔碑(현재 국보 제59호)가 건재한데 현묘탑은 일제가 일본 오오사까大阪까지 반출하였다가 반환되어 현재 경복궁에서 보존되고 있다. 이들 탑·비는 사찰 중심과는 떨어진 언덕 중턱에 정연하게 석축을 쌓아 특별한 배치와 장엄이 마련되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곳저곳을 찾아 여러시간을 조사하였던지 해는 벌써 오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까지 친절하게 대접받은 리장댁에 정중히 인사를 하고 거돈사지가 있다는 부론면 정산리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의 이름난 고승高僧 원공국사圓空國師가 주석하였던 사찰로 유명하여 여러 기록에 보이는데 이 절터에 대한 주목은 전혀 없었고 따라서 지표조사 조차 진행된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아무리 멀거 험준한 길이라도 반드시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길을 나섰던 것이다.
가파른 고개를 두 개 넘고 눈길에 미끄러지며 깊은 골짜기를 헤치고 또 하나의 높은 고개에 오르니 멀리 작은 마을이 보이고 넓은 절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부론면 정산리 2구 거돈사지 인 것이다. 절터를 찾은 기쁨에 고개마루에 앉아 쉬면서 절터와 마을을 내려다보는데 잠깐 사이에 주위가 어두워지고 집집마다의 굴뚝 연기 대신 불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였다. 산중의 어둠은 쉽게 찾아오는 것이라 서둘러 마을을 향하였다. 연세가 지긋한 분을 찾아 쉽게 사랑방에 들어 갈 수 있었으며 저녁식사 후 동리 어른들 몇 분을 모시고 함께 절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에 있었던 원공국사승묘탑勝妙塔이 일제시대에 경찰에 의하여 강제로 반출되었는데 그 자리가 뚜렷하다는 이야기, (이 승묘탑은 서울의 일본인 개인 집으로 옮겨졌다가 광복후인 1948년에 현재의 자리인 경복궁내로 옮겨졌으며 현재 보물 제190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그의 탑비는 옮길려고 했으나 동리사람들의 저항으로 제자리에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그 이후로는 아무도 이곳을 찾는이가 없었는데 필자가 찾아와서 반갑다는 등으로 이야기 꽃이 피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시원한 산곡풍을 등에 지고 넓은 절터를 한바퀴 돌았다. 거대한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높이 3.5m의 석축이 정연하게 남아 있으며 그 길이는 50m가량이었다. 동·서로 길게 축석한 남향의 석축 중앙에는 중문자리와 계단지가 뚜렷하며 동·서 회랑자리도 잘 판단되었다. 절 마당의 중앙에는 큼직한 3층석탑이 건립되어 있으며 북쪽의 금당지金堂址 중심에는 불좌대인듯한 원형대석이 남아있고 그 주위에는 기단석과 기둥 초석이 정연한데 이와같이 사찰의 중심부가 잘 보존되고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곳 마을의 집집마다 많은 석재를 사용하고 있었다는데 모두 이 절터에서 옮겨진 것이다. 어느 집이나 사랑방으로 들어가는 문 디딤돌은 대개 문양이 조각된 반듯한 석재들이었다. 사찰입구에 당간지주1석이 남아있고 경내에서 동쪽으로 약60m 떨어진 곳에 원공국사의 승묘탑비(현재보물 제78호)가 건립되어 있는데 보존은 양호하다. 이 탑비에는 원공국사에 관계된 내용이 소상하게 적혀 있어 당시의 사회상까지 알 수 있는 귀한 금석문으로 주목되고 있다.
원공국사는 속성이 이씨이고 이름은 지종智宗, 자子는 신측神則이다. 왕건 태조13년(930)에 출생하여 제4대 광종21년(970)에 靈通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40세에 국사가 된 뒤 거돈사에 주석하다가 제8대 현종9년(1018)에 89세로 입적하였는데 당시 현종은 시호를 원공국사라 하고 탑명은 승묘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 거돈사지에서 크게 주목된 것은 절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3층석탑이었다. 이곳의 법당지는 높직하게 구축된 대지를 이룩하고 있는데 이 석탑도 여러개의 면석을 돌려 높직한 기대基台를 구축하고 그안에 석탑을 건립하여 크게 주의를 끈다는 것이다. 이렇듯 고대高台를 구축하고 있는 석탑으로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충북 충주시의 중원탑평리7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국보 제7호)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은 역시 지역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진 상황이 아닌가 한다. 이와같이 중요한 석탑이 어찌하여 이제까지 조사되지 않았었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이 석탑은 거돈사 가람의 중심을 이룬 법당 앞의 석탑으로 현재의 자리가 원위치이다. 2층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한 전형적인 일반형석탑이다. 여러개의 판석으로 지대석을 구축하고 하층기단 면석에는 양우주와 1탱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었다. 하층기단 갑석은 상면이 약간 경사졌으며 원호와 각형의 괴임을 마련하여 상층기단 면석을 받고 있다. 상층기단 면석에도 양우주와 1탱주가 정연하며 2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상층기단 갑석에는 하면에 부연이 마련되어 있고 약간의 경사진 갑석 상면의 중앙에 2단의 괴임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석씩으로 조성되었는데 각층 탑신석에는 양우주가 정연하다. 각층 옥개석은 하면에 받침이 5단씩이고 상면에는 2단의 괴임을 마련하여 윗층의 탑신석을 받고 있다. 낙수면은 평박하고 네귀퉁이 전각에 반전이 있어 경쾌하며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있어 당초에는 장중하였던 석탑이었을 것이다. 상륜부는 노반과 보주형 1석이 남아있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안정감이 있고 단아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기단부의 구성으로 보아 건립연대는 통일신라 하대인 9세기경으로 추측된다. 현재의 높이 5.45m로 대형에 속하는 편인데 특히 고대에 건립되어 있어 실제보다 더 높게 보인다. 죽령竹嶺 북쪽에서 이와같은 신라석탑은 드문 예로서 더욱 주목되는데 현재 보물 제750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